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정치인에 친절한(?) 일본인

by



얼마 전 일본 TV를 보고 있는데 한국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의 명문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도쿄돔에 나타났다. 그것도 관중석이 아닌 그라운드에 말이다. 일본의 전설적 야구 감독으로 불리는 나가시마 시게오(77) 前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 타자석에 섰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출신으로 뉴욕 양키즈에서 뛰었던 마쓰이 히데키(39) 전 선수가 투수 마운드에 섰다. 시투와 시타를 하기 위해서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서는 역사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는 주심자리에 서서 시투와 시타의 심판을 본 후 그라운드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이날 행사는 나가시마 감독과 마쓰이 전 선수에게 ‘국민 영예상’을 시상하기 위해 열렸다. 이 상은 스포츠계나 연예계 등을 대상으로 일본에 기여한 공로가 큰 사람에게 정부가 주는 보상이며, 보통 총리관저에서 시상식이 열려왔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관례를 깨고 직접 그라운드로 발걸음해 전국에 중계되는 가운데 이 상을 전달하며 ‘친근한 이웃 아저씨’이미지를 높였다.





당초 이 상의 수상자로 나가시마 감독과 마쓰이 전 선수가 선정됐을 때부터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나가시마 감독이야 전설도 통하는 사람이니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마쓰이 전 선수는 나이도 젊을뿐더러 그를 뛰어넘는 성적을 올린 선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쓰이 전 선수를 수장자로 선정한 데 대해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젊은층을 겨냥한 정치적 포석이라는 분석도 많았다.



 



아베 총리의 행보는 요즘 이렇다. 대외적으로는 역사인식, 헌법 96조 개정, 영토문제 등을 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한국·중국과 대립하는 강경한 자세이지만, 대내적으로는 7월 참의원 선거를 겨냥한 ‘친절한 이웃아저씨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갈등이 좀 있더라도 대내적으로는 친근한 이미지와 아베노믹스 등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다가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헌법개정을 비롯해 자신이 목표했던 ‘우익 정책’을 이뤄내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의 일환인지 최근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주부를 주 시청층으로 하는 아침 정보 TV프로그램에 직접 출현해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재미있는 몸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전략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내고 있는지, 주변국과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일본내에서 아베 총리의 이미지와 지지율은 좋다. 일본 국민이 자신들의 총리를 좋아한다는 데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생활하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높은 데 정작 일반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번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 역사인식 문제에 따른 대외갈등, 정치상황 등에 대해 예상외로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정치상황, 역사인식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데 아베 총리의 지지율과 이미지는 좋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얼마 전 한 일본인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 줬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인데,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너무 무관심 합니다. 그러니 이미지의 대세에 따라 지지율이 흘러가기도 하고…,정치 선진국들은 국민의 관심을 바탕으로 정치인을 견제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데 이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봐요. 일본은 국민들이 무관심하니 정치인들이 큰 견제를 안받는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일본 정치인에게는 국민들이 매우 친절(?)하게 비춰질 지도 모르죠. 무관심한 국민 덕분에 견제 덜 받고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말이죠.” 일본 정치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교수이긴 했지만 국민들의 무관심이 꽤나 걱정됐던 모양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이나 선진국들이 모두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다고 느끼는 듯 하다.한국에서는 술자리가 있을 때 의례 정치 얘기가 중요한 화제 중 하나라고 얘기하면 깜짝 놀라며 그런 정치적 관심이 부럽다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 심지어는 한국의 시위조차도 부럽다는 일본인 교수도 있었다. 시위가 많다는 것 자체가 정치에 관심이 있고 참여의 의지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 문제가 터지면 한국은 전 국민이 분노하고 부글거리지만 일본국민들은 우리처럼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 입장이어서 그런 경향도 있겠지만 현대사 교육이 부족하고 정지적으로 무관심한 탓인지 ‘야스쿠니 신사가 왜 그렇게 큰 문제’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도쿄 시민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물으면 ‘봄 철 벚꽃 개화의 기준 (야스쿠니의 나무에서 벚꽃이 피면 도쿄의 `공식 벚꽃 개화’로 발표하고 이를 현장에서 직접 방송하기도 한다)’의 의미가 더 대중적이다.





일본인의 정치적 무관심의 원인은 무엇일까. 부족한 현대사 교육을 비롯해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일본인 교수가 한국과 비교하며 해준 얘기가 재밌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에서 국민들이 독재정권과 싸워서 쟁취한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국민들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도 관심이 높겠죠. 그런데 일본에게 민주주의란 근대화를 거치면서 정치제도로서 도입했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서양의 것을 제도로서 도입했다는 의미가 강하니 일반 국민의 관심도 덜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서 얘기한 도쿄돔 행사에서 아베 총리는 헌법 96조를 연상시키는 ‘96’을 등번호로 달고 그라운드에 섰다.아베 총리는 그 배경에 대해 본인이 96대 총리여서 그 번호를 달았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아직 충분치 성숙치 않아서…’ 라는 말도 남겼다.





아베 총리가 어떻게 헌법 96조 개정 전략을 추진해 나갈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스로 헌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다니겠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는 ‘이미지 정치’ 행보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