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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만큼 재미있는 마이너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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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나 국가 대항전 정도만 보던 우리 가족이 야구를 즐기기 시작한 건 10살짜리 아들 때문이다. 7살무렵 야구에 빠져들더니 좋아하는 팀의 한 시즌 모든 경기 결과를 줄줄 외울 정도였다. 이민가방에 가장 먼저 챙긴 것도 글러브와 공이었다. 버킷 리스트는 본 고장 야구를 경험하는 것. 유소년 리그가 시작될 3월만 손꼽아 기다리며, 일단직관부터 하기로 했다.

눈뜨면 캐치볼. 시차 적응 탓에 아침 5시면 눈이 떠지던 시기였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미국 내 10위권. 대학과 기업 연구소가 밀집한 리서치트라이앵글을 중심으로 인구 1000만 명을 돌파하며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지역 내 스포츠 열기도 상당하다. 그런데 메이저리그 야구팀이 없다. (코로나로 MLB가 중단 됐을 때 노스캐롤라이나(NC) 주민들이 KBO를 보며 NC다이노스를 응원한 일화가 유명하다.)

차선책은 마이너리그. 20여분 거리에 템파베이 레이스 산하 트리플A팀인 더럼 불스(Durham Bulls)가 있다. 입국 일주일도 안 돼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지만 무작정 티켓부터 예매했다.

덜컥 끊어버린 티켓. 가격이 마음에 든다.

드디어 경기 당일. 경기장에 들어서자 마자 구장 직원들이 말을 건네왔다. 2회말 끝나고 어린이 이벤트가 있는데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무슨 날다람쥐 뛰기라고 하는데, 아직 미국 생활 적응도 못한 아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됐지만지금 아니면 언제 진짜 그라운드를 뛰어보겠어?’하는 생각에예스를 외쳤다. 아이는 본인이 뭘 하게 될지 걱정하느라 초반 경기에 영 집중을 못했다.

2회초가 끝나고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을 만났다. 5학년쯤 돼 보이는 미국 형들 2명이 더 와 있었다. 직원들은 커다란 보자기를 나눠주며 뒤집어쓰고 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한 미국 형이선의의 경쟁을 다짐하며 악수를 건네왔고, 아이도굿 럭으로 응수했다.

이벤트는 간단했다. 1루부터 3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것이었는데, 보자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아 이래서 날다람쥐구나바로 이해됐다. 장내 아나운서는! 뜁니다! 뜁니다!’하며 3위에서 2위로, 다시 1위로 경쟁자들을 제치고 달려가는 우리 아이 이름을 연신 큰 소리로 불러줬다. 결국 2등으로 주루를 마감했지만, 그라운드를 뛰는 것에 재미를 느꼈는지 아이는 다음에 또 하러 오고 싶다고 한다.

날다람쥐 출격. 정리 중인 모래 바닥이 아닌 잔디로만 달려야 한다.
경기장을 뛰는 날다람쥐들. 맨 뒤의 녹색이 미국 땅을 밟은 지 9일 된 코리안 날다람쥐이다.

마이너리그 경기는 지역 친화적이고 아기자기하다. 관중들은 모두 일방적으로 홈팀만 응원한다. 1루석도 3루석도 외야석도 싹 다 홈팀 차지. 마이너리그 경기까지 보러 비행기를 타고 올 원정 팬은 없다. 홈 팬들을 위한 이벤트는 매 이닝마다 열린다. 1회초엔 어떤 여자 아이가 3루에서 홈까지 뛰기도 했고, 3회말엔 아이들이 무리로 응원 단상에 올라가 YMCA 춤을 추기도 했다. 백팩을 커다란 통에 던져 넣는다든지, 고무줄로 묶은 타이어를 몸에 쓰고 줄다리기를 한다든지 어른들을 위한 게임 이벤트도 많았다. 경기장 내 모두가 한 마음이 된다. 이게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미국 치고는 아담한 규모의 경기장에서 팬들은 쉽게 더그 아웃까지 다가갈 수 있다. 나이 지긋한 팬들은 선수들을 막냇동생이나 조카처럼 응원하며, 쑥쑥 성장해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기를 기원한다. 선수들은 다가오는 팬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거나 사인 요청에 응해준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블록버스터급이다. 대형 전광판을 이용해 관중들과 퀴즈 등 게임을 하거나, 구단 셔츠를 관중석에 쏴대며 물량 공세를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 광고와 결합돼 상업적인 느낌이 강하다. 마이너리그처럼 경기 도중 선수들이 뛰는 잔디를 밟는다는 건 상상 못할 일이기도 하다.

뉴욕 메츠의 경기 후 불꽃놀이 이벤트. 선수들이 직접 선곡한 음악과 함께 10분간 화려한 불꽃이 시티필드와 뉴욕의 하늘을 밝힌다.
메이저리그 티켓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16달러짜리 ‘가성비’ 관중석의 시야. 멀긴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주차비 40달러 별도.

마이너리그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집중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순간, 고요해지는 경기장. 투수의 공이 포수 미트에 팡팡 꽂히는 소리, 방망이로 따악 때리는 타구음. 그걸 잡아내는 야수의 달리는 소리까지 들린다. 이렇게 경기 자체에 집중해본 경험은 한국 야구장에서도 없었다.

20달러짜리 관중석 시야. 과장을 좀 많이 보태자면 선수들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이다.

한 경기 직관만으로 아이는 더럼 불스의 팬이 되었다. 아침을 먹으며 TV 뉴스에서 나오는 경기 결과를 보며 등굣길 희비가 교차하곤 한다. 더럼 불스가 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패배하자 그날은 본인이 응원하는 KBO 팀이 졌을 때만큼 실망하기도 했다. 더럼 불스는 매년 시즌 도중인 6월과 7월에 세 차례 어린이들을 위한 캠프를 여는데, 선수들이 직접 기초적인 기술도 알려주고 캐치볼도 해준다고 한다. 이 캠프가 미국에서의 1년 간의 야구 추억을 마무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