< 목록보기

사진에 담은 미국(4) –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Coast to Coast) Part.1

by

사진 1. 앨커트래즈섬 너머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떠오르는 해

미국, 동쪽으로 대서양, 서쪽으로 태평양에 맞닿은 나라다. 두 바다를 마주 보고 각각 애팔래치아산맥과 로키산맥이 골격을 만든다. 두 산맥 사이엔 소 떼가 풀을 뜯는 들판과 사슴이 뛰노는 숲이 속살처럼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 바다까지 미시시피와 미주리, 허드슨과 포토맥, 콜로라도와 컬럼비아 등 무수히 많은 강이 핏줄처럼 흐르며 대지를 적신다. 시간대만 4개, 시차는 3시간으로 뉴욕에 해가 떠도 샌프란시스코는 아직 새벽이다.

이 나라의 크기는 날씨로 더 실감한다. 뉴욕주 등 동북부의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에 폭설까지 내린다. 오죽했으면 처음 학교를 알아볼 때 ‘추우니까 오지 마세요’란 얘기를 들었다. 반면, 동남부 플로리다주는 한겨울에도 바다에서 물장구치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일 만큼 따뜻하다. 또, 숲이 흔한 동부에서 서부로 갈수록 메마른 땅이 늘고, 나무는 작아진다. 황무지는 이내 사막으로 바뀐다. 그러다 로키산맥을 넘으면 사시사철 온화하고 비옥한 땅에서 야자수가 자라는 캘리포니아주가 나타난다.

이 광활하고 다양한 환경이 공존하는 땅,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한쪽 끝에서 반대편까지 달리기로 했다. 그 길에서 만날 사람과 마주할 풍경, 새롭게 배울 역사와 사실에 대한 기대도 컸다. 그리고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로 했다.

하룻밤 새 무너진 난공불락 요새 ‘풀라스키’

조지아 대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차로 4시간 거리, 서배너(Savannah)에 있다. 영국은 식민지 경영을 위해 1733년 이곳을 세웠다. 도시는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2세의 이름을 딴 조지아의 첫 수도가 됐다. 이후 서배너는 플로리다의 스페인 식민지를 견제하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플랜테이션 농장의 작물을 수출하는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남부의 물류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독립전쟁은 물론 남북전쟁 때 전투가 벌어졌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땐 미 8공군의 전신인 미육군항공대 제8폭격기사령부가 머물면서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2. (시계방향) 식민시대 모습이 남아있는 웜슬로우 사적지, 서배너 시청, 타이비섬 부두, 미8공군 박물관의 B-17

서배너 도심에서 동쪽으로 20분가량 운전하면 대서양과 서배너강이 만나는 어귀에 이른다. 이곳에 칵스퍼섬(Cockspur Island)이 있다. 이 섬엔 19세기에 지어진 요새가 수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풀라스키 요새(Fort Pulaski)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군인, 카지미에시 푸와스키(Kazimierz Pułaski) 백작의 이름을 딴 곳이다.

푸와스키는 폴란드 귀족이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분할 당시 이에 맞서 싸웠다. 이후 망명한 프랑스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대륙군에 합류했다. 대륙군 기병대를 개편하고 이끌었던 푸와스키는 1779년 서배너 전투에서 기습에 무너진 아군의 후미를 막다가 산탄의 일종인 포도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렇게 폴란드부터 미대륙까지 기병대를 이끌며 여러 제국에 맞서 싸웠던 그가 죽고 얻은 건 ‘자유의 병사(Soldier of Liberty)’, 그리고 ‘미국 기병대의 아버지(The Father of American cavalry)’라는 이름밖에 없었다.

요새 건설은 182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로버트 에드워드 리(Robert Edward Lee) 공병 소위가 현장을 감독했다. 훗날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그 로버트 리다. 요새는 1833년 풀라스키라는 이름을 얻었고, 1847년 완공됐다.

당시 풀라스키 요새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요새벽의 가장 두꺼운 부분은 3미터가 넘는 11피트에 달했고, 얇은 곳도 2미터가 넘는 7.5피트였다. 당시 대포는 대부분 강선이 없는 활강포였다. 짧은 거리에선 관통력이 높지만, 1km가 넘는 거리에선 관통력과 정확도 모두 급격히 떨어지는 게 당시 활강포의 한계였다. 게다가 요새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육지는 1.6km 떨어진 타이비섬이었다.

사진 3. (시계방향) 보루와 해자 그리고 요새벽, 연병장, 요새벽 내부, 포대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남부연합군 장군이 된 로버트 리가 캐롤라이나와 조지아의 해안 방어를 위해 파견됐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그는 요새벽 위에서 타이비섬을 바라보며 당시 스물네 살에 불과한 요새 수비대 지휘관 찰스 옴스테드(Charles Hart Olmstead)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부연방군이 저곳에서 포탄으로 널 후끈하게 하겠지만, 저 거리에서 요새벽을 뚫지는 못해.”
(They will make it warm for you with shells from that point but they cannot breach at that distance.)

로버트 리의 자신감은 기존의 지식에 기반했다. 공사 초기, 자신이 현장 감독을 했단 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당초 토마스 셔먼(Thomas West Sherman)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연방군의 인식 수준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북군은 해군을 동원할 계획이었다. 함정이 요새에 근접해 함포 사격으로 요새 포대를 무력화하는 방법이다. 요새포가 함포보단 사거리가 긴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 과정에서 발생할 아군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이때 셔먼의 참모인 퀸시 애덤스 길모어(Quincy Adams Gillmore) 공병 대위가 아이디어를 냈다. 기존 활강포보다 유효사거리가 2배 이상 긴 강선포를 타이비섬에 배치해 포격하는 안이었다. 북군은 이 아이디어를 채택해 넉 달 동안 숲과 모래언덕 뒤에 숨어 밤마다 포대를 구축했다. 그리고 1862년 4월 10일 오전 8시 10분, 길모어의 지휘 아래 박격포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산탄을 쏘아 올렸다. 북군의 항복 권고를 남군이 받아들이지 않은 직후였다. 영국군 포도탄에 푸와스키가 숨진 것처럼 북군의 산탄이 풀라스키 요새로 날아들었다. 이어서 타이비섬에 분산 배치된 북군의 포대 11곳의 강선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남부연합군도 요새포로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북군의 포대에 닿은 남군의 포탄은 소수에 불과했다. 반면, 강선이 만든 회전으로 정확도와 관통력이 향상된 북군의 포탄은 요새의 남동쪽 모서리 주위를 때리기 시작했다. 유효사거리도 짧고, 요새벽에 갇힌 남군의 활강포는 마치 팔 길이도 짧고, 파고들지도 못하는 권투 선수처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날 일몰까지 10시간 반 동안 이어진 북군의 포격에 난공불락이라던 요새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다음 날 아침 북군은 포격을 재개했지만, 남군의 요새포는 대부분 침묵했다. 심지어 오후 2시, 무너진 요새벽 사이로 날아온 북군의 포탄이 탄약고와 이어진 복도에 떨어졌다. 당시 탄약고엔 4만 파운드의 흑색화약이 보관돼 있었고, 이게 폭발한다면 요새는 물론 수비대 모두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다. 결국 남군은 30분 뒤 지휘관 옴스테드 대령의 명령으로 백기를 들어 올렸다. 포격이 시작된 지 30시간 만이었다.

사진 4. 복구된 풀라스키 요새 외벽에 남아있는 남북전쟁 당시 탄흔과 깨진 요새포

풀라스키 요새의 함락은 파장이 컸다. 북부연방군은 대서양의 제해권을 가져가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리고 서배너를 중심으로 한 남부의 물류는 멈췄다. 북군의 포대를 구축하고 포격을 지휘했던 길모어 대위는 장군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반면,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리 장군은 비판에 직면했다. 비록 자신의 명령으로 보강하거나 구축한 또 다른 요새와 포대 덕분에 서배너 함락을 막을 수 있었지만, 바닷길이 막힌 항구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리는 패장이 된 옴스테드 대령보단 상황이 나았다. 옴스테드는 난공불락이라던 요새를 30시간 만에 내줬다는 오명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다. 그리고 강선포 앞에선 요새벽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게 됐고, 요새의 시대도 저물게 됐다. 아울러 사관학교 우수 졸업생들을 공병 장교로 임관시키던 미군의 전통도 차츰 바뀌게 됐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풀라스키 요새 위에서 로버트 리가 옴스테드에게 요새벽은 뚫리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것도 같은 범주다. 웨스트포인트 차석 출신에 요새의 초기 공사를 맡았고, 멕시코와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상관의 한마디는 신출내기 지휘관에겐 금과옥조(金科玉條)였을 거다. 그리고 그 얘기에 북군이 포대를 구축할 넉 달 동안 남군은 그 작전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방해하지도 않고, 요새벽에 모래만 쌓았다. 그 결과로 풀라스키라는 이름을 2번 죽이고, 옴스테드 자신도 오명을 뒤집어썼다.

유목(流木)이 만든 이색 풍경 ‘제킬 아일랜드’

서배너에서 남쪽으로 1시간 반가량 달리면 제킬섬(Jekyll Island)에 닿는다. 이곳은 조지아주의 대서양 연안을 이루고 있는 골든 아일즈(Golden Isles) 가운데 하나다. 이 섬의 북동쪽 해변은 죽어서 떠다니는 나무(Driftwood, 流木)가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름도 유목 해변(Driftwood Beach)이다.

사진 5. 유목(流木)을 전경(前景)으로 삼아 촬영한 제킬섬의 해 오름

바닷가에서 해오름이나 해넘이를 찍을 때 전경(前景)이 돼줄 섬이나 반도 같은 지형, 등대나 부두 같은 인공물, 사람이나 새 같은 생물이 없다면 밋밋한 경우가 많다. 이곳에선 유목(流木)이 훌륭한 전경이 돼준다. 덕분에 빛의 방향과 셔터의 속도를 조절하면 죽음으로 가득한 늪부터 그 속에서 떠오르는 희망도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다.

사진 6. 유목(流木)을 비춘 사광(斜光)과 파도를 누른 느린 셔터로 표현한 늪

정복자와 흔적 ‘세인트오거스틴’

조지아주 제킬섬에서 2시간 남짓 남쪽으로 이동하면 플로리다주 동북부의 대도시 잭슨빌(Jacksonville)을 지나 세인트오거스틴(St. Augustine)에 이른다. 이곳은 1565년 스페인의 뻬드로 메넨데쓰 데 아빌레스(Pedro Menéndez de Avilés) 제독이 세웠다. 미국 본토에서 유럽인이 만든 가장 오래된 도시다. 이름은 배가 상륙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축일에서 따왔다.

돛단배가 활약했던 대항해시대엔 바람과 함께 해류가 배의 속도를 좌우했다. 당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최적 경로는 카나리아 해류를 타고 아프리카 북서해안을 따라 내려온 뒤 북적도 해류를 타고 서인도 제도에 닿는 길이었다. 이 배가 신대륙에서 금을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땐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없었다. 맞바람에 해류까지 거슬러 범선이 이동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 서인도 제도 동쪽 바하마와 나소 등 도서 지역엔 스페인 보물선을 노리는 영국의 사략선 등 해적이 바글거렸다.

바람과 해류를 타고, 해적을 피할 길은 단 하나였다. 멕시코만에서 시작하는 걸프스트림을 타고, 플로리다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이다. 문제는 플로리다 바로 위, 영국 식민지였다. 조지아의 서배너,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엔 이미 영국 해군과 포대가 있었고, 그들의 전진기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곳에선 스페인 보물선이 기항하거나 보급을 받을 수도 없었고, 영국 해군에 나포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은 세인트오거스틴에 마지막 보급항이자 영국 해군을 격퇴할 수 있는 요새를 지었다. 그 요새가 바로 북미 대륙 최초의 석조 요새이자 스페인 정복자의 흔적인 까스띠요 데 산 마르꼬스(Castillo de San Marcos)다. 우리말로 풀면 성(聖) 마가(馬可)의 성(城), 마르코 성인의 성(城)쯤 되겠다.

사진 7. (시계방향) 세인트오거스틴 구시가지 정문, 까스띠요 데 산 마르꼬스 외벽, 보루와 머탠저스강, 요새 내부

 

사진에 담은 미국(4) –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Coast to Coast) Part.2

사진에 담은 미국(4) –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Coast to Coast) Part.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