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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한 조선인 청년 변수의 짧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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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주 벨츠빌에 있는 변수의 묘소

워싱턴 DC 에서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곳에 구한말 활동했던 우리나라 인물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서재필 박사가 내가 공부하고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를 졸업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대한제국이 미국에 설립한 공사관 역시 DC에 남아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행적을 알게 된 구한말 인물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이는 변수(邉燧, 1861~1891) 였다.

변수는 1861년에 역관 출신 아버지 변진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변수는 아버지의 친구인 강위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했는데 명문가의 자제이자 조정의 고관이었던 김옥균 역시 강위와  교류하고 있었기에 변위느4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옥균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 이후 변수는 일본 교토에 있는 실업학교에서 양잠과 화학을 배웠고 1883년에는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발탁돼 미국도 방문했다.

이렇게만 풀렸다면 중인 출신의 재능 있는 젊은이가 신학문의 세례를 받아 성공한 희망적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수의 인생은 1884년 크게 달라진다. 갑신정변에서 변수가 작지 핵심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온건 개화파 또는 반개화파 대신들을 살해할 자객들을 경우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던 변수는,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변수의 일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 역시 조선 조정이 보내는 자객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변수는 1년 뒤인 1885년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빌리츠 어학원에서 2년 동안 영어를 배운 뒤 변수는 1887년에 워싱턴  DC  근교의 메릴랜드 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해 1891년에 졸업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교를 졸업한 인물이 된 것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둬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까지 한 변수는 남북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암멘 제독의 아들 그랜트 암멘과 메릴랜드 대학 창설자의 아들 칼버트 가문과도 친분을 맺는 등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혁명에 가담해 정권을 잡을 뻔 했던 조선 청년이 모든 것을 잃고 미국 땅으로 건너 온 뒤 재능을 인정받아 안락하게 삶을 이어 나가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그러나 변수의 몫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농무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변수는 몇 달 뒤인1891 10 22일 중국의 농업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교인 메릴랜드 대학을 찾았다가 기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암멘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가족 묘지로 쓰려고 했던 땅에 변수를 묻었고, 메릴랜드 대학 창립자의 아들이자 동기생이었던 칼버트 씨는 변수의 졸업장을 간직해 후손에게 전했다. 그러나 변수의 존재 자체가 잊혀졌다가1982년에 한국인 교포가 우연히 다시 발견했고, 변수가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도 재조명됐다. 칼버트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변수의 졸업장도 2012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891년에 세워진 변수의 묘비

지금의 기준에 비춰보면 변수는 이민자로서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역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해 조선 조정에서 벼슬을 얻고, 나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담했던 정변이 실패로 끝나고 모든 것을 읽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는 동포 한 명 없는 미국 땅에 와서 당시로서는 미국인들도 따기 힘들었던 대학 졸업장을 따고 명문가 자제들과 친교를 맺으며 연방정부 기관에까지 취직한 변수는 분명히 이민자로서 상당한 성취를 이룬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외적인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다 그러나 변수의 재능과 노력은 자신이 처한 시대의 한계를 끝내 넘지 못했다.

변수의 죽음이 알려진 후 변수와 친분이 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짧은 인물 평을 남겼다.

“(변수는) 일본에서 농업계통의 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 국왕의 은총을 받아 출세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도 김옥균 음모에 가담, 정변 실패 후 영원히 해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여름 워싱턴에서 그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미국 최신식 유행스타일의 양복을 입은 멋진 신사 차림이었다. 4년 만에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60달러의 보수를 받고 미국 농무부 농무국 종자과에 취직했고, 이어 미국시민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착하고 다정다감한 사나이다. 그러나 자기의 주견(主見)이 결여된 것이 그의 결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