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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우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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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평생의 짐이었다. 대학 입학과 졸업, 입사를 위해 억지로 시험 점수를 만들고 한때는 새벽 시간에 회화 학원까지 다녀봤으나 영어는 도통 입에 붙지 않았다. 연수를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 토익 기출문제를 훑고 유명 강사들의 유튜브 강의를 섭렵하며 ‘기술적으로’ 나름 고득점을 만들었지만 그게 어디 실전과 같은가.

이 기회에 영어 콤플렉스를 털어버리자! 그런 각오로 초기 정착 작업을 마무리하자마자 ESOL(English for Speakers of Other Language) 과정에 등록했다. 명색이 대학 방문연구원인데 ESOL 수업을 듣는다는 게 민망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체면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미국살이 1년에도 영어 울렁증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게 더 문제일 테니.

밸런타인 데이를 맞아 6개 클래스의 합동 수업 중인 진행 중인 모습. Beginner 클래스 학생들은 간단한 영어 인사말 정도만 할 줄 아는 수준이다.

ESOL 클래스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 전학을 위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청을 방문했더니 한국계 직원이 친절하게 성인 ESOL 프로그램을 안내해줬다. 주로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료 코스와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유료 코스로 나뉘었는데 큰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다. 유료라 해도 비용이 크게 비싸지는 않는 데다 무료 코스와 달리 주 5일의 집중 수련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페어팩스카운티의 경우는 ‘하루 3시간 × 주 5일 × 10주 = 총 150시간’의 수업료가 약 330$(교재 포함)에 불과했다. 클래스는 평가를 통해 여섯 등급으로 나누기 때문에 비슷한 수준의 학생끼리 수업을 듣게 된다. 카운티 내에서 여러 센터를 운영하는데 가장 가까운 곳은 15분 거리였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효과는 분명했다. 우선 한국에서 접할 기회가 없던 미국의 입말을 배운다는 것은 물론, 언어뿐 아니라 미국 문화에 대한 현장감 있는 학습이 가능했다. 핼러윈이나 연말, 밸런타인데이 등이 실제 미국에서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는 ESOL 클래스와 아이들 학교 행사를 통해 십분 체감할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 유용한 점은 좋든 싫든 하루 3시간씩은 꼬박 영어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게 된다는 점이었다. 많은 연수자가 경험했겠지만 버지니아주, 조지아주, 캘리포니아주 등은 한인 사회가 발달해 있어 작정하면 영어를 쓰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집과 자동차는 한인 중개인을 통하고, 면허 발급, 은행 계좌 개설, 전기 및 수도 설치도 모두 한인 직원을 통하거나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해 미국 연방 센서스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L.A.의 경우 한인 가구의 43%가 영어 제한 가구라고 한다. 한인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상태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다.

ESOL 클래스 수료식 파티를 위해 학생들이 각자 준비해온 여러 문화권의 음식들. 왼쪽 아래 김밥도 보인다.

다른 언어권 출신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ESOL 학생들을 보면 미국에 온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느지막이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센터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란 출신 50대 남성은 미국 생활 12년 차에 초급 코스를 밟고 있었다. 생활에는 불편이 없지만 좀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영어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이유였다.

중남미 출신들은 더한 듯하다. 미국 인구 중 13%가 히스패닉계라고 하는데 중부 지역은 이민자 비중이 미미한 점을 고려하면 동·서부 대도시의 히스패닉 비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다. 플로리다 여행 도중 한 맥도날드 매장에 들렸더니 주방에서는 직원들이 모두 스페인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오직 계산대를 맡은 히스패닉계 직원만이 때때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굳이 영어를 갈고닦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민자들도, 또 그런 사람들이 못마땅한 기성 영어사용자들도.

워싱턴 D.C.의 한 건물 주차장에 붙어 있는 안내문. 공공기관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이처럼 스페인어가 병기된 안내문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 가을학기에 이어 겨울학기까지 등록하면서 다음 달이면 총 300시간 가까이 ESOL 수업을 받은 게 된다. 문법과 읽기는 기존의 공부를 복습한 수준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고, 여전히 어렵지만 내가 하고픈 말을 전보다는 좀 더 빠르게 문장으로 만들어내게 됐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한국식 억양도 제법 고쳐졌다. 여기에 한 번도 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먼 나라의 친구들을 여럿 사귄 것은 덤이다. 이 지역 연수를 계획하는 분들이 계신다면 교육청 ESOL 프로그램을 한번 고려해 보시길 적극 추천드린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청 ESOL 홈페이지:
https://www.fcps.edu/academics/adult-education-academics/esol-class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