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사설(社說)이란?
- 저자김호준
- 발행LG상남언론재단
- 발행일1998-10-15
서문
신문사설은 독자층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영향력이 크다. 사설의 주 독자층이 나라와 사회를 움직이는 엘리트 계층이고, 사설이 그때 그때의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제 등에 대해 평가하고 비판하고 여론을 자극하면서 일반 대중을 교육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주요현안에 대한 여론을 측정하거나 정책방향 등을 결정할 때 사설처럼 신속하면서도 유용한 판단의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강력하고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설이나 영향력 있는 사설란을 갖는다는 것은 오늘날 권위지가 지녀야 할 필수 요소다. 권위지가 사설란에서 전개하는 주장은 여론을 형성하는 ‘핵’이자, 여론을 주도하는 ‘견인차’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큰 보도 가치를 갖고 있어 다른 매체에 의해 인용 보도된다.
사설은 이처럼 ‘신문의 심장’으로서 기능하고 있건만 그러한 사설을 한국 언론에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제작하고 있는가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건은 아직까지 없는 것 같다. 기자가 되려는 언론 고시생이나 대기자를 꿈꾸는 올챙이 기자를 상대로 한 지침서는 그런대로 많이 있는 편이다. 허나 ‘언론의 꽃’인 논설위원이 되어 필명을 날리고자 하는 사람이나, 갑자기 논설위원실 발령을 받고 사설을 써야 하는 신참 논객이 참고할 만한 입문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문사에서 논설위원의 ‘길’을 지도하는 연수과정을 따로 마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견습기자에 대해서는 최소 6개월간의 교육기간을 두고 수련시키는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논설위원의 경우 어느날 갑자기 임명장을 받으면 그때부터 본인이 다 알아서 포치고 차치고 해야 한다. 누가 특별히 가르쳐 주는 것도 없으니 사설의 개념은 상식 선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고 주제 선택이나 집필 요령은 선임자의 어깨 너머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사설에 관한 한 지도도 없고, 메뉴도 없고, 가 볼 만한 명소도 없는 것이 우리 언론계의 현실이다.
그런 것들을 한번 새롭게 정리해서 언론 발전에 작으나마 기여해 보겠다는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다.
이 책자는 중앙의 유력 일간지가 사설의 주제 및 논지를 결정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중시되는 관행과 가치관, 저명한 전·현직 논설위원들이 사설을 쓸 때 유의하거나 중시하는 사항 등을 소개하는 데 역점을 두고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일반론으로서 사설의 역할 및 중요성, 서구 신문에 사설이 등장하게 된 경위와 역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설시대를 연 구한말 독립신문에 대한 분석, 사설 작성법과 국내외 ‘명사설’에 대한 소개 평가도 아울러 곁들였다.
필자는 서울신문사에서 논설주간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개인적인 경험과 서울에서 발행되는 종합 일간지의 현역 논설위원을 비롯하여 전·현직 언론인을 상대로 한 인터뷰, 신문사별 사례연구 등을 통해 이 책자의 뼈대를 마련했다. 다만 학술적인 것이나 외국의 사례 등은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저술에 의존했음을 밝혀 둔다.
이 작은 책자가 사설에 대한 언론인들의 전문적 이해를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나아가 강단의 언론관계 학자나 장차 언론인이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신문을 이해하는 좋은 참고서가 되기를 바란다.
1998년 여름
金好俊
제1장사설의 기능과 역할
- 가. 사설의 정의
a. 신문사의 의견이다
사설이란 신문사가 내는 ‘목소리’다. 국내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중요한 현안에 대해 사회 공기(公器)로서의 신문사가 사시(社是)와 편집강령에 의거하여 자기 견해나 주장을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을 교육하며 여론을 자극하고 양식(良識)의 눈을 일깨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논설이라고도 한다.
사설은 의견기사다. 그래서 보도기사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보도기사가 객관성을 지향한다면 사설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보도기사는 독자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에 이를 명시해서 직접적인 행위를 유도하려는 것이 사설이다. 보도기사에서는 판단이 잠재적이라면 사설에서는 현재적(顯在的)이다. 보도기사의 기능이 무의식적인 지도라면 사설의 그것은 의도적이다.
사설의 주제는 무한하다. 정치적 쟁점, 중요한 입법, 경제정책, 외교문제, 교통, 환경, 사회풍속, 대형 사건·사고, 문화행사, 그리고 지구촌 분쟁, 저명 인사의 죽음 등 어느 것이든 다 사설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사설의 제재(題材)는 오직 시의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한 편의 사설이 때로는 정권을 퇴진시키고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설은 그 위력에 비해 생명이 짧다. 세월이 지나 당시의 정세와 상황이 바뀐 뒤에 그 사설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감흥을 받지 못하는 수가 많다. 백년 전의 에세이는 오늘 읽어도 싱싱한 감동을 주지만 백년 전의 사설은 골동품적 흥미밖에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때를 따라, 때에 맞춰, 때를 위해서 쓰는 시론적(時論的) 산물이 사설이다. 따라서 사설은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상황에서만 생명이 있다.
사회학자 이만갑(李萬甲, 전 서울대 교수)은 10여년 전 편협(編協) 세미나에서 사설의 역할과 기능을 다음 세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는 사회의 기본적 윤리관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공공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들의 성질과 배경을 밝힌 다음,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 둘째는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 그리고 공공적 이슈에 관한 그릇된 견해와 조치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 셋째는 사회정의를 내세우면서 여론을 리드하고 사회의 지적 풍토를 바로 잡는 것, 요약하면 사회의 잘못된 문제를 들춰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서 바로 잡는 것이 사설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사설은 비판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스무 살 처녀 박세리의 LPGA 제패에 박수 갈채를 보내는 사설도 있고 폭우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재민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따듯한 동포애를 발휘하자고 호소하는 사설도 있다. 독일의 에밀 도비파트는 사설을 그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①투쟁형 : 사설은 공격하고 요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설은 하나의 액션이며, 정치적 행위일 수가 있다.
②주장형·성명형(聲明型) : 사설은 적절한 논의를 통해서 설득하려 든다. 객관적인 사실을 들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③해설형·강의형 : 사설은 문제를 해명한다. 까다로운 사건의 관련성을 풀어헤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다.
④회고형 : 사설은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밝혀준다. 저명인사에 대한 추도사설도 이 범주에 속한다.
⑤전망형 : 사설은 무엇이 닥쳐올 것인지 설득력 있게 예상하고 예고하고 경고한다.
⑥성찰형·명상형 : 사설은 시대상의 문제를 고찰한다. 이 경우 사설은 요설(饒舌)에 흐를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사설은 즐겨 읽히기도 한다.
'영국의 양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가디언(The Guardian)은 창간 이래 지금까지 1백 70여년간 고급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진보적 자유주의 사상과 사회개혁을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다. 가디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누구도 말하기를 주저했던 부전론(不戰論)과 국제주의와 같은 소수 의견을 과감하게 대변했다. 1956년 영국과 프랑스의 스웨즈 운하 침공 때도 영국을 풍미한 애국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의 잔재라고 공격했다. 그 결과 가디언은 판매부수가 격감했다. 양심의 소리를 지키기 위해 ‘고결한 자살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가디언은 신문제작의 원칙으로 뉴스에 대한 철저한 분석, 모든 중요한 것을 신중하게 다루는 신중함, 선정주의와 피상적인 보도를 배제하는 진지함, 특정 관점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정직함, 일방적인 의견의 강요를 용납하지 않는 진실성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와 함께 가디언은 높은 수준의 신문 문장을 강조한다. 그 결과 이 신문의 기사는 최고 수준의 문법을 유지하고 있는 문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도에서 발행되는 신문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스테이츠맨(The Statesman)은 용기 있는 사설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신문은 사설과 관련하여 다섯 가지 원칙을 마련하고 이를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 다섯 가지 원칙이란 ①법의 지배와 민주적 정부의 원칙을 지지하며 ②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하고 방어하며 어떠한 형태의 억압도 반대하고 ③인도의 경제발전을 위한 민주적이며 건전한 계획을 지지하며 ④특히 자유를 사랑하고 민주제도와 대의정부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 인도 사이의 친선을 도모하고 ⑤자유롭고 평화스러우며 단합되고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과 함께 스테이츠맨은 사설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을 고무한다. 비록 독자 투고의 내용이 신문사 의견과 상반되는 것일지라도 이를 게재하고 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2차대전 후 다음과 같은 신문제작의 원칙을 채택하고 이를 지켜 오고 있다.
一. 불편부당하며 편견이 없을 것.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 그럼으로써 민주국가를 완성하고 세계 평화를 확고히하는 데 기여할 것.
一. 정의와 인류의 이름 아래 국가의 복지에 공헌하며 옳지 못한 행위나 폭력 및 부정 부패와 싸운다.
一. 진실을 공평하고 신속하게 보도한다. 사설은 자유롭고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쓴다.
一. 어떠한 경우에도 관용을 지닌다. 활력과 생기를 잃지 않으면서 책임감과 위엄을 지킨다.
아사히는 이러한 원칙을 추구하면서 진지하고 고급적인 접근을 통해 일반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높여가고 있다. 아사히는 ‘록히드사건’ 보도에서 보인 것처럼 철저한 심층 보도와 분석으로 일본의 양심을 대변하려고 한다. 동시에 스스로의 수준을 낮추려 하기보다는 독자의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한다.
한국신문의 사시는 너무 추상적
신문사에서 신문 제작의 기본 원칙을 명문화한 것이 사시다. 신문사의 성문 헌법인 셈이다. 사시는 제작·논평의 기본 강령으로서 사설뿐만 아니라 그 매체가 제작하는 모든 기사와 프로그램을 지배한다. 사설이 펴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사시에 입각한다. 사설은 사시를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논리적 공감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특별한 사명이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신문들의 사시는 너무 추상적이다(표1 참조). 신문에서 일상적으로 구체화해야 할 실천 규범이라기보다 언론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본 모럴과 가치관을 미사여구처럼 나열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자기 회사만이 갖는 특성과 방향을 차별화해서 제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시가 신문사의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거나 실체와 동떨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김대중 정부의 서울신문 경영진은 서울신문을 ‘정부 기관지’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문의 사시에는 어디에도 정부 기관지임을 표방하는 구절이 없다. 서울신문 사시에는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다', ‘정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는 대목이 있지만 이를 정부 기관지의 표방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은 1945년 창간 이래 정부가 사실상 1백% 소유해 온 신문이다. 상법상 주식회사로 돼 있고, 주식소유 지분율은 수년 전부터 정부 49.98%, 포항제철 36.73%, KBS 13.25%, 산업은행 0.04%로 다소 바뀌긴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역시 정부 소유다. 그렇다면 이 신문의 사시에는 이런 소유구조를 반영한 제작지침이나 아니면 소유구조와 무관하게 언론의 정도를 추구하겠다는 강령이 들어가야 합당할 것이다.
경향신문의 사시는 한화그룹이 소유주가 된 후 1991년 조간으로 새 출발하면서 옛 것을 버리고 새로 제정한 것이다. 최근 작품이어서 그런지 다른 신문사 사시에 비하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경향신문은 주식회사 문화방송 경향신문 시절에는 MBC의 사시인 ‘자유’ ‘책임’ ‘품격’ ‘단합’을 함께 사용했다. 경향신문의 주인은 자유당 정부 이래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가톨릭계 신문으로 출발했다가 3공(共) 때는 사실상 정부 소유로, 6공 때는 재벌 소유로,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원지주 신문사로 탈바꿈했다. 재벌신문에서 사원 신문으로의 전환은 참으로 엄청난 변화다. 신문의 좌표와 지향점이 과거와 크게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원 신문으로서 뜻깊게 추구하는 바를 사시로 새롭게 천명해야 마땅할 것이다.
국민적 모금에 의해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에는 사시가 따로 없다. 그 대신 창간 발기 선언문에서 천명한 ‘진정한 민주화 실현’, ‘민족의 평화통일 성취’, ‘민중의 생존권 확보’ 등을 신문제작의 주요 원칙으로 삼고 있다. 창간 선언문이 사시인 셈이다. 한겨레신문은 이 선언문에 충실하게 신문을 만들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표 1] 주요 신문사의 사시 비교
신문사 | 사시(社是) |
---|---|
경향신문 | 1. 진실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할 말은 하고 쓸 것은 쓰는 사회 공기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1. 부정, 부패, 폭력을 배격하고 자유, 정의, 인권을 수호하는 데 앞장선다 1.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민주복지국가를 완성하는 데 진력한다 1.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조국의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
국민일보 | 사랑·진실·인간 |
동아일보 | 본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본보는 민주주의를 지지함 본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함 |
문화일보 | 밝은 신문, 생각하는 신문, 행복을 느끼는 신문 |
서울신문 | 나라의 이익을 앞세운다 정치를 바른길로 이끌어 준다 경제를 뻗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사회를 밝게 하는 횃불이 된다 문화를 꽃피우는 샘터가 된다 |
세계일보 |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 |
조선일보 | 1. 불편부당(不偏不黨) 1. 산업발전 1. 문화건설 1. 정의옹호 |
중앙일보 | 1.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正論)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 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大經大道)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관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 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自期)한다. |
한겨레신문 | 없음 |
한국일보 |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 |
사설 왜 다양성이 없나
우리나라 신문사설은 색깔과 다양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많이 듣는다. 신문마다 차별화를 외치지만 사설의 논조가 천편일률적으로 거의 같다. 일종의 요식행위나 통과의례로 쓴 사설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허다하다. 논조의 획일화는 정치문제나 이데올로기 문제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소설가에 대한 외설시비에서 보듯이 문화적 문제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개진되고 논의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몰고 나가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그 원인은 크게 보면 남북한간 이념 대결의 지속과 사회의 보수화 현상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신문사도 무관할 수가 없다. 조직원들에게 체감(體感)되지 못하고 있는 추상적인 사시와 대부분 중도·보수우익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 언론의 획일화 된 이념이 색깔 없는 비슷한 사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한겨레신문이 외롭게 ‘진보적 위상’을 추구해 온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한겨레신문 자체의 독보성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언론의 다양성을 담보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념차 때문인지 몰라도 한겨레신문 사설은 다른 신문과 논조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남북한 문제나 경제·노동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 한겨레신문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시 ‘조문’을 주장해 이에 반대한 다른 신문들과 격론을 벌였다(예문1 참조). 또 1997년 말 IMF사태 속에서 정치권이 강행한 실명제 유보조치를 상당수의 신문이 지지했을 때도 한겨레신문은 반대편에 섰다(예문2 참조).
- [예문1 : 주장이 상반되는 남북문제 사설]
- 대북한 적극조처 있어야 한다
- 조의 표명은 화해의 상징적 조처
-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12일자]
‘김일성 이후’에 대한 정부의 정책판단이나 성명 한마디에 국민은 물론 북한 당국이나 북한 주민, 나아가서 주변국들의 비상한 관심이 쏠려 있는 긴장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어제 정부가 국무총리의 국회 상임위 답변을 통해 ‘대화를 통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다짐하고 남북이 합의한 ‘정상회담 원칙의 유효함’을 확인한 것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주석의 돌연한 사망 이후 이틀 동안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북한의 권력승계 작업이 매듭지어진 뒤에나 재추진 여부를 검토해보겠다는 극히 소극적인 자세를 비친 것은, 한반도 주변정세의 격변이나 핵심 주변국들의 신속한 대응과는 너무 동떨어져 크게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이 격변의 시기에 북한 체제의 안정을 돕고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앞당기는 더 적극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부가 이미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인 ‘북한의 정상’과, 그가 누구이든 회담을 갖겠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새 체제의 안정을 위한 가능한 우호적 조처를 다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런 뜻에서 우리는 정부가 김주석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더라도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형식은 조의 전문 발송이든, 조문사절 파견 용의 표명이든 적절한 수준을 논의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북한 주민을 안심시키고 북한 지도부의 남한에 대한 뿌리 깊은 의구심을 덜어주는 가장 확실한 신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국민의 의식 또한 옛날 같지는 않다고 믿는다. 김주석의 죽음에 대한 다수 국민의 반응이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지 말도록 정부의 자제를 당부하고 정상회담의 조속한 실현을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에서 정부의 조문을 수용할 만큼 성숙해 있는 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제’로 비난 받던 미국의 대통령이 조의를 표한 것이나, 마오쩌둥 주석과 장제스 총통이 사망했을 때 대만 당국과 중국이 보여준 정중한 조의가 이 경우의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 조문 의원들의 경우
- [조선일보 1994년 7월 13일자]
김일성은 우리에게 50년 가까이 가해행위만을 해온 장본인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 김일성과 북한 정권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길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김일성 체제의 계승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 김의 죽음에 애도를 표명해야 하느니 조문사절을 보내야 하느니 등 정신 빠진 소리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 빠진 상태가 아니라면 위선이거나 우리 체제에 대한 모욕이다.
김일성이 죽기 직전 위협을 조금 늦추는 시늉을 하니까 그것을 곧 우리를 구원해주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단 말인가. 조문이란 죽음을 슬퍼하고 상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의 국가적 입장이나 국민적 정서에서 볼 때 김일성의 죽음은 결코 조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북한 주민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는 심리상태에 공감해서 조문을 가고 싶어졌다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도 문제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연설할 때도 제정신 없는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김일성교’에 최면되어 울부짖는 광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깨우침이다. 맞장구를 쳐주는 것은 진정 북한 동포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다.
그런데 친북 운동권이나 재야의 사람들도 아니고 바로 나라의 공무를 맡은 국회의원들이 김일성의 실체와 북한의 실상을 외면하면서 정부 차원의 애도 표명과 조문단 파견을 촉구하는 것을 볼 때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느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명하거나 조문단을 파견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주장은 (중략) 당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개인적으로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지, 정부에 대해 국가적 조처로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중략) 이들의 주장이 과연 국회의원으로서의 임무에 걸맞는 것이며 국민정서에 부합되는 것인지는 어느 형태로든 심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 (후략)
- [예문2 : 주장이 상반되는 실명제관련 사설]
- 경제 돕는 실명제 보완을
- [중앙일보 1997년 11월 16일자]
금융실명제를 전면 유보해야 한다는 전경련의 요구에 대해 정부가 현재 제도가 정착단계라는 명분 아래 정면으로 거부했다. 우리는 아직도 정부가 불필요한 명분에 집착하면서 경기 침체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실명제의 보완을 모른 체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고 본다. 현 정부는 금융실명제를 가장 내세울 만한 개혁정책으로 남기고 싶겠지만 이미 3명의 대선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실명제 보완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있어 누가 당선돼도 차기 정권에서 실명제 보완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중략) 그 이유 중 하나는 도입 초기부터 지적돼온 점이지만 실명제를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으로 운용해 왔다는 점이다. 즉 정치적 고려가 앞섰기 때문에 종합소득세로 처리해도 좋을 일을 긴급명령으로 무리하게 집행했다. 그러다 보니 거래가 위축되고 저축이 줄고 불요불급한 사치성 소비가 늘어나고 기업은 구조조정보다 현상유지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물론 현재의 경기 침체가 모두 실명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정부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민간의 보유자금을 유통시키는 일이다. 중소기업 투자 외에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도 무기명 채권의 발행을 검토할 만하다.
그 동안의 실명제는 거래비용을 줄이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린 것이 문제다. 특히 개인의 계좌를 마음대로 뒤진다는 것이 실명제의 근간을 뒤흔들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금융실명제는 대선기간 중 충분히 토의해 현재의 긴급명령을 세법개정 등으로 대체하면서 장기저리의 무기명채권 발행 등 현실적인 보완조치가 차기 정부의 집권과 동시에 시행될 수 있도록 준비돼야 할 것이다.
- 금융실명제를 희생해서야
- [한겨레신문 1997년 12월 22일자]
한나라당, 국민회의, 자민련 3당 정책위원장의 금융실명제 ‘보완’방침은 대선 이후 국회의 첫 작품으로 크게 잘못되었다. 대통령 당선자의 생각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점에서 차기 정권의 개혁이 과연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무척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금융개혁 과제는 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요구사항이기도 해서 연내 처리가 불가피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거기 금융실명제를 끌어들여 보완의 명분 아래 사실상 폐기를 추진하고 있다.
(중략) 대선 전의 정치관계 입법에서도 금융실명제가 성토의 표적이었다. 명분과는 달리 내막은 정치자금 융통에 크게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돈이 필요한 정치권과 지하자금을 굴리는 탈법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언제든 금융실명제를 거꾸러뜨릴 심산이었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는 불과 시행 한해 만인 걸음마 단계에서 제동이 걸렸다. 몇몇 ‘냄새’ 나는 전주들의 반발 때문이다. 무기명 장기채 발행 역시 야당에서조차 주저할 만큼 위험이 많은 현안이다. 검고 비린 돈을 가진 사람들한테 면죄부를 주고 도피로를 뚫어주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대문이다. 그 돈으로 고용안정기금을 만들겠다는 폐기의 명분이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와 일치할지도 의문이지만, 그 효과에도 의문이 많다. 지하지금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보다 멀쩡한 ‘지상자금’을 다시 지하로 내모는 반대의 유혹이 훨씬 클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개혁 현안을 조속히 완결하라는 국제통화기금의 독촉을 볼모로, 그와 무관한 실명제 죽이기를 국회가 슬며시 끼워넣은 것이다. 현재의 위기 극복은 물론이고, 우리 경제의 장래를 위해서도 금융실명제의 폐기는 하등 득될 것이 없다. 행여 그토록 음습한 돈이 있어야 나라의 경제가 펴진다고 생각한다면, 차기 정권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한참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사설에는 기명(記名) 사설과 무기명 사설이 있다. 기명 사설이 대륙적인 것이라면 무기명 사설은 다분히 영국적인 것이다.
앵글로 색슨 계통의 신문은 사설란에 대해 레이아웃이나 배면(配面)을 달리함으로써 일반 뉴스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이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한다. 뉴스 지면에서는 사실보도 기사를, 오피니언 페이지에서는 의견기사를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영미(英美) 저널리즘에서는 뉴스와 의견을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일종의 전통이며 관행이다. 뉴스를 전달하는 보도기사는 객관적이어야 하고 뉴스를 평가하는 의견기사, 즉 사설이나 칼럼, 평론, 독자투고 등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원칙을 신앙처럼 믿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경우 사실보도 지면과 사설 등 오피니언 페이지를 ‘뚜렷한 형태로 완벽하게 분리’하도록 윤리강령에 규정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신문에도 이런 변화가 일고 있다. 신문마다 오피니언 페이지를 신설하면서 종전에 뉴스 해설 기사 등과 2, 3면에 혼거하던 사설란을 오피니언 페이지로 옮겨 평론 독자투고 등과 함께 싣고 있는 추세다. 보도기사와 의견기사를 구분하려는 영미 저널리즘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유럽 대륙의 신문들은 영국과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무기명 사설 대신에 논설위원이나 기자들이 쓰는 의견 기사가 사설 역할을 한다. 기자가 기사도 쓰고 사설도 쓰는 것이다. 이 경우 사설은 기사와 마찬가지로 기명이다. 보도와 논평을 구분하지 않는 이른바 ‘오피니언 페이퍼’의 전통을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사례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공식적인 사설 칼럼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외국인 동정’란은 외국 수뇌의 프랑스 방문을 환영하는 공식적인 인사말을 게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물론 세계문제에 대한 이 신문의 권위 있는 논평을 싣는 데도 쓰인다. 또한 주필 명의(때로는 필명)의 논평이나 선임 저널리스트들의 기명 기사도 신문사의 견해를 나타내는 공식적인 매개물로 이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코리에레 데라 세라도 르몽드와 비슷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 독일의 디 벨트는 공식적인 사설을 사실상 폐지하고 주로 선임 논설위원의 짧은 기명 논설을 수 편씩 게재하고 있다. 신문사 의견이지만 쓰는 사람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바이라인을 넣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주에서 발행되는 중부매일신문이 유일하게 기명 사설을 게재하고 있다. 1989년 창간된 중부매일신문은 1996년 모든 보도기사를 기명화하면서 사설도 함께 기명화했다. 이 신문의 논설실장 김춘길(金春吉)은 “기명 사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회사의 견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전제하며 “사설을 기명화한 것은 집필자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설이 기명화된 후 사설에 대한 독자들의 조언과 비판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a. 뿌리는 서평(書評)
신문 사설은 다소 기이하고 우발적인 탄생 역사를 갖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신문 사설이 오늘처럼 제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까지는 험난한 우여곡절의 과거가 점철되어 있다. 절대주의 시대의 군주들은 ‘뉴스의 상인’들에게 신문발행을 허가해 준 뒤에도 신문이 사실보도를 넘어서 의견을 덧붙여 특히 국내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평이 처음에 자리를 얻은 것은 다수의 독자를 상대하는 신문이 아니라, 소수의 지식층을 상대로 하는 잡지였다.
물론 잡지에서도 바로 정치문제에 대한 논평이 허용된 것은 아니다. 오직 교양인들의 관심사이며 교양인들의 소산인 서적에 대한 논평만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일단 서적에 대한 논평의 길이 트이자 그것은 모든 논평의 문을 열어 놓은 결과가 되었다. 서평이 사설의 효시가 된 것이다. 정치를 다룬 책도 있고 보면 그러한 책에 대한 서평은 곧 정치에 대한 논평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신문들은 18세기 말까지도 오직 뉴스신문으로 머물러 있었으며 의견을 개진하는 권리란 아무도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18세기 후반에 창간된 더 타임스의 경우 초기 1백년간의 사설은 신문사의 견해를 진지하게 나타낸 주장이 아니었다. 개각 보도나 선거관련 루머를 틈틈이 키워 변화를 준 논평, 즉 정치칼럼이 사설의 역할을 했다. 당시 더 타임스의 정치기사는 의회의 토론 내용을 말 그대로 옮긴 것이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데스크 칼럼, 의회 스케치 같은 것이 논평과 해설 기능을 담당했다.
더 타임스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까지도 매일 5천부를 찍다가 그 후 지면 향상에 힘입어 1851년에는 발행부수가 4만을 돌파했다. 타임스의 성공은 내외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종합적인 뉴스를 제공하고 독자 투고를 존중해주며 여론을 반영한 사설로 대중을 지도한 것에 크게 힘입었다. 타임스는 특히 사설에서 천둥 같은 큰 소리로 정치·사회개혁을 강도 높게 주장해 ‘천둥소리(Thunderer)’라는 별명을 얻고 영국 제1신문의 위상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타임스는 국민 여론을 계도하고 국민 여망을 구현하는 무서운 힘이었다.
언론인을 ‘소명된 호민관’이라고 주장했던 19세기 독일의 요제프 괴뢰스는 1814년 자신이 창간한 라이니셔 메루쿠어의 1면 톱을 언제나 장문의 사설로 시작했으며 때로는 전 지면을 사설로 메우기도 했다. 그는 격렬한 논조로 나폴레옹의 반동을 프랑스 혁명정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공격하고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프러시아의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괴뢰스 시대는 대사설의 시대였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인 19세기 중엽, 뉴욕 트리뷴의 호레이스 그릴리가 붓대를 휘두르던 무렵이 대사설의 시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개화운동의 선각자 서재필(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구한말의 대표적 언론인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된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사설의 시대를 열었다. 그 전통은 그대로 일제 식민지 치하의 민족지와 해방 후 좌우 격돌기의 정론지(政論紙)로 이어졌다. 한국의 대사설 시대는 1960년 4·19혁명을 전후해서 마지막 절정을 경험하고 퇴조했다. 사설이 민중을 상대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투혼을 일깨우던 ‘영웅의 시대’, ‘지사(志士)의 시대’는 가고, 차분한 목소리로 실질을 외치는‘전문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신문사설의 바탕은 아무래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198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글문장의 연원도 그렇고 신문의 비판정신도 그렇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신문사설의 효시인 창간호 논설에서부터 이 두 가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예문3 참조).
[예문3 : 독립신문 창간호 1896년 4월 7일자 논설(오늘날 문체로 바꾼 것임)]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제언하여 주려 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임.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띄어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 데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일 터이요 사사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임. 우리는 조선 대군주 폐하와 조선 정부와 조선 인민을 위하는 사람들인고로 편당 있는 의논이든지 한 쪽만 생각하고 하는 말은 우리 신문상에 없을 터임. 또 한 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 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러한즉 이 신문은 똑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임. 우리가 또 외국 사정도 조선 인민을 위하여 간간이 기록할 터이니 그걸 인연하여 외국은 가지 못하더라도 조선 인민이 외국 사정도 알 터임. 오늘은 처음인고로 대강 우리 주의만 세상에 고하고 우리 신문을 보면 조선 인민의 소견과 지혜가 진보함을 믿노라. 논설 그치기 전에 우리가
대군주 폐하께 송덕하고 만세를 부르나이다. (후략)
국민계몽 정부비판 앞장
구미에서 초기의 사설들은 민중의 계몽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독립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독립신문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입헌군주제의 독립국가와 만민평등사상을 기틀로 국민계몽과 개화운동의 확산 추진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립신문은 백성들이 구습에서 벗어나 개화에 적극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관리들의 부정 부패를 폭로하고 개화에 소극적인 정부를 비판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는 사설란이 특별히 없었다. 그 대신 국민계도를 위해 지구론 같은 해설적인 논문과 외국신문의 번역물을 많이 실었다. 한성순보를 승계한 한성주보(漢城周報 1886년~1888년)는 오늘날의 사설과 성격이 비슷한 ‘사의(私儀)’란을 두어 논설과 주장을 싣고 ‘집록(集錄)’란에서는 해설 등을 실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발행한 ‘관보(官報)신문’인 까닭에 논평과 비판의 기능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신문이 내용 면에서 이전의 한성순보, 한성주보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것은 창간 당시부터 논평과 비판 기능을 크게 강화해 신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독립신문은 창간에서 종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논설을 실어 정부와 위정자들의 비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고발 비판하고 민간인의 잘못도 가차없이 질책했다. 또 이권 침탈에 혈안이 된 열강의 부당한 요구와 음모를 폭로하여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독립신문의 이러한 비판정신과 외세 배격론은 이후 한국 언론의 정신적 전통으로 자리잡아 일제하의 항일 언론투쟁, 광복후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독립신문은 민권사상에 기초해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복(公僕)임을 일깨운 것이다. 수 천년간 봉건적 전제군주 치하에서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에 젖어 있던 국민들로서는 처음 접하는 신선한 주장이었다. 독립신문이 창간 직후의 논설에서 관찰사와 ‘원님’의 직선제, 오늘로 말하면 도지사와 시장, 군수 등 단체장에 대한 직선과 지방자치제 실시를 주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 발상이다(예문4 참조). 민선 입법기관도 구성되지 않은 절대왕정 체제에서 왕의 통치권을 제약하는 직접선거와 지방자치제 실시를 주장한 것은 실현 가능성을 도외시한 공론탁설(空論卓說)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정부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일깨운 계몽용 사설이라고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독립신문의 계몽적 역할은 누구나 읽기 쉽도록 순 한글 신문을 제작하고, 누구나 사 볼 수 있도록 구독료를 싸게 한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한글전용과 띄어쓰기의 실시는 우리나라 문장사에 큰 획을 그은 선구적 용단으로서 독립신문의 자주정신과 실용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직도 외국어를 그냥 활자화하고 어려운 한자용어를 마구 쏟아내고 있는 한국 언론은 1백년 전 상투 튼 할아버지들이 제작한 한글판 독립신문을 되돌아보며 깊이 자성할 일이다.
독립신문은 민족자강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면서도 의병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여 개량주의적 노선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의병을 일종의 반란군이라고 비난하면서 지방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정부와 지배계층을 옹호한 의견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사실 독립신문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는 대황제 폐하, 대군주 폐하, 임금 등의 용어를 쓸 때는 항상 줄을 바꿔서 글의 첫 머리에 올렸다. 다른 단어의 밑에 깔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독립의 초석으로서 황제를 절대시한 필법이라고 하겠다.
독립신문은 처음에는 주 3회 발행하다가 1898년 윤치호(尹致昊)가 운영권을 인수한 후 일간으로 바꾸면서 한때 논설란을 폐지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이 1899년 12월 4일 지령 776호를 마감으로 종간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게재한 사설건수는 총 6백 80편에 달한다. 독립신문의 사설은 대부분 제목 없이 ‘논설’이라는 표제만 달아 게재했다. 따라서 본문을 일일이 읽어 보아야 주제가 무엇이고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예문4 : 독립신문 제4호 1896년 4월 14일자 단체장 직선 촉구 논설(오늘날 문체로 바꾼 것임)]
정치학이라 하는 학문은 문명 개화한 나라에서들 여러 천년을 두고 여러 만명이 자기 평생에 주야로 생각하고 공부하여 만든 학문인데 정부의 관인이 되어가지고 이 학문을 배우지 않아서는 못쓸지라. 이 학문을 안 후에도 본래 심지가 그른 사람은 못된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하물며 이 학문도 없는 이가 정부에 있으면 몰라서 잘못하는 이도 있고 마음이 글러서 잘못하는 이도 있는지라. 정부 속에 학문도 없고 마음도 그른 사람이 많이 있으면 그 해는 백성이 입는 것이요 백성이 해를 입으면 나라에 화가 있을 것이니 그러면 곧 자기 몸에 앙화가 미칠 것이라.
지금 조선서 정치학에 능한 이만 뽑아 정부 중임을 맡길 수가 없는 것이 정치학을 가르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알 사람이 있으리요. 그러면 다만 한 가지만 믿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나 써야 그 사람이 큰 사업은 못하더라도 있는 법률과 규칙을 순종할 터이요 남에게 해는 없이 일을 행할 터이니 정직한 사람이나 골라 쓰기를 바라노라.
사람 고르는 법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니 한 사람이 천하는 사람은 암만 해도 믿기가 어려운 것이 그 천거하는 사람이 천거할 때는 그 사람이 옳기에 천거한 것이려니와 만일 잘못 알았으면 국가에 큰 낭패요 천주에게 불행한 일이니 그런 중한 일을 누가 담당하기를 그리 좋아하리요. 만일 몸조심을 하는 사람은 이런 일하기를 좋아 아니할 듯하더라.
이런 까닭으로 외국서는 관찰사와 원 같은 것과 정부 속에 있는 관원들을 백성을 시켜 뽑게 하니 설령 그 관원들이 잘못하더라도 백성이 임금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자기를 꾸짖고 그런 사람은 다시 투표하여 미관말직도 시키지 아니하니 벌을 정부에서 주기 전에 백성이 그 사람을 망신을 시키니 그 관원이 정부에서 벌 주는 것보다 더 두렵게 여길 터이요 또 청하여 빠질 도리도 없을 터이라.
내각 대신과 협판은 임금이 친히 뽑으시는 것이 마땅하고 외임은 그 도와 그 고을 백성으로 시켜 인망 있는 사람들을 투표하여 그 중에 표 많이 받은 이를 뽑아 관찰사와 군수들을 시켜주면 백성이 정부를 원망함이 없을 것이요 또 그렇게 뽑은 사람들이 서울서 하나나 두 사람의 천거로 시킨 사람보다 일을 낫게 할 터이요 그 사람이 그 도나 그 군에 산 사람인즉 거기 일을 서울서 가는 사람보다 자세히 알 터이요 거기 백성들 까닭에 원이든지 관찰사를 하였으니 그 사람이 그 백성들을 위할 생각이 더 있으리라.
정부의 관인이란 것은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이니 위로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것이라. 나라 규모가 이렇게 되면 임금의 권력이 높아지고 백성의 형세가 편할 터이니 국중에 무슨 변이 있으며 원망과 불평하는 소리가 어찌 있으리요. 우리가 바라건대 정부에 계신 이들은 몸조심도 하고 나라가 되기도 바란다면 관찰사와 군수들을 자기들이 천거 말고 각 지방 인민으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뽑게 하면 국민간에 유익한 일이 있는 것을 불과 일, 이년 동안이면 가히 알리라.
신문에서 1면 다음으로 중요한 지면이 사설란이라고 할 수 있다. 1면이 신문의 얼굴이라고 한다면 사설란은 신문의 심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의 고급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는 사설을 아예 1면에 게재하고 있다. 사설을 그만큼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에서도 50년대와 60년대 초엔 많은 신문들이 사설을 1면에 실었다. 지금도 중요한 문제가 터지면 사설이 1면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하면 1면 사설은 ‘뉴스기사 중시’에 밀려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서울신문이 1~2주에 한번 꼴로 1면에 사설을 내세운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시장은 워싱턴 포스트 사설에서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된 적이 없다고 한다. 60년대 미국에서 월남전 논쟁이 고조됐을 때 린든 존슨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 사설 1건의 영향력을 ‘2개 사단에 해당하는 가치’로 비유한 바 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장군도 1958년 자신을 권좌에 복귀시킨 헌정 위기 때 르몽드의 지원을 높이 평가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신문사설이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설이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더러 나라와 사회를 움직이는 엘리트 계층이 바로 사설의 주 독자층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적을지 몰라도 정부의 정책 수립과 사회의 여론 형성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론이란 애매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음색(音色)이 있다면 그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사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여론 형성은 보통 여섯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첫째, 대중적 분위기(Mass Sentiment)가 있어야 하고 둘째, 이로부터 이슈가 추출되어야 하며 셋째, 이 이슈를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있는 공중(公衆)이 있어야 하고 넷째, 이해 당사자간의 공개토론이 있어야 하며 다섯째, 얼마간의 피드백(Feedback) 기간을 거쳐서 여섯째, 민주사회의 토대가 되는 진정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문제 발생→논쟁 혹은 토의→의견 집중의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어느 단계에서든 신문을 비롯한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여론 형성의 과정이다.
신문 사설이 정책의 방향을 바꾼 사례는 동서고금에 허다하다. 굳이 먼 과거사나 다른 나라의 예를 들출 것 없이, 2002년 월드컵 주 경기장 신축문제를 둘러싸고 김대중 정부 출범 초에 벌어진 해프닝도 좋은 예일 것이다. 발단이 된 것은 경제난 타개를 국정운영의 제1 목표로 삼은 김대중 정부가 4천 5백억 원의 거액이 소요되는 서울 상암 축구장 신축계획을 백지화시키려던 방침이었다. 그러자 신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백지화’에 반대하고 나섰다. 거의 모든 신문이 사설을 통해 “월드컵 개막식은 서울서 열어야 한다”(예문5 참조), “아끼려는 비용보다는 신축시의 생산유발 및 부가가치 고용창출 효과가 더 크다”고 지적하며 구장 신축을 주장했다.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서울신문까지 “서울 구장은 국제적 약속”이라며 정부 비판에 가세했다. 결국 정부는 언론의 반기에 손을 들고 백지화 계획을 철회했다. 당초 계획대로 상암구장을 건설키로 하고 이 문제를 둘러싼 3개월간의 정책 표류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 [예문5]
- 월드컵 개막식은 서울서 열어야
- [문화일보 1998년 4월 9일자]
(전략) 정부는 8일 김종필 총리서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과 월드컵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당초 서울 상암동에 짓기로 했던 주경기장 신축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인천 문학경기장을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 (중략) 문학경기장을 국제축구연맹(FIFA) 기준에 맞게 증축할 경우 추가로 4백억 원만 부담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정부는 이같은 결정이 한국이 처한 경제현실과 국제 신인도 면에서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이 세계적 대축제인 월드컵마저 개최할 능력이 없는 국가로 인식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주경기장 변경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영국의 더 타임스는 “2002년 월드컵대회가 영국에서 벌어질 수 있다”고 보도했고 FIFA부회장인 요한손 유럽축구연맹 회장은 “개최국중 한 곳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즉각 현지조사를 벌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개최지를 변경할 경우 FIFA측과 다시 협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만약 FIFA집행위원회가 “한국은 개최능력이 없으므로 개최국을 바꾸자”고 결의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한국이 2002년 월드컵을 개최키로 한 약속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약속 이상으로 파급 영향이 크고 더 많은 세계인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다.
월드컵대회는 초기에 거액의 공사비가 들기는 하지만 경제성 있는 국제행사다. 생산유발, 고용증대 및 부가가치 효과면에서 대단히 높다는 조사결과도 이미 나왔다. 실업자 구제를 위해 공공사업을 벌여야 한다면 당초 약속대로 서울 개최를 위한 경기장 건설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또 공사비는 외화가 아니라 원화로 가능하다.
공동 개최국인 일본에 뒤떨어지지 않는 대회가 되게끔 긴 안목에서 신중하게 재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대중보다 한발 앞서 간다
대부분의 신문 독자는 복잡한 그날 그날의 사건을 독자적으로 구명할 능력과 시간이 없다. 특히 복잡하고 전문적인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이 혼자 판단하기가 어려운, 복잡한 사태를 만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사설은 그 사태를 보는 관점과 시각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판단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사설이 행동이 되고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를 움직이는 이러한 영향력 때문이다.
사설은 이렇게 ‘뉴스의 홍수’를 교통정리하면서 대중들보다 한발 앞서 간다. 그리고 복잡한 사회 문제를 집약적으로 검토 분석하면서 개선과 개혁의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따라서 사설이 현안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어떻게 하고 여론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느냐에 따라 정책의 향방은 달라질 수가 있다. 사설이 국민의 이해와 대중의 ‘소리 없는 여론’을 올바르게 통찰하고 올바르게 대변해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설은 자신의 의견을 종종 “우리는 …”이라고 표현한다. 사설에서 쓰이는 “우리는 …”이란 직접적으로는 신문사를 의미하면서도 여론을 대변한다는 견지에서 “국민은 …”이라는 뉘앙스가 강한 것이다. 사설이 사회를 지도하고 향도할 책임이 크다는 것은 여론의 대변을 자처하는 이런 오만한 자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설의 생명은 비판에
사설의 생명은 역시 비판에 있다. 미국 최고의 고급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어느 개인을 특별히 찬양하거나 또는 옳다고 추켜 세우는 것을 삼가는 방침을 신문제작 원칙으로 준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논객들 가운데도 “사설이란 어차피 비판 위주의 고발장이지 갈채를 터뜨리는 송덕문(頌德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설은 잘되어가는 일을 고무 찬양함으로써 더욱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는 기능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함으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비판적 기능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비판이란 새 것에 눈뜨게 하거나 당사자들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문제점을 깨우쳐 주는 노력을 의미한다.
사설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은 흔히 “책임 없는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신문사는 “우리더러 당국 역할까지 하란 말이냐”고 볼멘 소리로 대꾸하기가 일쑤다. 물론 사설에 기대할 것은 대안보다는 당사자들이 대안 작성에 참고할 문제점의 소재와 여론 측정이다. 그러나 사설이 건설적인 대안까지 제시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대안은 꼭 구체적인 해법(解法)의 제시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큰 틀의 새로운 방향 제시도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옛날부터 언론계에는 ‘사설 무용론(無用論)’이 있다. 사설이라고 하는 딱딱하고 권위주의적인 ‘멍석’을 깔아놓고 “사치풍조를 추방하자”고 목청을 높인다고 해서 무슨 실효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읽히지 않고 먹히지 않는 ‘공자 말씀’ 보다는 “최근 고급 살롱이나 백화점 외제상품 코너의 고객이 줄었다”고 알려주는 사회부 기자의 보도기사가 과소비 추방과 근검절약의 유도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사설이 필요하냐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사설 무용론’이다.
흔히 보도기사는 객관성이라는 저널리즘의 의식에 얽매어 뉴스 제공에 있어 곧잘 진실과 사실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어느 집단이 “인종차별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치자. 객관성을 중시하는 보도기사는 이들의 주장을 말 그대로 전하는 것, 즉 사실 전달로 임무를 끝낼 수가 있다. 이 경우 ‘인종차별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잘못된 사고가 액면 그대로 독자에게 입력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가치 판단과 도덕적 판단에 기초해 인종차별주의를 분석·평가한 해설기사나 인종주의를 공박한 사설을 독자가 접한다면 사정은 다를 것이다. 의견기사를 보아야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을 파악할 수 있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가질 수가 있다. 1면 뉴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으면 사설을 읽어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은 사설 무용론이 아니라 사설 유용론인 것이다.
탄압받은 과거를 살아 온 한국 언론에서는 한때 ‘사설 맹장론’이라는 것도 회자됐었다. 맹장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고통과 병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쓸모없는 맹장이 병을 유발하듯,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설이 필화(筆禍)를 저질러 신문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는 데서 나온 이야기가 ‘사설 맹장론’이다. 앞의 사설 무용론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스포츠 연예지나 주말신문 같은 대중지 가운데는 이 맹장 같은 사설란을 처음부터 두지 않은 무사설 신문이 많다. 필화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들이 타깃으로 삼고 있는 독자들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설란이 없으면 논설위원이라는 값비싼 고급 인력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이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일 것이다. 외국의 고급지 가운데는 무사설 신문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세계 10대 고급지의 하나로 꼽히는 스위스의 대표적 신문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은 사설을 전담하는 논설위원도, 사설란도 아예 없다. 그 대신 이 신문처럼 진지하게 뉴스를 다루고 철저하게 심층보도를 해주는 신문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강력하고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설, 영향력 있는 사설란을 갖는 것이 권위지의 필수 요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나 더 타임스 같은 고급지는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사설을 자랑한다. 권위지의 사설은 흔히 다른 동업지에 인용 보도되기도 한다. 사설 그 자체가 큰 보도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가 뛰어난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데 대해 이 신문사의 간부들은 “논설의 수준을 높게 유지한 것”을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들고 있다.
언론학자 유재천(劉載天, 한림대 교수)은 “엘리트 신문은 의견을 강조해야 하며, 특히 사설은 용기 있고 권위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엘리트 신문의 요건을 다음 열 가지로 요약하면서 사설의 중요성을 보도기사보다 앞세우고 있다.
엘리트 신문의 요건
1.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확보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2. 정치 경제 국제관계 문화 교육 과학 사회복지 등에 역점을 두고 언론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3.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지성적이며 정확한 표현력을 지닌 기술적으로 숙련된 스탭을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4. 의견을 강조해야 한다. 사설은 용기 있고 권위를 지녀야 한다.
5. 심층보도와 풍부한 해설을 강조해야 한다.
6. 기사작성과 편집에 있어 선정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7. 인쇄가 좋아야 하고 활자의 선정에 신중해야 하며 편집은 품위가 있어야 한다.
8. 기사작성과 편집이 훌륭해야 한다.
9. 취재와 보도에 있어 성실하고 진취적이며 공정하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10. 교육수준이 높고 지성적인 사람들을 대상독자로 삼아야 하며 국내외 여론지도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체성 일깨우는 매개물
신문사에서 사설은 권위지의 요건이라는 사실 외에 또 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사설은 구성원에게 조직의 정체성(正體性)을 일깨워주는 매개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신문사라는 곳은 아주 특이한 조직체다. 그 자체를 세계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곳이다. 구성원들은 정치, 외교, 전쟁, 금융에서부터 음악, 미술, 골프, 퍼즐에 이르기까지 전혀 상이한 분야를 커버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경제적 이해관계는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다. 개성이 강해서 ‘모래알’이나 ‘독불장군’에 비유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구성원에게 조직의 정체성을 일깨워서 동질성과 응집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그 신문의 공식적인 목소리, 즉 사설인 것이다. 만일 사설이 없다면 독자는 자신이 보는 신문의 성격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문사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사설이 없다면 비록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일지라도 그 조직의 생각을 알기가 힘들다. 독자는 물론 조직원에 게 신문사의 견해를 일상적으로 펴보이면서 신문사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사설이다.
제2장사설 어떻게 쓰나
가. 사설의 구조와 형식
a. 사설의 구조
요즘 사설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사설의 주제와 언어가 갈수록 밝고 가벼워지고 있다. 사설의 언어가 일상적인 구어로 바뀌면서 과거의 딱딱한 문어체나 ‘3·1독립선언문’과 같은 웅변조·미문조(美文調)는 사라지고 있다. 사설 제목을 톡톡 튀는 구어체로 달아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노력도 현저하다. 보다 간결하고, 보다 평이하고, 보다 경쾌하고, 보다 생동감 있고, 보다 직소적(直訴的)인 내용과 형식, 그것이 요즘 사설이 추구하는 지배적인 모형이다.
사설의 구조에는 일정한 유형이 따로 없다. 다만 사설에 배정된 지면이 좁고 한정적이어서 집중적인 논증의 전개가 요구될 뿐이다. 또한 주의·주장이 주된 내용을 이루기 때문에 기사작성 때와 같은 역피라미드 형이나 연대기형 서술은 적합치 않다.
일반적으로 사설 작성은 서론→본론→결론의 3단계로 진행된다(예문6 참조). 서론이란 사실을 적시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다시 말해 논평의 출발점이다. 서론에서는 문제 제기를 통해 결론의 일부를 미리 내비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또 주제에 대한 결론을 먼저 세우고 그 다음에 논증을 전개해서 결론에 비추어 보도록 하는 형식도 있고(예문7 참조), 의문의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주어가며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먼저 반대론을 세운 뒤 이를 반박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도 있다(예문8 참조).
서론은 간결할수록 좋으며 자연스럽게 본문의 내용과 연결되어야 한다. 서론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거나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부적 사실을 첫 문장에 많이 넣으면 독자들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또 과장된 표현은 독자를 오도하고 논설의 신뢰성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문장론에서는 서론이 전체에서 차지해야 할 비중을 “15%가 표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론이 너무 길면 독자는 금방 싫증을 느껴 언제 신문을 내동댕이칠지 모른다.
본론은 단정과 증명의 두 가지 과정으로 구성된다. 단정이란 서론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논설자 또는 신문사의 입장을 말한다. 이것은 반드시 긍정(A는 B이다)과 부정(A는 B가 아니다)의 형식을 취한다. 증명이란 그 단정에 대한 논리적 풀이다. 보통 연역법과 귀납법의 두 가지 방법을 취한다.
결론에서는 본론에 근거한 대안이나 주장을 제시한다. 결론은 논리적으로 전체적 통일성을 흐리지 않아야 하며, 간명할수록 효과적이다.
[예문6 : 서론→본론→결론형 사설]
3·15 부정선거는 시정되어야 한다
[동아일보 1960년 3월 18일자]
3·15 정부통령 선거는 마침내 끝났다. 전국 개표구에서의 소위 ‘개표’결과는 중앙에 보고, 집계되고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자의 ‘득표’수는 9백 몇십만이다 8백 기십만이다 하고 발표되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인류사회의 문명과 국가 민족의 현재와 장래를 위하여 인간의 지성 및 양심으로 이번 선거의 부정 위법성을 지적하고, 동 선거는 반드시 취소되고 공정한 재선거가 시행되어야 한다 함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민권유린 민주찬탈의 부정선거에 대하여 민주당은 원내외에서 정치적 및 법률적 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하기로 하되 전자의 한 방법으로서 ‘부정선거 규탄대회’ 같은 것을 열고 후자의 방법으로서 ‘선거소송’을 대법원에 제기할 것이라고 전하거니와 이 모두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법치 민주사회에서는 국법을 무시하고 현행법을 위배한 법 행위가 순시(瞬時)라도 용인될 수 없으며, 국민의 여론을 등지고 민의를 위반한 정치행위가 잠시라도 묵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정부와 여당은 국민 앞에 사과함과 동시에 이번 선거를 자진 취소해야 할 것이요, 불연(不然)이면 대법원의 취소판결이 있을 뿐이다.
[예문7 : 결론→본론→결론형 사설]
결론→본론→결론 형식의 사설에서는 서론적 진술을 생략하고 주제에 대한 결론을 단도직입적으로 글 첫머리에 내놓는다. 정공법(正攻法)을 쓰는 것이다. 결론적 주장이 새롭거나 중요할 때, 결론적 주장을 많은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을 때, 또는 주제 자체는 중요하나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독자들이 식상해 있을 때 이 구조는 효과적이다.
하버드대 ‘수석졸업’ 소동
[경향신문 1993년 10월 22일자]
한 유명 연예인의 아들이 하버드대를 ‘수석’ 졸업했대서 온통 법석을 떨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후진적 모습과 가치관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 씁쓸한 해프닝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흥미 위주의 과장보도 습관에 젖어 있는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자 교육성과를 오직 석차로만 평가하려는 평면적 교육관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사건이기도 했다.
우선 이러한 해프닝의 1차적 책임은 사실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언론에 있다. 미국의 명문대인 하버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는 데다, 당사자는 누구라고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유명 연예인의 아들이라는 점 등 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요건을 골고루 갖춘 뉴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당 대학에 한번쯤 확인만 했더라도 그토록 요란한 소동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경쟁적으로 흥미 위주의 보도를 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어느 누구도 사실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은 지난번 서해 훼리호 선장 실종소동과 함께 우리 언론이 크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두번째는 학습성과를 오로지 등수로 매겨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의 획일적 교육관에도 책임이 있다. 하버드대학은 졸업성적에 석차를 매기지 않고 상위 5%는 최우수 졸업생(숨머 쿰 라우드), 그 다음 15% 정도는 우수 졸업생(마그나 쿰 라우드) 식으로 등급별 성적을 낸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수 졸업논문에 주는 토머스 홉스상(賞) 명단에 들어있다는 것이 ‘수석 졸업’으로 둔갑되어 그토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이다. 나라 안팎에서 오죽 요란하게 ‘수석 졸업’을 떠들었으면 하버드대학의 해당 학과에선 공식성명까지 내어가면서 소명을 했겠는가.
결과적으로 ‘사실’보다 ‘흥미’를 더 선호하는 센세이셔널리즘 언론과 교육의 성과를 오로지 석차로 평가하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하버드대 수석졸업’과 같은 어이없는 소동을 빚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가슴 한쪽에 남아있는 식민지적 변방의식의 편린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전공과목과는 상관없이 미국이나 일본의 모모(某某)한 유명 대학이라면 무조건 우러러보고 과대평가하는 우리의 문화적 콤플렉스가 이번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하버드대 수석졸업 소동’은 그래서 뒷맛이 더욱 씁쓰레한 것이다.
어느 대학을 몇 등으로 졸업했느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 어떤 인간형으로 성숙했느냐가 교육의 척도가 될 때 그 사회의 가치관은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 것이다.
[예문8 : 반대론을 앞세운 사설]
반대론을 앞세우는 사설의 경우 반대론 소개→반대론 반박→자기 주장의 순으로 전개된다. 서론→본론→결론의 구조와 전개가 같으나 담는 내용이 다른 셈이다. 보통은 반대론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자기 주장을 암시한다. 이런 구조는 자신과 반대되는 주장이 사회 일각에 팽배하고 그 허구성이 분명할 때 효과적이다.
누구를 위한 내각제인가
[서울신문 1997년 10월 29일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DJP연합, 즉 두 당의 후보 단일화 협상에 매듭을 짓고 공동집권과 내각제 개헌을 골자로 한 합의사항을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보도된 합의문에 따르면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가 두 당의 연합 대통령 후보가 되고 집권할 경우 김종필(JP) 자민련 총재가 총리를 맡으며 각료는 50 대 50으로 균분토록 돼 있다. 또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고 내각제하의 첫 대통령과 총리에 대한 선택권은 자민련측이 갖는 것으로 돼 있다. 결론부터 말해 두 야당이 정권교체와 내각제를 구실로 권력 나눠먹기 담합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는 처사에 아연할 따름이다.
이 합의문대로라면 이번 15대 대선은 헌법에 보장된 임기 5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내각제 개헌을 위한 과도정부를 이끌 임기 2년여의 임시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된다. 이렇게 헌법을 왜곡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소수당 멋대로 결정하여 박두한 대선의 성격을 변질시켜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DJ 대통령’ 다음에 사실상 ‘JP 총리’시대를 설정한 합의도 새로운 리더십을 바라는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고 낡은 3김 정치의 연장을 노린 신판 ‘권력세습’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략)
물론 대통령제니 내각제니 하는 권력구조 개편문제가 불가촉의 성역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쯤 되는 국가대사라면 국가와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비전으로서 거론하고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예컨대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민족통일을 추구하는 데 있어 대통령중심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권력구조 개편을 언급한다면 누가 나무라겠는가. 그런 차원이 아니고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써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우선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개헌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다. 국민적 컨센서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내각제 개헌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국민이 대통령제보다도 내각제를 더 선호한다는 어떠한 명백한 증거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국민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력 결집이나 정치부패 추방에 오히려 내각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는 형편이다. 내각제 추진은 불과 1년반 전 대통령중심제 표방 정당들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4·11총선의 민의에도 반하는 것이다.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내각제 개헌음모를 저지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던 일을 국민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치권의 현 판세를 놓고 본다면 DJP가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에 직면할 전망이다. 대선후 또 한차례 정계개편이 이루어져도 두 야당이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DJ 대통령’이 내각제 실현을 위해 과연 도중하차의 약속을 지킬지도 의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민적 컨센서스조차 없는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국론분열과 정치혼란만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들의 이성적 판단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면 이제 남은 건 12월 대선에서의 국민의 현명한 심판뿐이다.
b. 연재사설과 다장사설
사설에는 같은 주제를 연재소설처럼 며칠 계속해서 다루는 ‘연재사설’도 있고 한 사설을 여러 장으로 나눈 ‘다장(多章)사설’도 있다. 연재사설은 진행중인 중요한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시함으로써 그 문제의 바람직한 결과를 유도하자는 것이라면 다장사설은 신년이나 신문창간 기념일 같은 때 많이 볼 수 있는 장문의 단발성 ‘통사설'을 일컫는 것이다. 연재사설이나 다장사설은 좁은 지면을 의식할 필요가 없이 논리를 충분히 전개함으로써 보다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반면에 긴 글에 대한 부담감으로 열독률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중앙일보는 대선이나 총선 때면 캠페인 차원에서 공명선거를 주제로 연재사설을 게재한다. 97년 말 외환위기로 빚어진 IMF사태 때는 “무너진 경제를 살리자”는 주제의 연재사설을 20여일 동안 게재해 주목을 끈 바 있다. 11월 24일자 ‘위기극복은 모두의 몫이다’로 시작한 이 연재사설은 ‘IMF와 협상은 투명하게’, ‘대선후보부터 바뀌어야’, ‘김대통령의 실명제 집착’, ‘이제 허리 조르고 다시 뛰자’, ‘관치금융 벗어날 기회 삼자’, ‘IMF합의 분노 좌절 말자’, ‘수출 늘리고 외화 아끼자’, ‘말보다 행동이 급한 열흘’, ‘기업 자구노력 더 과감하게’, ‘금융안정 응급책 계속돼야’, ‘긴급외화 확보에 나서라’, ‘대외신뢰를 회복하는 길’, ‘미흡한 금융산업 구조개편’의 순으로 진행되다가 12월 18일자 ‘아직 낙관할 상황 아니다’로 끝을 맺었다.
연재사설이나 다장사설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신문은 매일 매일의 소모품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의 바쁜 생활상을 반영하는 변화다.
c. 사설의 제목과 길이
사설은 엄밀히 말해 제목과 본문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사설의 제목은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서 그 내용을 읽고 싶도록 충동하는 것이 제목이다. 광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see로 눈길을 끌고 look으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이다. 제목은 독자의 흥미를 끌어 모으는 나팔수인 셈이다. 신문사에서 사설 제목을 결정하는 권한과 책임은 대체로 주필에 속한다.
사설 제목은 주제를 그대로 붙이거나 본문 내용을 압축하여 붙이는 것이 상례다. 또한 부제를 달아 큰 제목의 표현을 보완하고 주장하고자 하는 논리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제목은 그래서 논지의 방향을 예고한다. 제목만 보고서도 그 사설이 내세우고자 하는 주장이 무엇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서는 제목만 훑어보고 지금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어떤 것이 여론의 대세인가를 파악하려고 드는 독자들이 많다. 때문에 제목은 정확하고 명료하고 간결해야 한다.
제목은 10~11자로
사설 제목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도록 작성하되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구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품위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문어로 작성한 제목은 대체로 딱딱한 느낌을 주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또 사설의 제목은 ‘시적(詩的)’인 것까지는 좋으나 ‘선동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사설은 독자의 이성에 호소해야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우리나라 뉴스기사의 제목은 대체로 큰 제목의 자수가 13자 내외, 작은 제목은 18자 내외다. 사설은 좁은 지면을 생각할 때 뉴스 제목보다는 2~3자 적게, 즉 큰 제목은 10~11자, 작은 제목은 15자 내외로 축약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보다 더 짧게 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신문의 사설 길이는 각양각색이다. 미국의 경우 긴 것, 짧은 것이 있는가 하면 아주 짧은 것, 아주 긴 것이 있고, 길고 짧은 것이 매일 모양새가 다른 것도 있다. 또 하루 1편의 사설 게재로 자족하는 신문이 있는가 하면 매일 3~4편의 사설을 펼치는 신문도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신문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거의 모든 신문이 일률적으로 하루 2편의 사설을 싣고 있으며 사설의 레이아웃과 게재 지면도 비슷하다(표2 참조).
[표2] 주요 신문의 사설관련 비교표
1998년 8월 15일 현재
구분
사설 게재면
게재건수
매수(1건)
경향신문
4
2
6.3
국민일보
5
2
6.0
동아일보
5
2
6.2
문화일보
6
2
5.5
서울신문
7
2
6.0
세계일보
7
2
6.0
조선일보
5
2
6.0
중앙일보
6
2
6.0
한겨레신문
3
2
6.0
한국일보
3
3~2
4.5~6.5
하루 2편의 사설을 실을 경우 1편의 길이는 2백자 원고지로 5.5~6.5매 정도다. 사설 1편이 장장 15매에 달하던 과거에 비하면 훨씬 짧아진 것이다. 단문(短文)의 사설이라고 해서 장문의 그것보다 결코 영향력이나 설득력이 적은 것은 아니다. 군더더기를 쳐낸 요점 위주의 단문이 오히려 바쁜 독자를 붙잡는 데 효과적일 수가 있다.
1998년 상반기까지 하루 3편의 사설을 싣던 중앙일보의 경우 사설의 길이가 평균 9백 50자였다. 보통 첫번째 사설은 무게를 둔다는 의미에서 길이를 조금 늘려 1천자 정도로 하고 나머지 2편은 각기 9백 30~9백 40자 정도로 했다. 또 1천자 쓰던 것을 1천 2백자 정도로 늘리고 다른 것들을 7~8백자 정도로 줄여 변화를 주기도 했다. 최고로 5백 50자까지 줄인 적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어떤 주장을 펴기는 어렵고 계절적인 것과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중앙일보 주필 성병욱(成炳旭)의 설명이다. 사설 게재를 하루 2편으로 줄인 후부터는 편당 길이가 200자 원고지 6매 정도로 조정됐지만 강조할 것이 있을 때는 첫 사설을 9.5매 정도로 하고 나머지 하나는 5매 정도로 줄인다.
나. 신문사의 사설 결정과정
a. 사설은 합작품
사설의 집필은 각 분야에서 식견과 전문성이 높은 사내외 인사를 망라해 구성하는 논설위원회가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주필이나 논설주간을 정점으로 한 논설위원 사이의 토론과 합의로 사설의 주제와 논지(論旨)를 결정한 다음 논설위원 중 한명이 무기명으로 대표 집필하는 것이 상례다. 논설위원의 가장 큰 직무는 논설회의에서 집약된 신문사의 대표적 의견을 사설로 만들어 보도하는 데 있다.
논설회의
논설위원 회의는 많은 신문사의 경우 오전 오후에 각기 한차례씩, 하루에 두 번 연다. 다만 조간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석간인 국민일보는 논설회의를 하루에 한차례 연다. 대체로 석간은 오전회의에서, 조간은 오후회의에서 당일 제작하는 신문에 게재할 사설의 주제와 논지, 그리고 집필자를 최종 결정한다.
조간인 경향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의 오전 논설회의는 자유발제,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큰 이슈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문제를 중심으로 의견 개진과 토론이 이루어진다. 평상의 경우 논설위원은 자신의 담당 분야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자연히 그날 아침 신문의 머리를 장식한 국내 뉴스와 외신들이 화두를 장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주제가 1~2개 또는 2~3개로 압축되고 해당 논설위원은 상사의 별도 지시가 없어도 집필을 준비하게 된다.
서울신문과 세계일보의 경우 논설위원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논설의 주제와 논지를 먼저 구두로 설명한 뒤 이를 문안으로 정리한 발제서를 주필에게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 주제 및 논지의 보완점을 중심으로 토의가 진행되며 주필이 2~3편의 사설 주제를 선정해 사장이 주재하는 제작회의로 넘겨 최종 결정을 받는다.
오후 논설회의에서는 석간 신문의 기사가 주요 검토 대상이 된다. 그러나 간과했던 점이나 돌발사안이 드러나지 않는 한 대체로 오전 회의에서 가닥을 잡은 대로 사설 주제를 확정한다. 새로운 주제나 새로운 시각이 제시될 경우 물론 추가로 반영된다. 또 집필을 자임한 논설위원의 시각이 편향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주필이나 동료위원이 “서로 돌아가면서 쓰자”고 제동을 걸기도 한다.
한겨레신문은 이 오후회의를 조간신문 첫판이 나온 뒤, 그러니까 저녁 6시반께 갖고 신문에 나온 사설을 검토하면서 다음날 쓸 사설의 주제와 논지에 관해 잠시 토론한다. 이 토론 결과는 편집국의 신문제작 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 한차례뿐인 논설회의를 동아일보는 오전 10시 30분에, 조선일보는 오후 2시에 각기 열어 약 1시간 가량 진행한다. 동아일보 회의에는 편집국에서 부국장 1명이 참석해 그날의 주요 뉴스와 지면제작 계획에 관해 설명하며, 오전회의가 끝난 뒤 돌발 사안이 생겼을 경우 오후회의를 따로 열기보다는 논설주간이 사설 채택 여부와 집필자를 단독 결정해서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동아 조선의 논설회의는 80년 전통의 두 신문이 풍기는 보수적 권위주의적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주필과 주간이 토론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면서 논지를 정리해 나가는 조선일보 논설회의는 격의 없는 토론의 장으로 소문나 있다. 석간인 국민일보의 논설회의는 빠른 마감시간 때문에 새벽 6시 45분에 열려 20~40분 정도 진행된다.
왜 합작품인가
사설은 기본적으로 ‘합작품’이다. 비록 논설위원 한 명에 의해 전적으로 쓰여지고, 또 거기에 아무런 수정이 가해지지 않은 경우라도 ‘합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주제나 논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거쳤으며, 회의에서 이루어진 여러 사람의 토의 결과와 합의를 바탕으로 대표 집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설회의는 사설의 주제만 정하고 내용과 구성은 주필이 집필자에게 일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집필자로 지명된 위원은 창작과 다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 경우 역시 ‘합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집필자는 이미 대외적으로 공표되고 자신에게는 ‘체질화’된 그 신문사의 사시와 노선에 따라 자신의 견해가 아닌, 신문사의 주장을 논리화해서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문제에서 사시를 어떻게 해석 적용하느냐는 그 신문이 쌓아 온 역사와 전통, 조직 문화, 그리고 지향하는 이념과 목표 등에 기초한 ‘불문율’에 의존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경우에 대해 논설주간 류근일(柳根一)은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에 말이 필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일보처럼 근 백년의 전통을 가진 조직에서는 각종 직책을 거치는 동안 검증되고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있는 사람만이 논설위원이 되기 때문에 새내기 회사들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b. 발행인의 마당이지만
미국에선 대통령 선거 때 신문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하는 경우가 많다.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그때 “지지후보를 누가 결정하느냐”는 질문에 “사주가 결정한다”는 응답이 42%로 가장 많았다. 이어 논설회의 38%, 편집인 20% 순이었다.
신문사설에 대한 사주나 발행인의 영향력은 선거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절대적이다. 사주나 발행인은 언제 어디에서건 사설의 주제와 논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사설과 발행인과의 관계를 한국일보 창업주인 장기영(張基榮)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50년대부터 60년대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최정호(崔禎鎬, 연세대 교수)는 저서 「언론문화와 대중문화」에서 한국일보와 당시 발행인 장사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50년대의 한국일보는 문자 그대로의 발행인의 신문이었다. 신문의 제호·사시·인사·취재·편집·활자·인쇄·발송·판매·광고의 모든 분야에서 장사장이 관여하지 않은, 그래서 발행인의 컨트롤을 벗어나는 구석은 한군데도 없었다.
특히 한국일보의 사설은 장사장이 국내에 계실 때나 외국에 계실 때나 또는 신문사에 계실 때나 정부에 계실 때나 단 하루도 장사장의 컨트롤에서 벗어난 일은 없었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1년을 하루같이 사장실에서 혹은 공무국의 문선부 책상에서 장사장은 사설의 교정지를 한자 한자 읽고 고치고 제목을 다시 매기곤 하였다.
동경 출장시엔 그 비싼 국제전화를 한 시간 두 시간씩 터놓고 호텔에서 사설을 듣고 고치고 했다는 일은 유명한 얘기다. ‘장기자’란 애칭으로 통하던 장사장을 사내에선 또한 ‘사설기자’라고 일컫게 된 까닭이다.…
당시의 장사장은 비단 사설의 내용만이 아니라 사설의 체제·사설의 레이아웃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읽히지 않는 사설을 읽히도록 체제·형식을 ‘이노베이트’하려는 장사장 앞에선 모든 터부가 깨져 갔다. 사설기자 장사장의 ‘대사설의 시대’에 또는 그 시대부터
사설 제목은 한 줄에서 두 줄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개의 부제를 붙여 세 줄로 늘어났다.
1일 1, 2건의 사설이 1일 3건, 1일 4건으로 양적인 팽창을 하기도 했다.
사설에 문장의 단락마다 여러 개의 중간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1면(당시는 사설을 1면에 실었음)에 지면이 부족할 때엔 ‘2면으로 계속’표시와 함께 사설을 1, 2면에 걸쳐 싣기도 했다.
사설을 1면 톱기사 자리로 옮겨가서 뉴스(보도)가 아니라 논설로 신문의 왕좌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설의 제목에 명사구보다 동사구를 많이 써서 생동감·긴박감을 주고 소구력(訴求力)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제목 활자를 크게 키움으로써 가시적으로 그에 이바지했다.
아이크 방한 때엔 국문 일간지에 영문 사설을 실었다.”한국일보에서 장기영 시대가 끝나자 발행인의 간섭도 사라져 사설은 사실상 주필 책임 아래 제작되고 있다. 수년 전부터는 발행인과 주필, 편집국장이 오후 3시에 티 타임을 갖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나 논설위원실이 결정해 올린 사설을 발행인이 뒤집은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에서 서울신문 사장직을 3년간 역임한 손주환(孫柱煥)은 1주일에 한 차례, 즉 매주 화요일 오전에 논설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사설의 주제를 선정하고 집필자를 지명했다. 매주 수요일자에 1편씩 나가는 논설위원 칼럼의 주제와 집필자도 화요일 논설회의에서 발제가 된 내용을 중심으로 손사장이 직접 결정했다.
석간인 문화일보는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2시반 두 차례에 걸쳐 논설회의를 갖는다. 오전 회의에선 당일 사설의 주제와 집필자를 선정하고 오후 회의에선 그날의 시사문제를 리뷰하면서 다음날 사설의 소재에 관해 의견교환을 한다. 그러나 사설의 주제와 집필자에 대한 최종 결정은 오전 논설회의 직전에 갖는 발행인과 논설주간만의 단독 면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에선 논지 전개와 관련한 발행인의 의견도 전달된다고 한다. 때문에 오전 논설회의는 열띤 토론이 진행되기보다 발행인의 결정사항과 지침을 통보하는 자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공익성에 바탕해야
사설은 신문사가 내는 목소리지, 집필자인 논설위원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다. 협의로 말하면 사설란은 사주(社主)와 발행인의‘마당’이라고 볼 수 있다. 신문사 내의 많은 의견 가운데서도 사주나 발행인측의 견해·방침·주장 등을 내보이는 고정난이 사설이기 때문이다. 대개 신문사에서는 사설에 관한 전권을 주필에게 위임한다. 하지만 조직체계상 논설위원회가 발행인의 직속기관으로 되어 있어 사설의 논지는 발행인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사설은 어디까지나 ‘사회 공기로서의 신문사의 의견’인 만큼 설혹 사주나 발행인의 입장을 대변하더라도 공익성이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 때문에 사설은 발행인이나 집필자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와 감정이 개입된 ‘사설(私說)’로서 행세하거나 영향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사설이 걸어야 할 정도가 어떤 것인지는 한국언론의 실천 규범인 ‘신문윤리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가 정보화사회의 출현 등 시대 변화에 맞춰 지난 96년 새로 제정해 준칙으로 삼은 ‘신문윤리강령’은 사설에 대해 “진실을 근거로 의견을 공정하고 바르게 표명하여… 건전한 여론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언론사의 상업적 이익이나 특정 단체와 종파의 이익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참고 : 신문윤리강령
제9조 평론의 원칙평론은 진실을 근거로 의견을 공정하고 바르게 표명하되 균형과 절제를 잃지 말아야 하며 특히 고의적 편파와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평론은 정치적 입장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으며 논쟁적 문제에 대해 다양한 공중의 의견을 폭 넓게 수용하여 건전한 여론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1.(논설의 정론성) 사설은 소속 언론사의 정론적 입장을 대변해야 하며 특히 언론사의 상업적 이익이나 특정 단체와 종파의 이권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
2.(정치적 평론의 자유) 사설 등 평론은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특정 정당 또는 특정 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를 표명하는 등 언론사의 정치적 입장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3.(반론의 기회) 사설 등 평론이 개인 또는 단체를 비판하는 경우 비판받은 당사자의 적절한 해명과 반론의 기회를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c. 논설위원은 대필자인가
사설이 합작품이고, 사설에 미치는 발행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해서 논설위원을 대서사(代書士)와 같은 단순한 대필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영향력 있는 논객일수록 더욱 그렇다. 논설위원은 회사의 고위 간부로서 대내외적으로 회사의 명예와 긍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논설위원으로 발탁될 정도면 개인적으로 상당한 식견과 필력을 지닌 사람이다. 사설은 논설위원 개인의 그런 대표성과 경륜을 사시에 접목시켜 생산하는 것이다.
논설위원이 단순히 상명(上命)의 대필자가 아니라는 것은 사설의 집필을 담당한 경위를 살펴 보아도 헤아릴 수 있다. 대체로 사설 집필자는 논설회의에서 그 사설을 다루자고 발제를 한 사람 가운데서 선정되는 것이 상례다. 아무 논설위원으로부터 발제가 없었는데도 사설 주제로 결정됐을 경우 집필자는 그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위원 가운데서 선정된다. 그러나 특정한 주제에 관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논설위원에게 사설의 집필을 권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사설은 무엇보다도 해당 주제와 논지에 대한 집필자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을 전제로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설의 집필을 대필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사설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본 주장에 관한 것은 주필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논지 전개와 논증의 진실성 여부는 어디까지나 논설위원의 책임에 속한다.
논설위원실에서는 종종 논설위원이 집필한 사설 초고에 주필이 지나치게 손을 댔다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사설은 ‘합작’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피차 너그럽게 생각할 문제다. 논설위원은 논조가 주필의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주필은 논설위원의 창의를 존중해야 할 것이다.
논설위원은 요리사?
논설위원은 요리사 같아야 된다고 한다. 일류 요리사는 재료를 탓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척척 만들어 내듯이 논설위원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건 1~2시간 내에 척척 글을 써내야 한다는 의미다. 유능한 논설위원이 되려면 넓게 많이 알고, 빨리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전문화시대에는 다소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분화된 분야마다 담당 논설위원을 따로 둘 수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논설위원마다 주전공 외에 여러 개의 부전공을 갖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많은 신문사에서 국내정치 담당 논설위원은 정부, 국회, 여당, 야당을 비롯하여 선거, 지방행정, 남북관계에 안보까지 커버해야 한다. 사회 담당의 경우 일상적인 사건 사고뿐만 아니라 교육, 사법, 환경, 교통, 노동, 복지 등 이질적인 여러 분야를 동시에 다루고, 문화 담당은 그 깊이가 엄청난 학문, 예술, 출판, 과학기술의 세계를 헤집고 다녀야 한다. 어느 분야건 논설위원 1~2명이 담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이 있는 사설, 감명주는 사설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자면 논설위원실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전문화시대에 걸맞게 논설위원 숫자를 크게 늘리고 그들의 근무 여건을 개선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신문기업이 영세하고 특히 IMF사태로 언론계가 사상 최악의 경영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사설의 질과 권위를 높이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방법은 하나, ‘충실한 논설회의’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을 듯싶다. 논설회의의 진지한 토의를 통해 논설위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논설위원 모두가 공유하는 방법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일 것이다.
논설위원 실태
논설위원의 수는 신문사마다 다르나 1개 신문사에 보통 10명 안팎이다(표3 참조). IMF사태 이전에는 대부분이 10명 또는 그 이상이었으나 IMF사태로 구조조정을 겪은 후에는 10명 이하로 줄인 신문사가 많다. 1998년 여름 현재 중앙 일간지에서 논설위원이 제일 많은 곳은 중앙일보의 12명(객원 포함)이고, 다음이 동아일보, 서울신문의 11명이다. 가장 적은 건 국민일보, 문화일보, 세계일보의 7명이다. 이 가운데는 주로 단평이나 칼럼을 전담하는 인원도 포함돼 있어 실제 사설 필진은 ‘외형’보다 적은 편이다. 대부분의 신문이 하루에 사설 2편, 단평 1편을 내보내고 있으므로 논설위원 1명이 1주 평균 2~3편의 사설(단평 포함)을 쓰는 셈이다.
한겨레신문은 비상임 논설위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창간 때부터의 전통이다. 창간 10돌을 맞은 1998년 여름에도 논설위원 11명 가운데 5명이 비상임이다. 이들은 주 1회 논설회의에 참석하며, 그날 상임 위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회사 분위기와 돌아가는 정세를 익힌다. 평소에 비상임위원의 기여가 필요할 경우 전화로 연락을 취해 출근시키거나 팩스로 원고를 받아 처리한다.
우리나라 논설위원의 연령층은 거의가 4, 50대로서, 사실상 30대도 60대도 없는 중년 일변도의 단층구조다. 30대는 논설위원이 되기엔 아직 젊다는 이유로 기용이 안되고, 60대는 이미 정년퇴직으로 물러난 때문에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여성 논설위원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근년에 여성의 언론계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아주 대조적이다. 언론계에서 여성의 위상은 아직도 남성 중심의 높은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 일간지의 여성 논설위원은 서울신문 2명, 한겨레신문 1명, 한국일보 1명 등 고작 4명이다. 전체 논설위원 90여명 중 5%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숫자다. 그런 가운데 한국일보가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쌓아 온 장명수(張明秀)를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여성 주필로 등장시킨 것은 특기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설이 남성 중심의 편벽된 가치관을 벗어나 가치중립의 다양성에 눈을 돌리자면 여성 논설위원부터 강화해야 할 것이다.
[표3] 주요 신문사 논설위원 비교
1998년 8월 15일 현재
구분
주필
주간
실장
수석
위원
비상임(객원)
논설고문
계(여성)
경향신문
1
1
6
(1)
8
국민일보
1
6
7
동아일보
1
1
9
11
문화일보
1
1
5
7
서울신문
1
1
8
1
11(2)
세계일보
1
1
4
1
7
조선일보
1
1
1
5
1
(2)
9
중앙일보
1
1
1
8
1
1
12
한겨레신문
1
1
4
5
11(1)
한국일보
1
1
1
5
(1)
8(1)
*경향신문, 조선일보, 한국일보 논설고문은 기명 칼럼만을 담당하고 사설은 집필하지 않고있기 때문에 논설위원 수에 포함시키지 않았음. 서울신문, 세계일보, 중앙일보 논설고문은 그렇지 않아 포함시킴.
논설위원의 충원
논설위원은 대개 사내의 편집국 간부 출신에서 발탁 기용하는 상임위원과 사외 전문가에서 위촉한 소수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과거엔 사외 전문가를 상임 논설위원으로 기용한 경우도 있었으나 근자에는 그런 사례를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렵다. 특히 IMF사태로 언론계에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친 후에는 ‘상임 논설위원=사내 출신’이라는 폐쇄적인 등식이 아주 굳어진 느낌이다. 한국 언론의 이런 외부로부터의 수혈 중단은 앞으로 ‘전문성·다양성 결여’라는 심각한 불씨를 낳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한때는 많은 신문사들이 대학교수를 초빙하여 논설위원을 겸직시킨 바 있으나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겸직이 신문사가 요구하는 속보경쟁에 부응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아카데미즘의 생리와 저널리즘의 속성과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 때문이다.
요즘 언론계에서는 편집국과 논설위원실 사이의 ‘수평 이동’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논설위원은 경륜이 있고 나이도 지긋해야 한다고 믿던 과거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다. 편집국의 부·차장급, 심지어는 평기자가 논설위원으로 도약하는가 하면 논설위원이 편집국의 부·차장급으로 내려가기도 한다. 젊은 기자 출신의 논설위원 기용은 70년대 말부터 시도된 것으로서 이들의 일선 실무경험을 살려 사설을 생동감 있게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d. 뉴욕 타임스는 …
1979년 이래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온 칼 메이어는 뉴욕 타임스 사설란을 “균형과 컨센서스를 구하고 문명적인 대화를 나누는 대광장”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설란을 담당하는 12인 논설위원회는 결코 민주적 체제가 아니다. 논설위원회는 발행인에게 보고해야 하며 주필과 논설위원을 임명하는 권한은 발행인에게 속해 있다. 주필과 논설위원에 대한 평가도 발행인이 한다.
뉴욕 타임스에서 사설의 주제를 무엇으로 하고 논지는 어떻게 전개시킬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논설위원회의 토론을 통해서 ‘집합적’으로 이루어진다. 논설위원들은 1주일에 3차례, 즉 이틀에 한번씩 10층 회의실에 모여 사설의 주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집필을 분담한다. 일은 주필이 할당하는데 자신도 일부 사설의 집필을 떠맡는다. 논설위원이 써낸 사설을 고치거나 손질하는 것도 주필 몫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발행인이 직접 사설을 써 내는 경우도 있다. 그 때도 주필은 다른 사설과 마찬가지로 데스크를 본다.
1991년 어느 가을 아침, 사무실에 나온 뉴욕 타임스 발행인 펀치 설즈버거는 흥분된 상태였다. 그는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밤새 버린 쓰레기가 거리에 철철 넘치도록 쌓여 있는 광경을 보고 몹시 불쾌했던 것이다. 그는 컴퓨터를 두들기며 사설을 써 내려갔다. 글은 ‘타임스 스퀘어가 밤새 토했다…’로 시작했다. 그러나 잭 로젠탈 주필은 발행인이 공들여 쓴 이 사설이 편집 스크린에 뜨기도 전에 첫 문장부터 고쳤다. ‘타임스 스퀘어가 밤새 엉망으로 더럽혀졌다’고.
사설에 대해 로젠탈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보면 사설이란 관점을 갖고 회고하는 어제의 뉴스다. 그러나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무익하게 복창할 필요는 없다. 정보를 가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논설위원회가 매사를 ‘재(再)보도’하기를 바란다. 편집국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기자들은 종종 마감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나머지 오보를 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전문가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을 보도하게 하려는 것이다.”
에드윈 다이어몬드가 쓴 ‘Behind the Times’에 의하면 과거 뉴욕 타임스의 논설위원은 60대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근자에 사설과 오피니언 페이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논설위원실의 구성도 크게 달라졌다. 1991년의 경우 논설위원 12명 가운데 4.5~5.5명이 여자고, 2명이 흑인이다. 연령은 32세에서 72세까지 폭넓게 분포돼 있다. 논설위원의 약 절반은 저널리스트 출신이고, 나머지는 학자 출신이다. 학자 출신은 전문성이 평가돼 기용된 것이다. 논설위원회의 다양한 인적 구성은 결국 사설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과거 논설위원실의 중년 백인층은 전통적으로 한 곳에서 충원되었다. 3층 편집국이 그곳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식 인사가 신문의 ‘다양성’을 스스로 좁혔다고 보고 논설위원 발탁 영역을 넓힌 것이다.
신문의 미래는 전문화에 달려있다고 보는 로젠탈은 논설위원 충원 방안과 관련하여 “글을 멋지게 쓰는 작가에게 지식을 전수시키기보다는 박식한 사람에게 글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쉽다”고 주장한다. 전 국무차관보 레스 겔브 같은 사람을 발굴해 신문사로 데려 온 것이 그런 케이스다. 그러자 논설회의에서 전문가들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해박한 경제전문가와 변호사가 테이블 너머로 서로 공격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들은 가족처럼 돼 논쟁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로젠탈은 말한다. 예를 들어 “그 얘기를 깜박 놓쳤는데 다시 말해줄 수 없겠습니까”, “당신이 사용한 경제용어를 이해 못하겠다. 설명을 좀…”, “이런 반론에 한번 대응해 보시오”라는 요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토론에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는 사설에 꼭 반영하도록 돼 있다. 사설의 집필을 맡은 사람은 그 문제가 비록 다른 위원에 의해 제기되고 자신은 그 관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사설에서 그것을 다루어야 한다.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은 1명이 1주일에 3편 정도의 사설을 써낸다. 하지만 모두 소화되지는 않는다. 하루 평균 3편의 사설만 엄선, 게재하기 때문이다.
미국 신문이 각급 선거에서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행위는 1930년대 이래 점차 감소 추세에 있지만 뉴욕 타임스만은 “신문의 의무를 태만히 할 수 없다”며 고수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991년 뉴욕 시의회 선거 때 지지후보를 선언하기에 앞서 논설위원을 동원해 출마자 1백 5명 전원을 인터뷰했다. 논설위원의 또다른 용도를 보여준 이 기획은 뉴욕 타임스의 성실성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 사설을 잘 쓰려면a. 안 읽는 까닭부터 알자
사설은 최소한 3~4명의 독자는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논설위원 사이의 자조 섞인 농담이다. 우선 집필자가 읽고, 데스크를 보는 주필과 오자를 잡아내야 할 교열기자가 읽고, 경우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해야 할 발행인이 읽는다는 이야기다. 만일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라면 군부에서 나온 신문 검열관도 ‘귀중한 독자’의 하나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설을 읽는 독자층은 5% 내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독자조사를 실시하면 “사설을 읽는다”는 답변이 예상을 깨고 무려 20%에 달하는 경우가 있다. 서울신문이 1996년에 실시한 독자면접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설에 대한 관심도는 49.3%로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관심도와 열독률은 별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사설에 무관심하다고 응답하면 스스로 ‘고급 독자’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돼 일종의 허세로 사설을 읽는 양, 또는 관심이 있는 양 허위 답변을 하는 독자가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신문 기사 가운데 독자에게 그 만큼 인기가 없고 읽히지 않는 것이 사설이라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한 줄의 사설을 읽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코미디언의 익살스러운 대사를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왜 사설을 읽지 않을까? 주변에 물어보면 “어렵다”, “재미없다”, “진부하다”, “딱딱하다”, “골치 아프다”는 반응이 태반이다. 사설은 도무지 읽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기사 중에서 사설이 제일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어아예 접근하려 들지를 않는다. 어쩌다 한번 들여다 보아도 주제와 내용이 훈시적이고 현학적이며 공허한 것 일색이어서 독자들은 질색이다. 문장론으로 보더라도 단조로운 틀박이 문장만 널려 있을 뿐 멋진 수사(修辭)와 긴박감 넘치는 문장 전략을 구사한 흔적이라곤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으니 누가 흥미를 느끼겠는가. 기사를 읽다가 사설란으로 시선을 옮기면 장기판을 보다가 바둑판을 보듯 답답하다고 한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요즘 사설은 문장이 세련되고 논리도 정연해 꽤 깔끔한 편이다. ‘신문은 역시 공기’라고 자각하고 성숙한 독자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런대로 할 얘기도 다하고 있는 편이다. 사설은 기개만 있고 이성이 부족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다면적으로 눈을 돌리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넓고 깊게 살피며 차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그럼에도 사설에 대한 독자들의 무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아래에 인용하는 신문사설에 대한 편협의 설문조사 결과는 좀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이 의문에 많은 것을 답변해 주고 있다.
1. 너무 딱딱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알기 쉽게 풀어 써 달라.─72%
2. 현실성 있고 뚜렷한 자기 주장이 아쉽다.─50.3%
3. 불충분한 자료에 근거해 쓰이는 경우가 많다.─43%
4. 건설적인 면과 공정한 안목이 결여돼 있다.─40.5%
5. 같은 사시 밑에 쓰는 사설인데도 집필자에 따라 달라지는 예가 많다. ─31.3%
6. 현학적 비난으로 끝나기 일쑤다. 논진(論陣)을 강화·합리화하라.─30.5%
7. 방향 제시 없는 고발에 그친다. 권력·금력에 굴하지 않는 지도적 기능을 살릴 수 없는가.─21%
편협 조사에서 나타난 독자들의 주문은 이해하기 쉬운 사설, 주장이 분명한 사설, 정확하고 공정한 사설을 써 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신문 사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 준 조사결과다.
이것 말고도 사설에 대한 독자들의 불평·불만은 얼마든지 있다. 감명을 주는 사설이 별로 없다든가, 사설의 ‘근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그 중 하나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자유당 때 신문 사설을 회상한다. 그때 사설은 천하를 뒤흔드는 기개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한다. 국민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거나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는, 그리하여 사회적 견인차로서 야성적 힘을 발휘하는 ‘큰 사설’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신문 사설이 끈질기지 못한 점도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신문은 냄비 속의 물처럼 약한 불에도 팔팔 끓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그래서 일과성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신문들처럼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몇 년이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밀고 나가는 집념이 약하다는 지적이다. 사실 사회 정의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우리 신문엔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독자를 붙잡지 못한 사설은 사자(死者)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읽히지 않는 사설은 청중 없는 강연회의 연사나 다를 바 없다. 메아리 없는 독백으로는 여론 형성을 주도할 수가 없다. 사설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갖고 있고, 그들로부터 폭 넓은 공감과 호응을 얻을 때 비로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b. 유의할 것들
사설이나 기사를 쓰는 사람들은 대개 글쓰기가 쉽고, 사실대로 기술한 체한다. 또 재빨리 끝낸 척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좋은 글은 그런 식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섭고 고된 일이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두려움에 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류 작가들 가운데도 글을 쓰려고 펜을 잡거나 키보드 앞에 앉을 때 두통, 위통이 온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좋은 사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에 한 단원씩.
사설 문장론
작가 안톤 체호프는 “대부분의 작가가 작품에 실패하는 것은 처음과 끝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사설도 마찬가지다. 사설의 성패는 첫 석 줄에서 판가름 난다. 사설이 독자를 붙잡는 데는 무엇보다도 서두가 중요하다. 독자들은 흔히 제목과 첫 대목을 읽고 그 사설을 계속 읽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사로 눈을 돌릴 것인지를 결정한다. 첫 단추를 잘 끼우면 다음 일이 술술 잘 풀려 나가듯이, 샴페인의 마개가 잘 뽑히면 술 맛이 좋듯이, 사설의 성패도 서두에서 결판나기가 일쑤다.
관심을 끄는 주제와 핵심을 찌르는 서두로 독자의 눈을 붙잡는 데 성공한 후라도 사설은 독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논리적 수사적 긴박감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선 어떤 형식과 기법도 동원될 수 있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시를 인용하거나 심지어 사진과 통계표까지 동원하는 사설도 있다. 평범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거나 집필자의 능력과 성실성을 의심받게 해서는 안 된다.
사설은 논리적이어야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그렇다고 사설이 결코 단조롭거나 딱딱한 학술적인 논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설은 진행중인 관심사를 다루는 만큼 ‘호흡’이 빨라야 한다. 사설은 늘어질수록 주장의 선명도가 떨어진다. 어느 정도의 속도감이 생명이다.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서 문제의 소재를 밝혀주고 독자와 더불어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비분강개하는 것이 사설이다. 논문의 페이스가 서사적(敍事的)이라면 사설의 페이스는 극적이라야 제격이다.
사설이라고 해서 꼭 논리와 이론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수필을 쓰듯 생활 주변과 계절의 바뀜을 노래하는 사설도 있다. 물론 이것이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딱딱한 사설에 대해 감칠 맛을 돋우려는 양념과 같은 것이 때로는 독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설 수가 있다.
사설의 끝 단락은 고갱이처럼 알짜라야 한다. 독자들은 명화의 멋진 최후 장면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듯이 사설의 마지막 것만을 기억하기가 일쑤다. 사설의 마무리야말로 그 사설 전체의 값을 좌우한다. 논설위원의 기량이 응집되는 곳이 바로 사설의 끝이다. 그러므로 사설의 끝맺음을 보면 그 논설위원의 필력과 식견의 깊이를 단번에 평가할 수 있다.
결론은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간결하게 작성한다. 그러나 본론과 결론의 상관관계가 반드시 높아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본론 중심의 결론형은 의외성 없이 당연한 내용만을 반복한 용문율(冗文率) 높은 문장이 되어, 오히려 독자들의 반감이나 저항을 자아낼 소지가 있다. 용문율이란 문장 속에 들어있는 군말의 비율을 뜻한다.
‘문장 표현 사전’의 저자 장재성은 사설의 마무리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급적 짧을 것, 강한 표현 기교일 것, 안정감을 놓치지 말 것, 이 세 가지라고 말한다. 끝이 길면 강한 때림이 없고, 무기교 무수사(無修辭)는 독자에게 주는 이미지가 약하다. 사설에 무슨 기교가 필요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딱딱한 사설이 읽히려면 혀를 녹이는 달콤한 당의정(糖衣錠)을 입혀야 할 것이다. 수사법은 읽는 피로를 덜어주고 풍유법, 반어법, 역설법은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치밀한 설계도부터
사설을 잘 쓰려면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멋진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문장 구성은 적어도 4단식이나 5단식의 다양한 틀을 생각하면서 들머리의 ‘유도’와 끝맺음의 ‘인상’에 특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가장 우수한 설계도는 사설의 주제가 무엇이건 독자를 우선 ‘흥미’로 잡아끌어 놓고 ‘감복’으로 끝나게 하는 구성일 것이다.
기승전결은 절귀체 한시(漢詩)의 서술 체계다. 제1의 ‘기’귀에서는 시사(詩思)를 제기하고, 제2의 ‘승’귀는 이를 받아 내용을 전개시키고, 제3의 ‘전’귀에서 시의(詩意)를 한 번 돌리어 전환하고, 제4의 ‘결’귀에서는 전(全)시의를 종합하여 결말을 맺는다. 문장론에서는 기승전결의 바람직한 비율을 첫 단락(起)=15%, 중간 단락 A(承)=37%, B(轉)=38%, 끝 단락(結)=10%로 보고 있다. 도입 단락의 길이가 왜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간단하다. 단락의 길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구상이 허술했다는 증거요, 설계도 없이 집을 지었다는 반증이다. 주제만 설정하고 마구잡이로 내리갈겨 써도 사설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설계도를 갖고 지은 집과, 없이 지은 집을 비교해 보라. 치밀한 사전 계획만이 좋은 사설 을 담보한다.
둘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어떤 난해한 문제도, 어떤 추상적인 것도 대중의 언어로 표현 못할 것은 없다. 사설은 논설위원의 식견을 과시하는 마당이 아니다. 따라서 글의 내용에 있어서나 문장과 용어의 선택에 있어 독자의 수준을 고려한 평이성을 중시해야 한다. 특히 경제, 과학, 문화재 등 전문성이 높은 문제를 다루는 사설일수록 독자들에게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쓰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설에서 박식의 나열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게 하고, 때로는 내용의 빈약을 형식으로 커버하려는 듯한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독자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삽한 사설은 실패한 사설이다. 그런 글로써 여론을 움직이기를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일 것이다. 독자들이 쉽게 읽고, 힘 안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사설이 잘된 사설이다.
셋째, 문장은 간명해야 한다. 그래야 의사 전달이 힘차고 명료하게 이루어진다. 간결체로 ‘톡’ 쏘는 표현을 곁들이면 그처럼 독자를 사로잡을 ‘향신료’도 없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에 따르면 단어와 문장이 짧을수록 독이성(讀易性=Readability)이 높아, 독자들이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장가들은 독이성을 위해 한 문장 안에 50자를 넘지 않게 쓰라고 권한다. 아무리 길어도 70자는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복합문을 피하고 한 문장에 하나의 개념이나 한가지 사실만 언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접속어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접속어가 많으면 문장의 길이가 길어지려니와 문장 자체가 딱딱해지기 쉽다.
주장은 선명하게
넷째, 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 그 주장이 공정하고 건설적인 대안까지 제시한 것이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사설이 주장 없이 단순한 서술에 그친다면 해설기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사설은 어떤 문제를 놓고 좋고 나쁘냐를 판별해 줄 의무가 있다. 따라서 방향 제시가 없는 고발이나 호소는 무의미하다. 찬성과 반대, 긍정과 부정을 뚜렷이 해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식의 애매모호한 주장의 전개는 언론에 대한 불신과 가치관의 혼란만 가중시킨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의 우리나라 신문사설은 구렁이 담 넘어 가는 식의 애매모호한 결구로 끝을 맺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혹시 당국이 문제를 삼으려고 덤벼들면 빠져 나갈 구멍을 터놓기 위해서다. 특히 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를 다룰 때는 눈치보기와 보신주의에 머문 채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허구의 논리에 숨어 버리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편법과 타성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주장이 뚜렷하지 않은 적당주의 사설을 쓰려면 차라리 붓을 들지 않는 것이 낫다. 사설을 익명으로 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집필자로 하여금 거침없는 주장을 펴게 하자는 데 있음을 논설위원은 유념해야 한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처럼 명확한 주장도 없다. 주장을 명확히한다는 것은 문제를 꿰뚫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바탕 없이는 대안 제시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까지 제시한 사설을 ‘우수작’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문제 제기에 그친 것은 당연히 그만 못한 사설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설이 현안에 대해 해결책이나 대안까지 제시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대안을 내놓아야 할 논제에서 그것을 회피했다면 사설의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섯째, 정확성이다. 논설위원은 논평의 대상인 ‘사실’을 정직하고 책임 있게 제시해야 한다. 또 결론은 정확한 증거와 합리적 논거를 기초로 하여 객관성 있게 도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설위원은 진실 추구의 열정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여론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사설이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처럼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자료나 신빙성 있는 반증도 없이 개연성만 가지고 기정 사실화하려는 논법은 지양해야 한다. 부정확한 증거는 그릇된 단정을 낳고 자료의 주관적인 채택은 사설의 공정성과 균형성을 훼손한다.
오보의 뉴스를 토대로 해서 제2의 오보 사설을 쓰는 것을 막자면 논설위원의 독자적인 취재활동, 즉 논설위원 스스로의 사실확인 노력이 긴요하다. 논설위원이 일선 기자의 보도에만 의존하다 보면 오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또 다행이 오보는 피한다고 하더라도 ‘내막’에 접근이 안돼 피상적 관찰에 흐르기 쉽다. 발로 뛰면서 쓰는 논설이라야 깊이와 정확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논설위원에게 일선 취재기자 못지않은 사실 확인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신문편집인협회 원칙선언’은 논설에 대해 “뉴스 보도와 같은 수준의 정확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며 “언론인은…보도의 공정성과 정확성에 대해 공중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주장은 문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독자의 공감과 신뢰를 살 수 있다. 불완전한 정보, 왜곡된 정보, 단편적인 정보, 미확인 정보, 조작된 정보, 유언비어 등에 근거한 입론(立論)은 언론의 책임 있는 보도 자세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결론 도출과 올바른 여론 형성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배척해야 마땅하다.
논설위원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의해 논설이 쓰여진 사실이 발견된 때는 바로 잡는 정직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사설 속의 오자나 오기를 정정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논지나 논점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한 난점이 있다. 논지나 논점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그 사설의 입론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설위원은 처음부터 완벽주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섯째, 사설은 순수해야 한다. 사설은 집필자나 신문사의 개별적 이해·이익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된다. 사설이 신문사의 사시를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반영은 어디까지나 공공의 이익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특정집단을 지나치게 옹호하는 편파성이나 반사회적 집단을 변호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도 피할 일이다. 무책임한 글 장난에 지나지 않는 무문곡필(舞文曲筆)이나 건전한 모럴이 없는 저속한 표현은 삼가야 한다.
신문이 사회의 거울이라면 사설은 진실을 은폐해서도 안되며 불의와 편견을 합리화 시켜주는 과오를 범해서도 안 된다. 그런 사설은 국민의 판단을 흐리는, 읽어서 유해한 활자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논설위원은 권력과 금력에 굴함이 없이 정정당당히 소신을 펴겠다는 의지가 강하고 곡필은 단호히 배격하는 ‘강골(强骨)’이어야 한다.
c. 논객들의 한마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박동운(朴東雲)은 논설위원이 유의해야 할 수칙으로 넓은 시야, 신선한 감각, 취재활동과 연구를 강조했다. ‘넓은 시야’란, 좁고 깊게 파고 드는 전문가들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논설위원은 스페셜리스트의 역할보다는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와 통한다. ‘신선한 감각’이란 언론인은 시대의 첨단을 걸으면서 항시 새 것에 대해 민감하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내지 기성의 권위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열 가지를 알고 하나를 쓰는 취재활동과 독서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문사는 논설위원에게 ‘자리 지키기’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 우리나라 논객들은 사설을 쓸 때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것에 유의하고 있는지? 전·현직 논설위원 10명의 이야기를 모아 본다.
김근 [金槿, 한겨레신문 주간]내가 쓴 사설이나 남이 쓴 사설을 볼 때 가장 주목하는 것은 논지가 뚜렷이 섰느냐의 여부다. 다시 말해 사설의 내용이 사시, 제작원칙, 논설회의 결정방향 등과 일치하느냐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그게 잘못되면 말썽이 크게 일어난다.
한겨레신문의 사시는 조직원들이 신념화하고 있는 ‘민주화’와 ‘통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민주화란 권위주의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을 뜻한다. 이와 관련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사상탄압을 반대하는 내용의 사설을 중시한다. 통일은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관련 사설은 통일을 지향하는 편에 서서 지원하는 것이라야 한다. 글의 완성도나 문장의 세련미를 따지는 문제는 이러한 내용을 점검한 다음의 일이라고 본다.
한겨레신문은 한글전용 신문이다. 때문에 여기에 맞지 않는 낡은 어투나 한문식 어휘는 바꾸고 영문과 외래어도 쓰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남찬순 [南贊淳, 동아일보 논설위원]동아일보는 사설 1편의 분량이 1천 2백 50자로 제한돼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저런 논리를 펴자니 주장의 반복을 피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논지의 전개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가급적 간단 명료한 단문을 사용한다. 애매모호한 문제를 다루는 사설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야 주장을 선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사설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어떻게 하면 주지를 명백히 하느냐는 것이다.
사설의 열독률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독자들이 사설에 흥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사설을 쉬운 글로 엮고 어려운 한자의 사용도 억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애로가 있다. 2백자 원고지 여섯장에 지나지 않는 좁은 마당에서 논지를 펴려니 아무래도 논증의 심도가 깊지 못하고 문장도 드라이해진다. 또 내용을 한자라도 더 담기 위해 토씨까지 마구 줄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아닌 딱딱한 일본식 표현을 쓰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사설에 어떻게 독자의 구미가 당기겠는가.
류근일 [柳根一, 조선일보 논설주간]사설을 쓸 때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첫째, 논리 자체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한가의 여부는 우선 배제한다. 이슈에 대한 견해를 논리화하는 데 있어 논리적 타당성을 중시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논리전개에 따라 파생되는 유·불리는 2차적 문제요 결과적 문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불리를 따질 경우 계열화 진영화 되기가 쉽다. 개인적으로 무척 경계하는 바다.
둘째는 절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특히 표출 욕구나 사심을 절제한다는 것은 고뇌에 찬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과정을 거친 글이라야 무게가 있고 함축이 크다.
세번째 지표는 모든 종류의 펀더멘털리즘(Fundamentalism)에 맞서겠다는 것이다. 펀더멘털리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이념의 형태가 있는가 하면 열정의 형태를 띤 것도 있다. 자기만의 정의, 자기만의 진리가 모두 다 펀더멘털리즘이다. 나는 그것에 항상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배격한다.
문명호 [文明浩, 문화일보 논설실장]사설을 쓸 때 가장 유의하는 것은 메시지를 분명히하는 일이다. 그 다음은 국가이익과 사실확인을 중시한다. 표현은 다소 거칠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분명히하는 것이 사설의 본분에 충실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얼른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우회적이거나 완곡한 표현을 쓰는 것은 사설을 진부하게 만든다.
나는 외교, 안보, 남북한관계 사설을 담당하고 있어 알권리 못지않게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나라와 국민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 외국신문이 우리 이익을 대변해 줄 리 만무한 이상 우리 신문이 이를 중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일단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주제로 사설을 쓰더라도 꼭 사실확인 노력을 선행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보를 바탕으로 방향이 빗나간 사설을 쓰는 과오를 범할 수가 있다. 사실확인을 위해서는 취재원과 직접 접촉한다. 또 개인적으로 교분을 쌓은 전문가의 조언도 듣는다. 혹시 내 생각이 틀렸거나 편향되지 않았는가를 검증하는 데도 유용한 방안이다.
좋은 사설이 나오기 위해서는 일본의 아사히신문처럼 많은 논설위원(40여명)을 확보해 충분한 연구시간을 주어야 한다. 아사히신문의 국제담당 논설위원은 현지연구를 목적으로 1년에 한두 번은 꼭 외국여행을 하며 국내의 각종 토론회에 참석할 시간적 여유도 넉넉한 편이다. 거기에 논설위원 1명이 한 달에 1~2편밖에 사설을 쓰지 않으니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사설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날 그날 허겁지겁 둘러대는 한국적 현실이 안타깝다.
박갑천 [朴甲千, 칼럼니스트·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사설은 무엇보다도 정확한 글, 문법에 맞는 글로 써야 한다. 신문 사설을 들여다보면 틀린 글, 잘못된 글을 많이 발견한다. 특히 요즘 사설은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대입 수험생과 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정독하고 있다니 교육적 의미를 생각해 정확하게 써야 한다. 사설에 잘못된 글이 있다면 그만큼 신세대들에게 오류를 확산시킬 가능성이 크므로 조심해야 된다. 어떻게 보면 사설은 형식과 내용의 중요성이 반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용도 좋고 형식도 반듯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주장을 펴더라도 형식면에서 문법에 맞지 않는 글, 문장이 안 돼 있는 글은 논지의 초점을 흐려 난삽한 사설을 만들기 마련이다.
사설의 양은 요즘처럼 1편당 4~5매가 적절한 것 같다. 할 얘기만 딱 하고 끝낼 수 있지 않는가. 과거 1편당 7~8매짜리 사설을 쓸 때 군더더기 같은 이야기를 덧붙이느라고 애쓴 경우가 많았다. 한때 어느 신문은 사설에서도 양과 질로 압도하겠다며 20~30매짜리 사설을 내보낸 적이 있지만 모두가 바쁘게 사는 지금 만일 그런 사설을 내보낸다면 아마 질려서 아무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일본신문을 보면 마치 수필을 연상시키는 가볍고 부드러운 터치의 사설을 대한다. 우리 사설란에도 그런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설의 주제와 형식이 가벼워져서 사설이 작은 것도 주장할 수 있을 때 신문은 독자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본다.
박연호[朴連浩, 국민일보 논설위원]우리나라 신문사설은 전반적으로 그 내용이 너무 어렵다. 논리 전개가 학술 논문처럼 딱딱하고, 난해한 전문용어와 복잡한 한자는 왜 그리 많은지. 외국서도 한국의 사설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사설을 가급적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 사설의 수준은 독자 투고란에 게재되는 글보다 조금 나으면 된다고 본다.
문제는 많이 알고 깊이 있게 알아야 쉬운 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질 부족과 노력 부족을 많이 느낀다. 논설위원은 돌발사태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분히 앉아서 조사하고 연구하며 자기 계발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안식휴가 제도 같은 것을 실시했으면 좋겠다. 대학에 가서 관심 있는 분야를 단 한 학기만이라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재충전이 꽤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송진혁 [宋鎭赫, 중앙일보 논설실장]요즘 사설은 길이가 짧아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처음부터 제시하는, 바꿔 말해 결론부터 먼저 제시하는 사설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사설을 쓸 때 가장 신경을 써서 노력하는 대목은 어떻게 하면 논리적 설득력을 높이고 어떻게 하면 정곡을 찔러 독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느냐는 것이다. 사설은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난해한 전문 용어보다는 평이한 표현을 쓰기 위해 애를 쓴다.
사설을 쓰는 데 있어 현실적으로 겪는 애로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양비론’ 시비다. 일부에서는 양비론이 논평의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지적하나, 양비론의 전개를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양 당사자가 모두 잘못했을 때 양쪽을 다 야단치는 양비론이 왜 나쁘단 말인가. 백 명이 잘못했다면 백비론을 펴야 마땅하다. 또 양자택일로만 재단할 수 없는 중간지대도 있다. 이런 현실을 도외시할 경우 일면적인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중립적 소론이라고 해서 흐리멍덩하다고 몰아 세우는 것은 현실을 너무 단순화시켜 흑백논리로 양단하는 위험한 사고에 빠질 우려가 크다. 형식에 개의치 않고 필요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본다.
사설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피상적 진단과 피상적 대안 제시에 그치는 사설이 의외로 많다. 책임 있는 논설위원이라면 문제의 정곡을 찌르면서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유용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설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안영모 [安英模, 세계일보 주필]사설의 주제를 선정할 때는 다른 신문이 주목하지 않은 토픽에 특히 주목한다. 모두가 다 다루는 주제는 피하자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매년 되풀이되는 국경일 기념 사설이라든가 9월 정기국회 개회에 당부하는 사설 같은 것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그런 사설은 너무 의례적이고 진부하다. 신문마다 주장하는 바가 비슷하고 아예 제목까지 똑같을 때가 있다.
단평도 마찬가지다. 춘하추동으로 되풀이되는 세시기(歲時記)는 단평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사회면이나 문화면 귀퉁이에 처박힌 1단짜리 기사라도 의미가 있다면 그걸 부각시켜 조명하려고 든다. 독자들은 신문마다 일제히 상에 올리는 ‘고정 메뉴’에 식상해 있다. 읽히는 사설을 쓰자면 주제 선정의 스테레오타입부터 깨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일보 사설란은 제한된 지면에 사설 3편을 동시에 소화하느라 중언부언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서두에 결론을 내세우거나 리드에서부터 논평이 나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긴다. 또 발언 내용의 인용은 따옴표(“ ”) 대신에 싱글 쿼트(‘ ’)를 사용해서 그 핵심만을 축약적으로 나타내도록 한다. 따옴표를 써서 발언 내용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핵심을 가려내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사설의 임무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사설이 논리적 실체도 없이 “말도 안 된다”, “어불성설이다” 식의 레토릭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국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창하게 국민의 이름을 파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국민이 보기에…” 운운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보기에 이렇다”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
이광훈 [李光勳, 경향신문 논설고문]사설은 자칫하면 해설기사와 중복되기가 쉽다. 이를 피하기 위해 ‘사실’ 언급은 가급적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 부분을 앞에 내세우는 사설의 경우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를 설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최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담임선생을 바꿔 달라고 요구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만일 내가 이 사건을 주제로 사설을 썼다면 사설의 전반부는 그 요구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데 할애했을 것이다. 귀납법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사설은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기보다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사설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레토릭 사용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예컨대 1995년의 LA폭동 같은 것은 문명비판적으로 접근해야 좋은 메시지를 남길 수가 있는 것이다. 사설을 쓰는 데 어떤 정형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때로는 에세이 식으로, 때로는 감상적으로 쓰는 것도 필요하다. DJ가 1993년 대선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감상적으로 접근했던 기억이 난다.
칼럼의 문장은 길어도 무방하지만 사설의 문장은 짧아야 한다. 그래야 힘이 있다. 사설의 문장을 길게 해서 기승전결을 맞추다 보면 ‘긴장감’과 ‘속도’가 떨어진다.
이성춘 [李成春,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사설은 주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내용과 수치를 꼭 인용하면서 논리를 전개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 것 없이 이분법적으로 얼버무리다 보면 문제점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사설 본연의 기능에 소홀하게 된다.
사설은 기본적으로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왈가왈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1997년 말 외환위기 때 언론이 IMF를 향해 “죽일 놈 살릴 놈”하다가 곧 “IMF 아니면 큰 일”이라며 콩 튀듯 국 끓듯 법석을 떤 일은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수준을 보여 준 것이었다. 사설은 문제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뒤 각계의 의견을 듣고 관련자료를 판별한다면 어느 정도 내용 있는 글을 쓸 수가 있다. 천착하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사설은 글장난 말장난으로 끝나기가 십상이다.
요즘 논설위원은 사설 쓰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문장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검찰의 기소장처럼 문장은 왜 그렇게 긴지, 읽는 데 숨이 막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장을 간명하게 깎고 다듬는 노력이 아쉽다. 한말(韓末)의 우국선언문 같은 개탄조의 고루한 문장도 답답하게 느껴진다.
제3장이것이 명사설
흔히 “그 사설 잘 썼다"고 말할 때 그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표현의 수사도 감동을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정녕 듣고 싶었던 말을 접했을 때 절로 “잘 썼다”는 찬사가 나올 것이다. 수사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특히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논리는 독자의 관심과 여론을 자극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분명한 주장은 설복력이 있을 까닭이 없다.
사설이 주장을 분명히 하자면 권력과 맞부딪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아야 한다. 권력이 아니라 때로는 민중이 싫다 해도 거침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신념을 지녀야 한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대중의 인기에도 영합하지 않는 사설이 좋은 사설인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중시하고, 강자에 대해 약자를 변호하며, 새로운 사상이나 운동을 조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사설을 의미 있게 만든다. 또한 대국적 견지에서 국가와 인류의 앞날을 멀리 내다보는 주장을 펼 때 그 사설은 시공을 초월한 소구력(訴求力)과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가. 한국
a.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한국의 명사설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저 유명한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이다(예문9 참조).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보내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한 끝에 ‘을사 5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로써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국제적으로 독립국의 위상을 잃고 말았다. 또한 서울에 설치된 일본 통감부(統監府)는 외교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가장 빛나는 논설로 손꼽히는 ‘시일야방성대곡’은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이 바로 이 조약체결의 부당함을 비판하며 통분을 토로한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이틀 후에 발행된 황성신문의 머리에 실린 이 사설은 일본의 강압에 굴복하여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하며 국민궐기를 호소했다.
원래 국한문 혼용 5백여 자로 된 ‘시일야방성대곡’을 한글로 풀어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예문9]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지난번 이등박문(伊藤博文) 후작이 한국에 왔을 적에 어리석은 우리 백성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에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니 이번에 온 것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기반을 굳게 다질 계책을 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官民上下)가 환영하여 마지아니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무슨 연유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조짐이니 이등의 당초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 폐하가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해 이등 스스로 알아서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며 매국의 역적됨을 달갑게 여겨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묘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각부 대신들은 깊게 나무랄 것도 못되나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만 때우고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으려 했단 말인가. 김청음(金淸陰, 필자 주: 김상헌(金尙憲)의 호·병자호란 때 최명길(崔明吉)이 기초한 굴욕적인 국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함)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鄭桐溪, 필자 주: 병자호란 때 할복자살 기도)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한 채 뻔뻔스럽게 살아 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정신이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황성신문의 발행부수는 당시로서는 꽤 많은 편인 3천부 정도였다.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조약 강제체결의 전말을 전하는 기사가 사전검열을 받지않은 채 실린 문제의 신문이 나오던 날 새벽에 일제는 신문사를 급습해 남아 있던 신문을 몰수하고, 술을 마시며 기다리던 위암을 연행 구금했다. 그리고 황성신문에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당시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粱起鐸)이 한영(韓英) 합판으로 발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시일야방성대곡이야말로 모든 대한제국 신민의 통곡”이라고 표현하며 “아! 황성기자는 실로 온 겨레의 대표가 되어 밝고 올바른 의지를 세계에 나타냈다”고 칭송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전파되고 집집마다 이를 낭송하면서 조약체결에 반대하고 일본에 항거하는 연설, 시위, 철시(撤市), 의병 봉기 등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또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자결하는 지사도 줄을 이었다.
이 필화사건으로 위암은 경무청 감옥에서 64일간 옥고를 치루고 이듬해 2월14일 풀려났다. 러-일전쟁 개전 후 일본군사령부의 포고로 실시돼온 사전 검열제를 위반했다는 것이 위암에게 씌워진 죄목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넘치는 민족정기와 겨레의 폐부를 찌르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동양 삼국의 정족안녕을 자처하던 이등박문이 갑자기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는 을사 5조약을 내밀었음에 놀랐고 ▲고종(高宗)이 이를 강력히 거절했으므로 조약은 성립된 것이 아니며 ▲개, 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은 겁을 먹고 이에 서명하여 나라를 팔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임금과 동포를 대할 것이며 ▲2천만 동포는 4천년 이어온 국민정신을 하룻밤 사이에 망하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전형적인 비분강개형 사설이다. 그래서 위암의 간절한 나라사랑과 투철한 지사적 기개를 읽을 수가 있다. 특히 우리 대신들의 비열한 매국행위를 규탄하고 국민들에게 구국운동을 촉구하는 대목은 한국 사람이라면 치솟는 분노와 충정으로 피를 끓게 만든다.
그러나 오늘의 사설 작성법 관점에서 보면 ‘시일야방성대곡’은 흠결이 적지않다. 이 사설은 을사 5조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교권 박탈이나 통감부 설치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렇다 할 평가도 공박도 없다. 사설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에 대한 평가를 간과한 것이다. 일제가 을사조약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조항을 통해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5년 후 마침내 한국을 병탄한 역사를 상기할 때 이 문제에 대한 비판결여는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누락의 결과이겠지만 ‘시일야방성대곡’은 다소 기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등박문의 기만 행위를 사설의 도입부로 삼은 것은 문제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만일 ‘시일야방성대곡’이 요즘 나온 사설이었다면 먼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 국권 강탈의 부당성과 조약체결 과정의 문제점을 통박하는 데 논지의 역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등이 자행한 기만과 농간, 대신들의 줏대 없는 처신을 비판하고 국민봉기를 촉구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현대의 사설 작성법 관점에서 본다면 ‘시일야방성대곡’은 확실히 내용과 구성면에 부실한 측면이 있는 사설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1백년 전의 글이 아직도 우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때나 이제나 여전한 한일 간의 가 라앉지 않은 ‘앙금’ 때문일 것이다.
b. 호헌(護憲)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
[조선일보 1960년 3월 17일자]
한국 언론에서 최석채(崔錫采)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을 대표하는 논객이다. 그는 불굴의 용기와 정론직필(正論直筆)로 “우리시대 최후의 지사(志士)논객”이라는 평을 들었고 ‘언론계의 투령(鬪領)’으로 존경받았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그는 비판정신이 투철한 ‘반골’이면서도 균형감각을 갖춘 언론인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주필로 활약하던 1963년 3월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군정 4년 연장방침에 대해 비판을 금지하는 언론봉쇄 조치를 취하자 언론사상 유례없는 무(無)사설로 저항했다. 사설란을 백지로 텅 비워둔 신문을 12일 동안 내보낸 것이다. 그는 무사설의 변을 신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본지는 사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떳떳이 소신을 주장할 수 없는 법의 제약 아래 본의 아닌 무문(舞文)으로 국가대사를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언론의 정도라 믿는 신념에서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대구매일 주필로 있으면서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1955년 9월 13일자)로 인한 필화사건 때였다. 그는 이 사설에서 경북도 당국이 대구를 방문하는 고위층들의 환심을 사려고 어린 중고등학생을 환영행사에 동원하여 서너 시간씩 길거리에 도열시키는 것은 폐풍(弊風)이라고 비난하며 이의 중지를 강력히 촉구했다.
이 사설로 대구매일신문사는 백주(白晝)에 테러를 당하고 최석채는 구속되어 30일간 옥고를 치렀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이 경찰 간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이때다. 경찰은 최석채가 쓴 귀에 거슬리는 사설 등을 모조리 이적(利敵)으로 몰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했지만 최석채는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도 유명했지만 이때 권력과 폭력에 맞서 소신 있게 싸운 기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1959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최석채는 4·19를 전후한 시기에 자유당 독재에 대항하여 언론투쟁을 전개했다. 그가 자유당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1960년 3월 17일자에 쓴 사설 ‘호헌(護憲)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4·19의거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명사설이다(예문10 참조).
3·15부정선거를 ‘민주주의의 장송(葬送)’이라고 표현하며 선거무효 투쟁을 위한 국민봉기를 공공연히 선동한 이 사설이 나가자 서울 장안이 떠들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이 사설에 대해 “아예 처음부터 잡혀갈 각오를 하고 아침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쓴 것”이라고 회고하며 “어찌나 세게 썼던지 지금도 그걸 보면 떨린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세종로와 태평로를 가득 메운 학생들의 데모현장을 내려다 보고 눈시울을 적시면서 이 사설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문10]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
허울좋은 ‘한 표의 주권’에 얽매여 그지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 전율하던 ‘3·15 정·부통령선거’도 이제 모든 부정·불법을 막후에 감춘 채, 국회의 당선 선포라는 절차만을 남기고 어느덧 과거라는 피안으로 흘러가려 한다. 이때 우리는, 아니 뜻있는 전국민은 엄숙히 자문자답해 본다. 과연 이것이 선거인가?고. 민주주의의 골격이 될 ‘선거’라는 제도가 이렇게도 처절하고 그다지도 황량하다면, 민주주의를 위해서 뿌린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의 혈의 분투와 노고가 너무나 가엾지 않을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눈물과 함께 부르며 낙동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용진하던 6·25 당시의 우리 젊은 용사들 모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간다. 지금 쯤은 어느 산비탈의 이름없는 무덤에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들 영령이 아까운 몸을 바쳐 수호했던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선거’가 이렇게까지 무참하게 나타날 것을 알았다면, 지하에서의 곡성이 추추할 것이며 영겁의 유적(幽籍)도 요동될 것 같다.
3·15의 결론은, 이제는 무슨 선거를 해도 집권당의 자유자재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야당에게 2할의 의석을 주고 싶으면 2할을, 1할을 주고 싶으면 1할을, 하나도 주고 싶지 않다면 하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는 융통자재의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 야당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금후로는 야당의 지반인 서울 같은 대도시라고 하더라도 국회에 2~3석의 자리를 얻기가 힘들 것임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혹시 자유당이 선심을 써서 2~3석을 허여한다고 치더라도 그것으로 야당이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당이나 행정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거이고 보면, 야당으로서 선출을 바란다는 자체가 무모한 일이다.
조표(造票)의 노예로 화한 우리 ‘주권자’는 묵묵히 공개투표의 대열에 끼일 뿐, 항거하거나 반대하기도 어려웠다는 교훈을 이번에 잘 알았다.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원통한 생명들이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올해는 앞으로 지방의원 선거와 참의원 선거가 있을 것이고, 2년 후에는 제 5대 민의원 선거가 있으련만, 이제는 여당 공천자 이외의 인사로 이 선거에 나설 수 있는 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그리고 보수파니 진보파니 하는 것도 요는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나타나는 배경 현상이다. 그 국민의 지지를 표현하는 유일의 방식인 선거가 이럴진대, 이 땅에서 여·야의 구별을 찾고 보수·진취 등 정견이 대립된다는 것은 하나의 잠꼬대 같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기억해야 한다. 오직 있을 수 있는 것은 여당 자체내의 주도권 문제뿐일 것이다.
선거제도가 공명정대해야만 민주주의가 살 수 있고, 민주주의가 살아 있어야만 여당과 야당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다면 가장 요긴한 선거가 오늘처럼 되어버린 처지에 야당의 존재 의의에 관해서 우리는 커다란 회의를 느낀다. 민주당에서는 3·15선거의 불법·무효를 부르짖고 원내투쟁과 법정투쟁을 감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 실오라기만한 기대라도 걸 수 있는 국민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원내투쟁이라고 하지만, 저 ‘2·4파동’ 때를 회상해 보라. 법정투쟁이라고 하지만 이 소송을 심리하는 자가 누구일까. 어림도 없는 소리인 것만 같다.
만일 민주당이 구태의연하게 원내투쟁을 한답시고 소동을 일으키거나 원내 폭로연설을 통해서 울분의 홍수를 쏟아놓는다 하더라도, 이미 분노감각이 마비된 국민의 심경에는 별다른 반응을 기대할 수가 없고 불의의 승리에 도취하는 집권자들에게는 한낱 패자의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오히려 조그마한 타협조건으로 3·15선거를 합리화시켜주는 구실밖에 못한다는 것이 2·4파동의 뒤처리 경위에서 역력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민주당은 정신차려야 한다. 국민의 가슴에는 이미 민주주의를 장송하는 마음의 상장이 제각기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라. 원내투쟁도 좋지만, 과거의 투쟁방식과는 달리 애절하고 비통하며 듣고 보는 이가 모두 숙연히 옷깃을 여미고 그러고도 방성대곡할 수 있는 저항방식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민주 패잔병의 발악이 되기 쉽다. 그보다도 민주당은 정당운동이라는 좁 은 테두리를 박차고 나서라.
이제는 호헌구국의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2·4파동 직후 우리는 민주당에게 의원직의 총사퇴를 권고했었다. 그때 이미 오늘과 같은 사태가 도래할 것을 우리는 미리 예견했기 때문이다. 2·4파동에서 벌써 민주주의적 정치방식은 지양되었던 것인데, 민주당은 원내투쟁이란 이름 아래 굴욕적인 타협을 하고 말았던 것이니, 오늘에 와서 그때의 오산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을 줄 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원인들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3·15선거를 몸소 겪고 이래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믿는다. 사는 길은 오직 호헌구국의 대의를 내걸고 전체 국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자각한다.
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
[조선일보 1963년 3월 16일자]
최석채의 사설은 일반적으로 형식논리가 매우 정연하고 강한 법률론적 논설이다. 일본에서 대학시절 법학을 전공했기에 그럴 법하다. 그에게는 일본교육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었으나 구미사상의 영향은 적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부정이나 불의를 논박하는 대쪽 같은 글을 당당히 쓰기는 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통찰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사상적으로 제시하는 데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언론인 출신 남재희(南載熙)는 평한다. 그러나 최석채의 수많은 사설이 나라를 바로잡고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최석채는 5·16후 군사정부에 대해서도 준열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는 수도경비사 장병 80여명이 최고회의 앞에서 군정 연장을 요구하며 벌인 데모에 격분하여 단숨에 써낸 사설로 전해지고 있다(예문11 참조). 비판적 기개와 탄탄한 논리적 구성이 단연 돋보이는 글이다. 젊은 군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매서운 필치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정말 용기 있는 글이요, 정론과 명문으로 언론사에 기록될 만한 사설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 사설의 전문을 일반 활자보다 큰 4호 활자로 뽑아 1면 머리로 실었다. 파격적인 편집을 통해 사설의 강도를 높인 것이다.
[예문11]
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
현역군인 수십 명이 최고회의로 몰려들어 데모를 했다 한다. 동기나 이유를 따질 겨를이 없이 명색 공화국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짓일까. 국방장관을 위시해서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이 국민 앞에 엄숙히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서한 것이 바로 16일 전의 일이다.
그런 선서가 없었다고 한들, 군인이 정치에 관여를 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를 고금의 역사가 소연(昭然)히 가르쳐 주고 있는 바다. 하물며 5·16혁명으로 군이 통치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혁명정부의 예하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떼를 지어 통수계통을 문란하고 정치적 행동을 내걸어 행동한다는 것은 하극상의 기풍, 그 극에 달했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요, 군율을 무시함이 이에 더할 바 없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에 가담한 수효가 기십(幾十) 명에 불과하거나, 사려가 미숙한 혈기에서 온 소치라 할지라도 군인된 본령을 망각한 이들의 사고 기저(基底)가 벌써 국가의 화근이니 국민된 자, 추호의 동정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외람하게도 ‘이 나라 정치정세를 좌시 방관할 수 없어 전국민의 이름으로’ 운운하여 국민의 의사를 참칭(僭稱)했다.
우방의 막대한 원조로써 현대무기를 장비했고 국민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국방비를 부담하면서 막강 60만의 대군을 옹(擁)하고 있는 소이는 백 55리 전선을 지켜 외적에서부터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 재산을 수호하라고 한 것이지 절대로 그들이 정치에 관여하라고 한 일은 아닌 것이다. 정치에 눈을 떴거든 군복을 벗고 정치운동으로 나서라. 왜 비겁하게도 신성한 군복을 걸치고, 무기를 지닌 특권을 향유한 채 군율을 어기고, 국법을 짓밟고, 국민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가.
그들은 6개 항목의 건의사항을 내세워 ‘우국충정’이라는 자기도취를 자행했다. 하나 하나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지만 혹 일부 군인이나마 그런 도착된 사고방식에 오염되었다면 이야말로 큰 일이기에 지금 그 잘못을 깨우쳐 놓아야 하겠다.
첫째, ‘…현 정부를 전복하고자 음모한 민족배반자인 쿠데타 분자들은 그 직(職)의 고하를 불문하고 엄중색출 극형에 처함으로써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정부의 권위를 확립하라’고 했다. 당연한 주장 같지만 하급 군인들이 새삼스럽게 그런 구호로 데모를 하지 않더라도 혁명정부는 국가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행동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는가. 국민들은 이미 발각된 그런 음모사건의 처단에 정부를 태산같이 믿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중이며, 오히려 철없는 군인들의 이번과 같은 망동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공포에 떨게’ 하는 혼란과 불안의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볼 때 자가당착도 유만부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했다. 대관절 계엄의 본질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계엄령은 일반 행정력으로써 도저히 국가치안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군대의 일사불란한 명령계통과 무력을 동원하여 3권을 장악하는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수단인 것이다. 일반 국민은 눈이 빠지도록 질서와 안정을 갈구하고 있는데, 반란을 기도한 것은 일부 몰지각한 군인들이요, 또한 이번 데모처럼 상사에 불신을 표시하는 군기문란의 진원이 다름아닌 그들 자신인데 무엇을 하겠다고 계엄령이 선포되어야 하는가.
셋째로 구태의연한 구(舊) 정객들의 정치활동을 즉시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무엇이 구태의연이며 어떤 것이 신태(新態)인지 그들의 주장 근거를 촌탁할 수는 없으나 2·27선서 이후의 정치활동은 국민들이 보기에 연민(憐憫)할 정도로 자숙의 빛이 현저한데 민주주의적 정치양식을 군대의 영내처럼 혼동하는 천박한 견식을 버려야 한다.
넷째, 군정을 연장하거나 박(朴)의장의 민정참여를 요구한 것은 더욱 불가해하다. 그런 것은 최고통치권자인 박의장 자신이 국내외 정세를 통찰하여 취한 결단이지, 하급군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섯째, 더욱 강력한 시책을 감행하라는 요구는 ‘우유부단하고 미온적인 시정’을 전제로 하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위의 제 4항과는 전연 모순되는 논리 도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섯째,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부득이 최후적인 수단을 강구할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 만약에 이것이 실력발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실로 놀라울 ‘반란의 예비’적 망발이다. 그래,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국가를 사랑한다는 청년 장교들이 그렇게도 지각이 없는가. 반란을 음모한 쿠데타 분자를 규탄, 극형에 처할 것을 불법데모로써 육박한 그들이 목적은 다르다 할지라도 공공연히 최고통치기관을 향해서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위협적 언동을 취하는 것은 영락없이 똑같은 ‘반란’의 수단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녕코 이런 소아병적 혈기야말로 국가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 넣는 반민주적 군국주의의 남상(濫觴)임을 개탄하면서 군법의 추상같은 발동을 ‘전국민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한다. 당국은 이들의 엄단을 발표한 바 있지만, 만의 일이라도 이런 사태에, 같은 군대의 부하라 하여 조금이라도 온정이나 무마가 가해진다면 일파만파로 연쇄반응은 그칠 줄 모를 것을 우리는 심우(深憂)한다. ‘울며 마속(馬謖)을 참한’ 제갈공명의 비장한 공심(公心)이 절실히 요청되며, 민주주의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서 차제에 군의 강철같은 단결과 함께 군 책임자들의 단호한 결의가 있어야 할 줄 안다.
나. 미국
a. 문신(紋身)과 자유
[에임스 데일리 트리뷴 1993년 10월 7일자]
미국신문편집인협회(ASNE)는 매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상대로 명기사, 명논평, 명사설 등을 선정하여 필자에게 2천 5백 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문신(紋身)의 자유’는 1994년도의 명사설로 선정된 것이다(예문12 참조). 이 사설은 미국 아이오와 주 에임스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에임스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된 사설로 이 신문의 주필 마이클 가트너가 쓴 것이다. 그는 한때 NBC뉴스 사장으로 뉴욕에서 1천 2백 명이 넘는 스태프를 지휘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 1만부가 발행되는 에임스 데일리 트리뷴의 공동소유주로, 혼자 사설 페이지를 맡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고향에서 사설 쓰기를 즐기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한다.
명문은 노래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즉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신봉자인 그는 빈틈없는 논리와 정열을 갖고 그 자유를 수호하고 있다. ‘문신과 자유’는 가트너 특유의 음악거장 스타일이 지방대학의 한 논쟁에 응용된 것이다. 사설란의 음악가라고 불리는 그는 사설을 서정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작곡하여 소리 높여 읽게 만든다. 미국의 한 언론 관계책자는 ‘명문(名文)은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이 사설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예문12]
문신과 자유
문신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음식서비스 일꾼인 잭슨 워렌의 팔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혐오감을 늘어놓는다. 한 팔에 나치당의 문장이, 다른 팔엔 KKK가 문신돼 있다고.
으흐.
추하다.
대학 당국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 학생의 불평을 받아들여 워렌을 공중과 접촉하지 않는 자리로 잠정 재배치했다.
으흐.
그건 모욕적이다. 도대체 아이오와 주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자유를 옹호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토론을 중시하는 캠퍼스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라의 건국이념과 자유, 권리, 그리고 수정헌법 제1조에 관해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헌법을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 나라에선 당신이 경멸하는 연설도 용인해야 한다.
이 나라에선 당신이 혐오하는 평가도 용인해야 한다.
이 나라에선 당신이 싫어하는 견해도 용인해야 한다.
그런 것쯤은 대학에서 배웠을 것이다. 이견은 민주주의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수정헌법 제1조는 법을 어겼건, 야비하건, 혐오하건, 혐오감을 일으키건, 경멸하건, 경멸을 당했건 모두를 보호한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텍사스주의 성조기 소각자들을 기억하는가? 스코키의 나치 지지 시위자들을 기억하는가? 아무데서나 벌어지는 반전시위는 또 어떤가? 그러나 이들은 모조리 다 시민으로서 보호받고 있다.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역겹고 때로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또 때로는 야비한 주장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말도 안되게 터무니없는 짓거리들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 헌법도 그렇게 판시했다. 오래 전에 대법관 올리버 원델 홈즈가 기술했듯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서는 우리에게 찬성하는 자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다른 생각을 할 자유도 있다.
잭슨 워렌의 문신 문제를 제기한 아이오와 주립대 대학원생 샨텔 티보듀 양에게 사람들이 말해줘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워렌이 학생들과 접촉해선 안된다”고 주장하며 “나는 말할 자유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말이 도를 지나치는 건 문제”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 “사람들이 돌았다. 캠퍼스는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이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KKK 문신을 한 남자라면 당신이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라고 말한다.
당신이 줄 메시지는 명백하다.
여기는 말할 자유를 신봉하는 학교다.
여기는 이견을 보호하는 학교다.
여기는 미국을 소중히 여기는 학교다.
그것이 아이오와 주가 해야 할 말이다. 잭슨 워렌은 증오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추기(追記)
“만일 정부가 단 한 사람의 단 한가지 권리라도 침해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어떤 사람의 권리도 안전할 수가 없다.”
미국시민자유연맹대표 나딘 스트로센이 화요일 밤 심슨대학 연설에서 행한 이 말을 우리가 인용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던 것 같다. 그걸 당신의 냉장고 문에 붙여두라고 우리는 말한 바 있다. 누군가가 냉장고를, 아니 냉장고 문을 사야 할지 모른다. 아이오아 주 사람들을 위하여.
리듬으로 내용 전달
미국의 수정헌법이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이 사설처럼 간명하게 기술한 글도 없을 것이다. 이런 사설은 사회를 계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 사설은 독자들에게 “문신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는 제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대화의 질을 천천히 높여감으로써 독자들을 사설 속으로 빨아 들인다. 시민들의 이해에 관련돼 있거나 독자들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킬 주제에 관한 논설은 이처럼 대화체의 제안으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가트너는 한두 단어짜리 짧은 문장을 많이 쓰고 있다. 또 반복법을 자주 사용 한다. 그가 노리는 효과는 ‘이해 제일주의’, ‘전달 제일주의’이다. 그는 문장의 짧고 규칙적인 연속성을 통해 내용을 독자들에게 리듬으로 전달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일반 기사에서는 메시지의 반복이 환영받지 않는다. 지면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독자의 흥미를 감소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설처럼 설득의 목적을 갖고 있는 의견기사에서는 같은 형식의 절이나 구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 사설은 두 번 끝난다. 가트너는 ‘추기’를 통해 전날 사설을 인용하면서 자기 주장의 일관성을 넌지시 강조한다. 역시 대가다운 노련한 솜씨다.
b. 위기의 서부
[뉴욕 타임스 1995년 6월 18일자]
‘위기의 서부’는 1996년 퓰리처상 사설부문 수상작 가운데 하나다. 1917년 신문왕 퓰리처가 기증한 기금으로 창설된 퓰리처상은 매년 미국내 언론, 문학, 음악분야에서 뛰어난 대중적 공로와 업적을 지닌 사람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언론분야에는 공공이익, 현장보도, 탐사보도, 해설보도, 국제보도, 시사해설, 비평, 시사만화, 현장보도사진 등 14개 상을 두고 있다. 단일 기사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기자가 작성한 여러 건의 기사나 팀으로 구성된 기자들이 완성한 시리즈물을 대상으로 시상한다.
미국 서부지역의 환경파괴 움직임을 비판하며 이의 중지를 촉구한 ‘위기의 서부’는 뉴욕 타임스의 로버트 셈플 논설위원이 쓴 사설이다(예문13 참조). ‘위기의 서부’와 함께 수상작으로 선정된 그의 다른 사설, ‘옐로우스톤 광산개발을 중지하라’, ‘버드 셔스터의 더러운 물[水]법’, ‘공화당의 반(反)자연 전쟁’, ‘위험에 빠진 공원들’, ‘클린턴 대통령은 옐로우스톤을 구할 수 있다’, ‘알래스카 자연은 포위돼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옐로우스톤을 위해 움직여라’, ‘의회의 토지 장악’, ‘뉴월드 광산 폐쇄’ 역시 그 제목들이 말하듯이 환경보호를 역설하는 내용이다. 이 일련의 환경관련 사설은 “명쾌한 스타일, 도덕적 목적, 철저한 논증, 필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가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퓰리처상 위원회는 밝혔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버클리대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받은 로버트 셈플은 1963년 뉴욕 타임스에 입사 후 워싱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 곧바로 백악관을 출입했다. 1973년 뉴욕에서 국내보도 데스크를 담당한 그는 1975년 런던 지국장으로 승진한 뒤 1977년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국제부장을 역임했다.
[예문13]
위기의 서부
서부에서 최근 도착한 몇몇 소식들을 보자. 최근 몬타나 주는 미국 내에서 가장 강력했던 수질오염 방지법을 탄광업자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 아이다호 주 입법자들은 오염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기업들에게 그들 스스로 자체 수질정화 기준을 수립했다며 크게 치하했다. 유타 주지사는 ‘5백 70만 에이커의 땅을 야생 그대로 보호하겠다’고 한 주민들과의 약속을 번복했다. 워싱턴 주는 중요한 토지이용 규제방침을 완화하고 전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토지수용법을 통과시켰다. 와이오밍 주도 멸종위기 동물인 늑대가 옐로스톤 공원에 다시 출현하자 이를 잡기 위해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환경보호법이 꼼짝 못하는 곳은 미국 연방의회뿐이 아니다. 서부지역, 특히 로키산맥 서쪽지역에서 상업주의에 물든,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큰 재산권 보호론자들과 손을 잡은 입법가와 주지사들은 모두 미국의 천연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기존 법규를 말살시키고 있다.
우리는 레이건 대통령 초기시절 네바다에서 일어났던 반란보다도 더 불길한 반란을 지금 겪고 있다. 이 반란은 공공토지를 보호하려는 연방정부의 규범을 무시하며 자기들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 반란에 가담한 사람은 탄광업자, 목재업자, 개발주의자, 대농림가, 그리고 환경보호법의 약화로 이득을 보게 될 사람들이다.
기초적인 환경보호 문제를 둘러싼 서부지역의 전쟁과 의회의 전쟁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런 싸움은 모두 대규모 사업 때문에 발생하거나 조절된다. 둘째, 이들의 주장은 모두 거대한 연방정부로부터 ‘약자’를 보호하자는 식의 주장으로 치장되어 있다. 셋째, 이 약자들의 존재는 정작 엉터리 법률이 만들어질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주장의 대부분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무시되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은 보다 깨끗한 환경과 보다 건강한 사회를 뜻하는 환경보호를 선호하는 것으로 여론조사는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의회와 서부의 의회 지지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몬타나와 아이다호의 경우는 특히 서글픈 사례다. 시민들의 불평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염도가 높은 폐기물을 강과 호수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2개의 법안이 몬타나 주의회를 통과했다. 이 두 법안은 약간 주저하던 주지사에 의해 결국 서명됐다. 금광개발 허가를 얻으려는 크라운 버트사와 캐나다에 있는 모(母)기업 노란다사를 포함한 탄광업계의 로비스트들은 의회 회기 동안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들은 지질학적으로 불안정한 땅에 금광건설 허가권을 따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이 광산은 몬타나 주에 자연상태로 남아 있는 중요한 강줄기들에 영원히 오염물질을 배출할지도 모른다.
아이다호 주민들은 위기에 처한 스네이크 강의 연어 이외에도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다. 새 법안에 따르면 수질기준은 하천자문 그룹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그룹들은 대지주와 목재회사, 광산회사, 영농기업의 대표 등 규제 기준을 더욱 완화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아이다호 출신 공화당 의원인 더크 캠손이 연어에 대해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부여하고 있는 멸종동물보호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상원을 선동하고 있다. 만일 캠손 의원이 워싱턴에서 보이스에 이르는 지역의 위기동물을 보호한다는 말을 다시 정의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연어에 대한 작별인사가 될 것이고 그 뒤를 회색곰과 늑대가 따를 것이다.
물론 명예로운 예외도 있다. 예를 들어 콜로라도 주에서는 목장주와 환경보호론자, 주정부 공무원들이 비(非)파괴적인 초지법(草地法)에 동의했다. 이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주 내무장관인 부르스 바비트는 6~7차례나 돌아다니느라 지쳐버렸다.
최악의 사례는 네바다 주에서 일어났다. 네바다 주 니에 카운티의 공무원들은 연방정부의 공공용지에 대해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규칙을 통과시키면서 연방정부 직원들에게 물리적 협박까지 자행했다. 법무부는 연방정부의 관할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미 니에 카운티의 반란은 동조자들을 고무시켜 서부지역의 70여개 카운티에서 공공용지 ‘환수법’을 통과시키거나 제안하게 만들었다.
개인주의와 주정부의 권리를 따질 때 잊기 쉬운 것 가운데 하나는 기초적인 법적 사실이다. 서부지역의 공공용지는 한번도 주정부의 소유였던 적이 없다. 그 토지들은 모든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연방정부가 조약, 정복 또는 매입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잊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도 엄청난 아이러니다. 서부의 목장주들은 전통적으로 연방정부의 혜택을 받아 사업을 키워왔다. 지금 그들은 워싱턴에 대항해 벌이고 있는 전쟁에서 그들에게 풍부한 보조금을 제공하고 변덕스러운 시장경제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었던 바로 그 손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서부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고 있다. 개발로부터 공공용지와 숲을 보호하는 것이 더 큰 국가이익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의회에서 새로운 반란을 조장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수로 정화와 습지 보전, 감소되는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20여년의 투쟁을 무시하려는 주의원들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국가를 위하는 척하는 작위적인 모습을 버린, 진짜 국가를 위하는 의회라면 환경의 적대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상황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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