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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시세끼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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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년살이를 시작하면서 나름 아내와 역할 분담을 했습니다. 아이 학교와 숙제 점검 등은 아내가, 청소와 빨래 등은 함께, 대신 식사는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에 음식을 담당하게 된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직장 때문에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으로 종종 역 출장을 다녀야 했거든요. 엄마 없이 남아 있을 아이를 제가 챙겨야 했으니 아예 서로 할 일을 이렇게 나눠버린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고 사흘 뒤쯤이었던 것 같네요. 어른은 제육볶음, 아이는 나름의 오일 파스타. 아직 밥솥도 제대로 못 갖춘 시절이라 밥은 간단히 햇반으로.

고등학교 3년 하숙, 대학 졸업부터 결혼 전까지 줄곧 자취 생활. 이 정도 구력이면 세 가족 굶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다소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한 끼 한 끼 준비하는 게 정말 고되고 힘들더군요. 요리하면서 하도 한숨을 내뱉어 보다 못한 아내가 긴급 지원에 나선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요. 아래는 지난 다섯 달 저의 고군분투기입니다. 요리 초보자의 좌충우돌 노하우 정리와 엄살 정도로 여기시는 것은 좋지만, 진지한 레시피로 받아들이면 참 곤란합니다.

1.신이 준 선물 간장

간장 소스를 활용한 간식. 왼쪽은 닭봉 간장 조림이고요.오른쪽은….당초 궁중 떡볶이를 시도한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달라 당황했지만 아이는 잘 먹어주었습니다.

간장이 우리 요리에, 특히 아이 식사에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지 미처 몰랐네요. 간장 두 스푼, 미림 한 스푼, 다진 마늘 반 스푼, 참기름, 올리고당이나 매실청 반스푼, 물 반 컵으로 기본 양념 소스를 만들어 둔 뒤 여러모로 다양하게 써먹었습니다. 닭날개, 닭봉 간장 조림, 간장 떡볶이, 차슈 덮밥, 닭 계란 볶음밥, 돼지 갈비 구이 등등 무궁 무진합니다. 대부분 간장 소스에는 양파가 잘 어울리는데, 아이를 위해 매운 고추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맛나게 즐겼습니다.

2.지금 중국에 가장 감사한 건 굴소스

굴소스를 넣은 짜장면과 해물 볶음 우동입니다. 처음에는 중국산을 쓰다가 요즘에는 국내업체의 소스를 쓰고 있습니다.

각종 볶음 요리에 정말 요긴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먼저 짜장 소스. 짜장 분말이 살짝 감칠맛이 떨어지는 데 굴소스를 적당량 넣으면 맛이 확 살아납니다. 여기에 참치 계란 볶음밥, 닭고기 계란 볶음밥 등 각종 볶음밥에는 소량으로 풍미만 풍깁니다.  다만 해물 볶음 우동을 만들 때는 양을 조금 더하는데, 제 입맛에는 잘 맞았습니다. 청경채 볶음에도 으뜸 소스입니다. 청경채 볶음에는 전분가루를 물에 조금 타서 첨가하면 정말 중국식당에서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3.미국 소고기 활용법

소고기 튀김과 불고기입니다. 한두 달 정도는 ‘미국 소고기‘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인데, 저는 미국 소고기는 모두 싸고 맛있는 줄 알았습니다. 식당에서 돈 주고 사 먹는 스테이크는 참 비싸고 꿀 맛이던데, 마트에서 직접 사 내가 구운 스테이크는 왜 이러나 싶었습니다. 기름기가 많은 소고기는 그래도 먹을만했지만, 대부분 저희 가족 입맛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극적으로! 한인 마트에서 작은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먼저, 와규살입니다. 구워서 먹어도 입에 짝짝 붙었고요. 또 가끔 돈가스처럼 튀겨주면 아이가 엄지척, 밥 한 공기 뚝딱이었습니다. (어제는 대차게 퇴짜를 맞기는 했습니다만… ) 처음에는 튀김 옷을 못 만들어 엉망진창이었던 것이 이제는 먹어줄 만은 합니다. 와규살 외에 우삼겹도 즐겨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차돌박이로 생각하시면 되고, 정작 차돌박이라는 이름을 걸고 파는 소고기는 고기가 두꺼워 불고기용이나 미역국에 넣어 사용합니다.

다섯 달 정도 가족의 식사를 담당하면서 나름 몇 가지 원칙도 세웠습니다.

A. 30분 이상 걸리는 요리는 하지 않는다.

요리라는 것이 참 오묘해서, 만드는 사람이 짜증이 나고 귀찮으면 아무리 으뜸 재료를 쓰더라도 제맛이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30분 이상 걸리는 작품은 가급적 시도 하지 않는다. 물론 제 기준입니다만, 저는 30분이 넘어가면 슬슬 힘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음식 간도 제대로 안 보게 되고요. 그래서 가장 힘이 나고 열정이 넘치는 30분 안에 가급적 마치려 합니다. 제가 만드는 음식이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기에 너무 품을 들이다 보면 주방장도,기다리는 손님도 모두 지쳐 버리기 일쑤입니다.

B.음식에 영혼까지 갈아 넣지는 말자.

연수 초기에 시도했던 소갈비찜과 소꼬리 곰탕. 이제 이런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초반에 탄력이 붙었다고 생각해 영혼을 갈아 넣을 만한 음식들에 도전해 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 그릇에 족히 이삼만 원이나 하는 소꼬리 곰탕. 이곳 한인 마트에서는 무척 싼 가격에 소꼬리를 팔더군요.

그래 내친 김에 한 번 꼬리곰탕 달려보자 했습니다. 물에 담가 피 빼고, 초벌로 삶고, 다시 두세 시간 끓이고….맛은 있었는데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자괴감만 들었습니다. 꼬리곰탕 뿐 아니라 돼지갈비찜이나 소갈비 찜도 품이 엄청 듭니다. 족히 반나절 이상은 잡아야 합니다. 초보 요리사가 영혼을 갈아 넣어봤자, 모두가 힘들 뿐 기대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한다는 결론만 얻었습니다.

C.가끔은 죄책감 없이 마트의 도움을 받자.

삼시세끼 잘 챙겨 먹는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문득문득 깨닫는 요즘이지만 가끔은 문명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집 근처 가장 가깝다고 할 마트인 트레이더 조에서 파는 냉동식품은 정말 일품입니다. LA하면 LA 갈비지요, 트레이더조의 냉동 LA갈비는 웬만한 한인식당에 비길만하고요, 치킨 류도 아이 간식으로 꽤나 잘 써먹고 있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크랩은 데우기만 하면 되고요. 오른쪽은 동태찌개인데, 한인마트에서 끓이기만 되는 것을 사서 미나리를 넣고 양념만 다시 했습니다.

또 WHOLE FOOD에서 파는 조각 피자나, 크랩, 랍스터 테일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태평양이 크랩이 유명해서 이미 익힌 뒤 얼려 판매하는데 집에서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버터와 올리브유로 한번 정도 튀기듯 굽습니다.

여기에 우동 사발면도 요리에 실패하거나, 아이가 밥상을 거부할 경우 응급용으로 가끔 투입합니다. 앞으로 인생 쓴맛 단맛 다 볼 텐데, 이 정도 사발면 한 그릇쯤이야 하면서요. 더군다나 내 음식보다 맛나게 먹는다면야 한 끼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마트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간단히 설명을 드리면, 트레이더 조는 자체 생산 제품이 많고요. 와인도 꽤 싼 편입니다. 훌푸드는 유기농 제품이 많습니다, 제 눈에는 다 같아 보이고 비타민을 포함해 영양제를 사거나, 아이에게 피자 한 조각 먹이고 싶을 때 주로 찾습니다. 타겟도 가끔 들릅니다. 여기는 아이 문구와 스포츠 용품도 함께 팔아 다목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럼에도 큰 장을 볼 때는 주로 한남체인이나 H 마트 등 한인마트를 찾게 됩니다.

평소 잘 먹고 잘 살자가 신조라면 신조인데, 지금까지는 투박한 아빠표 음식에 가족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자, 연수생 여러분, 여러분의 오늘 한 끼도 모두 무사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