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글로벌 통화전쟁과 한국의 대응 전략

by
@

연수보고서 다운로드
글로벌 통화전쟁과 한국의 대응 전략 연합뉴스 차장 조재영 연수기관: 조지메이슨대



I. 들어가며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뿐이다”(S&P)
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하면서 세계는 전인미답의 길로 들어섰다. 1973년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 후 43년 만이다. 브렉시트(Brexitㆍ영국의 EU탈퇴) 투표 전과 후의 유럽은 더 이상 같은 유럽이 아니다. 영국은 프랑스, 독일과 함께 EU를 지탱해온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다. 영국의 탈퇴 결정으로 EU는 존립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됐다. 프랑스와 체코, 그리스 등에서도 탈퇴 여론이 힘을 받으며 ‘도미노 탈퇴’가 우려된다. 영국 내부는 사분오열 양상이다. EU 잔류를 희망한 영연방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독립 가능성도 거론된다.

영국의 EU 탈퇴 후폭풍은 정치적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글로벌 통화질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선 달러화와 엔화, 파운드화로 대변되는 글로벌 기축 통화 지형에 변화가 예상된다. 브렉시트 쇼크로 가치가 급락한 파운드화는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로서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파운드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달러화에 기축통화 자리를 내준 후 다시 한번 입지가 크게 흔들리는 ‘굴욕’을 겪게 된다.

주요국간 ‘돈 풀기’ 경쟁도 재연될 조짐이다. 이른바 ‘통화전쟁’이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영국의 EU 탈퇴 투표 결과 이후 앞다퉈 유동성 공급 의사를 밝히며 공조의사를 천명했다. 하지만, 국제공조는 자국의 실리 앞에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특히 달러를 대량으로 푼 뒤 달러화 약세를 유도해 수출을 늘리고 대외 빚을 줄이는 것은 미국이 위기 때마다 자주 사용해오던 방법이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로 달러가 기축통화 자리를 물려받은 후 미국은 이런 비상처방을 통해 수 차례 통화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가장 최근의 통화전쟁 사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다.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6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약 4조 달러를 풀었다. 미국의 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자 유럽, 일본 등도 가세해 ‘각자도생’식 돈 풀기 경쟁에 가세했다. 자국의 경기를 살리려는 이 같은 움직임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당장 브렉시트 여파로 유럽중앙은행(ECB)이 양적완화 기간을 연장하고 유동성 공급을 늘릴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 경우 유로화와 파운드화의 동반 약세가 심화할 수 있다.

반면, 투자심리가 안전자산으로 쏠리면 엔화와 달러화 가치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달러화와 엔화 강세는 수출을 늘려 경기회복에 힘써야 할 미국과 일본에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금리 정상화 작업’의 속도를 더 늦출 수 있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작년 말 한차례 기준금리를 올린 후 추가 금리 인상 기회를 봐왔다. 그런 와중에 브렉시트라는 대형 악재를 만나면서 당분간 추가 금리 인상은 어려울 전망이다. 아예 방향키를 틀어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온다.

일본도 추가 완화에 나설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본 정부가 3년 넘게 추진해온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는 현재 ‘도루묵’이 될 위기에 처했다. 세계적인 경제 불안정 속에 투자자금이 안전자산으로 몰리면서 엔고 역풍이 불고 있어서다. 무제한 양적완화로 엔화 약세를 유도해 주요 수출 대기업의 실적을 끌어올리고,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아베노믹스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각국이 자국 경제를 살리려고 돈을 풀거나 금리를 낮추기 시작하면 통화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이 때 통화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수출이 늘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상대국의 국제수지에는 악영향을 끼친다. 양적완화를 ‘이웃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정책(근린궁핍화정책·Beggar-thy-neighbor policy)’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런데도 각국의 중앙은행이 윤전기를 돌려 시중에 돈을 푸는 것은 손쉽게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경제가 붕괴위험에 처하거나 신용경색 위기에 빠졌을 때 이런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적완화는 ‘독이 든 사과’와 같다. 겉으로는 맛있고 당장의 허기를 달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들이 경기 부양을 목적으로 저마다 통화가치 절하에 매달린다면 국제 경제에서 모두가 패자가 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양적완화를 통한 통화전쟁의 더 큰 문제는 한국과 같은 주변국이 ‘고래 싸움’에 등 터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때 뿌려진 달러는 미국 경제 회복에는 도움이 됐다. 그러나 많은 자금이 한국 등 상대적으로 성장세가 높은 신흥국으로 흘러 들어와 거품을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양적완화가 종료되면 이런 자금들은 한바탕 빠져나가 신흥국 금융시장을 뒤흔들어놓을 것이 뻔하다.

이 보고서는 브렉시트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주요국간 통화전쟁 재개 가능성을 살펴보고 한국의 대응전략을 모색해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과거 주요 통화전쟁 사례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양적완화 정책을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II. 본문

1.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통화전쟁

통화전쟁 (currency war)은 주요 국가들이 자국의 통화가치를 가급적 약세로 만들어 수출 가격을 떨어뜨린 뒤 수출을 늘리고 경기를 부양시키려는 경쟁을 일컫는다. 대체로 달러화, 유로화, 엔화 등 국제적으로 잘 통용되는 화폐를 보유한 국가가 금리를 낮추거나 자의적으로 돈을 마구 찍어내 시중에 직접 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치열함과 폐해가 실제 영토전쟁 못지않아 ‘총성 없는 경제 전쟁’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통화전쟁이 종종 ‘환율전쟁’, ‘화폐전쟁’이라는 용어와 혼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주요국들이 ‘통화전쟁’을 하면 주변국들이 종속적으로 ‘환율전쟁’에 끌려드는 양상을 보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세계적으로 통화전쟁은 ▶ 1930년대 대공황 시기 1차 통화전쟁(1921~36년) ▶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2차 통화전쟁(1967~87년) ▶ 플라자합의로 촉발된 3차 환율전쟁 (1985~ 1995) ▶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4차 환율전쟁(2008~)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먼저 1930년대 대공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대공황이 닥치자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미국 역시 1933년 외국과의 금환본위제도는 유지했지만, 국내의 금태환은 금지했다. 이 때문에 영국 파운드화와 미국 달러는 금본위제 국가들 통화에 비해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 시기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4년 초 인위적으로 금 가격을 올려 상대적으로 달러를 대폭 평가절하했다. 게다가 금은복본위제였던 미국은 국제시장에서 은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시작해 화폐량을 늘려나갔다. 이로써 국제시장의 은 가격을 폭등시켜 은본위제 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이 통에 중국은 은본위제를 포기하면서 혼란에 빠져 공산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것이 환율전쟁의 시작이었다. (홍익희, 『환율전쟁 이야기』)

영국은 대공황의 한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금본위제의 핵심국가인 영국이 금본위제 포기와 파운드화 평가 절하에 나서고, 미국과 프랑스까지 평가절하에 동참하면서 세계 통화시스템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진다. 당시 이런 자국 통화가치의 평가절하 움직임은 보호무역주의와 맞물려 세계 무역량을 급감시켰고, 모든 나라의 수출이 줄면서 실업이 급증했다. 결국 “승자는 없고 모두 패자인 전쟁”으로 평가된다.

한때 전 세계를 주름잡던 영국의 파운드화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슈퍼파워로 떠오른 미국의 달러화에 기축통화 자리를 내준다. 특히 2차 대전 중인 1944년에 출범한 브레턴우즈 체제는 파운드화의 기축통화 시대를 마감하는 계기가 됐다.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금 1온스는 35달러로 고정됐고, 세계 각국의 통화가치는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고정환율제)됐다.

2차 통화전쟁의 시발은 1960년부터다. 베트남 파병 등 천문학적인 군비가 들어가면서 미국의 재정적자가 심화됐고, 결국 미국 정부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근간이 되는 금태환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보유한 달러를 미국에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해왔다. 특히 1971년 5월 영국이 미국에 30억 달러의 금태환을 요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닉슨 정부는 1971년 8월 15일 달러를 금으로 더는 바꿔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44년부터 1971년까지 세계 경제의 흐름을 지배해온 브레튼우즈 체제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금환본위제를 포기하면서 달러 발행은 급증했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달러가치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미국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급격히 높아졌다. 바로 2차 통화전쟁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 곧 쌍둥이 적자가 심해지자 또 한번 통화전쟁에 나선다.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1985년 9월 뉴욕 맨해튼 플라자호텔로 각국의 재무장관을 불렀다. 일본의 엔화가 너무 저평가돼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고 있으니 엔화강세를 유도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 것이다. 베이커의 압박에 각국 재무장관들은 달러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이 합의로 미국은 엔화와 마르크화를 대폭 절상시켰다. 닉슨이 일방적으로 금본위제 폐기를 선언 뒤 14년만의 일이다. 이 합의에 따라 달러화가 가치는 1985년 9월 달러당 237엔에서 1988년 1월 127엔까지 하락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도 사실상 이때부터 싹텄다는 분석이 많다.


2.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의 양적완화

최근의 통화전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은 주택가격 폭락으로 초래된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대량으로 달러 풀기에 나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연준·Fed)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달러를 수혈하는 긴급 처방을 단행했다. 이른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QE) 조치다. 양적완화란 기준금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금리인하를 통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국채매입 등을 통해 유동성을 시중에 직접 푸는 정책을 말한다. 미 연준은 금융위기 이후 기준금리를 0~0.25%로 이미 낮춘 탓에 추가 금리 정책을 쓸 수 없게 되자 양적완화 카드를 꺼냈다.



<표>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 통화정책의 변화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 통화정책의 변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정책금리 제로(0∼0.25%)수준으로 인하
2008년12월∼2010년3월 1차 양적완화(1조7천500억 달러 채권 매입)
2010년11월∼2011년6월 2차 양적완화(6천억달러 장기국채 매입)
2011년9월∼2012년6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6천670억달러 규모 단기 국채 매각, 같은 규모의 장기국채 매입)
2012년9월∼2013년12월 3차 양적완화(매달 850억달러 규모 채권 매입)
2014년 1월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 시작
2014년 10월 양적완화 종료

당시 양적완화는 1차, 2차, 3차로 약 6년간 진행됐다. 연준은 이 기간 모기지 담보부채권(MBS)과 국채 등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달러를 공급했다. 장기 금리 인하를 유도해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하고 얼어붙은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로 인해 1조 달러 수준이던 연준의 자산은 4조5천억 달러 규모로 늘어났다.

3차 양적 완화는 2014년 10월 31일에서야 종료됐다. 미 경제가 더 이상 외부 수혈 없이도 회복세를 지속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2008년 말 10%를 웃돌던 실업률은 2014년 9월 5.9%로 하락, 금융위기 직전 수준을 회복했다. 2014년 2분기에는 4.6%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미국은 경기 회복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인플레이션과 자산 버블을 막기 위해 0∼0.25%인 초저금리를 정상화하는 작업에도 들어갔다. 그 첫 조치가 2015년 12월 16일 기준금리를 0.0∼0.25%에서 0.25∼0.50%로 올린 것이다. 2006년 이후 9년 반 만에 이뤄진 금리인상이었다.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 여부를 결정할 때 주로 참고하는 양대 지표는 고용과 물가다. 고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표는 실업률이다. 연준은 금리인상 요건으로 실업률 5%와 물가상승률 2%를 제시해왔다. 미국에서 실업률 5%는 완전고용 수준으로 본다. 완전고용은 노동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모두 고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완전고용 상황이 되면 기업과 소비자들이 투자와 지출을 늘리면서 경기가 과열 조짐을 보인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은 상품 가격을 인상하고 근로자들은 높은 임금을 요구하며 인플레이션이 시작된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실업률에 따라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다. 금리를 올리면 사람들은 저축을 늘리고, 기업들은 투자를 자제해 경기 과열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이 처음 금리를 올릴 당시 물가상승률은 1.3%에 머물러 금리인상이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미 연준의 대표적 매파였던 리처드 피셔 전 댈러스 총재는 이렇게 설명한다. “청둥오리를 잡으려면 오리가 서있는 곳이 아니라, 날아가려는 곳으로 총을 쏴야 한다”. 경기 과열이 확인됐을 때 금리를 올리면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으니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미국은 금리 인상의 첫발자국만 뗀 뒤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점진적으로 금리를 인상할 것을 시사했던 지난해 12월 금리인상 이후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글로벌 경제와 저유가 등 대외요인 불안을 이유로 금리인상 속도를 더 늦출 것을 선언했다. 이런 기조는 올해 6월 현재까지 이어지다 브렉시트라는 대형 악재를 만났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영국의 EU탈퇴가 앞으로 18개월간 미국 경제 성장을 0.2% 포인트 깎아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내년 미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2%에서 1.8%로 낮췄다. 장기간 저성장이 예상되면서 금리 인상 기조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2018년까지 한차례 금리 인상에 그칠 가능성”(국제금융센터)에서부터 금리 인하 주장까지 나왔다.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 석좌교수는 “올해 미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경제와 금융상황이 예상보다 악화한다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다시 낮춰야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3. 주요국의 양적완화

가) 유럽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앞다퉈 금리인하와 양적완화 정책을 펼쳤다. 실물경제의 장기 침체와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응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유럽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2010년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경기가 급격히 침체했다. 그러자 ECB는 2010년 5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재정 위기국을 중심으로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럼에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물가 상승률이 0%대에 머물고 디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자 2014년 6월에는 처음으로 예치금리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했다. 올해 6월 현재 기준금리는 ‘제로(0.00%)’, 예금 금리는 마이너스 0.40% 수준이다. 여기서 마이너스 금리는 고객과 시중은행간 금리가 아니라 정책금리에 적용된다. 즉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예치할 때 적용되는 금리로,.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려면 오히려 돈을 내야 한다는 의미다. 마이너스 금리는 의무적으로 중앙은행에 예치해야 하는 지급준비금을 넘어서 예치되는 금액에만 적용된다. 시중은행들이 그 이상의 돈을 중앙은행에 맡기기보다 시장에서 대출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시중에 돈이 돌도록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마이너스 정책금리 시행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ECB는 금리인하에 따른 물가 인상 효과가 지연되자 2015년 3월부터 매달 600억 유로씩 총 1조 1천400억 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정책을 단행한다. 올해 4월에는 한발 더 나아가 월 600억 유로에서 800억 유로로 회사채 매입 규모를 확대하고 채권매입 대상에 투자적격등급 회사채를 포함했다.

나) 일본
1990년 일본 버블 붕괴는 달러의 공격에 엔화가 패배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만큼의 충격이었다.(일본 요시카와 모토마다 가나가와대 교수)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한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2012년 12월 취임한 아베 신조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천명한다. 1%였던 물가관리 목표를 2%로 높이고, 이를 달성할 때까지 무한정 돈을 풀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10년 동안 200조엔의 돈을 투입해 대형 공공사업을 추진하고, 규제완화와 법인세율 인하로 민간투자를 늘리는 성장전략이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다.

일본은행(BOJ)도 여기에 발맞춰 2013년 4월 시중 통화 공급량을 2년 안에 2배로 늘리고, 국채 매입량도 2배로 늘리는 강력한 양적완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는 무려 364조엔까지 치솟아 전체 국채 잔액의 33.9%에 달했다. 양적완화 직전 13%에서 20%포인트 이상 뛴 셈이다.

일본은행은 2016년 2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했다. 대출금리를 내려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고, 엔화가치를 끌어내려 수출을 활성화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마이너스 금리 도입 당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0엔대로 반짝 내려갔지만, 곧바로 엔고로 방향을 틀어 105엔대까지 급등했다. 세계적인 경기둔화 우려 속에 국제투자가들이 안전자산인 엔화와 일본 국채를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엔저 효과를 톡톡히 누리던 일본 수출대기업의 수익성도 악화됐다. 엔저 덕분에 4년 연속 글로벌 판매 1위에 올랐던 도요타의 주가도 수익성 악화 우려로 39개월 만에 5천엔(약 5만7천원) 밑으로 떨어졌다. 이처럼 3년 넘게 추진한 아베노믹스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이자 일본에서는 ‘아베의 실수’라는 의미의 ‘아베노미스테이크’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일본은 그러나 엔고 현상에 따른 수출 감소와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추가 금융완화나 외환시장 개입을 검토 중이다.

다) 중국
ㄱ. 중국의 위안화 기습절하··· 미-중 통화전쟁 ‘신호탄’
중국 외환당국은 2015년 8월 사흘 사이에 위안화 가치를 5% 가까이 떨어뜨리면서 세계금융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 수출 부진으로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자 위안화 약세를 통해 수출을 늘리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중국 경제는 해마다 8~9%의 높은 성장세를 보이며 세계 경제를 견인해왔지만, 지난해에는 6.9%로 주저앉았다.

중국 당국의 위안화의 기습 평가절하는 주요국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당장 미국이 발끈했다. 위안화 평가절하로 중국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강화되면 미국과의 무역 불균형이 더욱 심화될 수 있어서다. 중국에 대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안화 평가절상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오히려 위안화 가치를 끌어내린 것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중국의 위안화 절하는 글로벌 환율전쟁에서 가장 최근 나타난 공격 사례”라며 “위안화 대폭 절하로 미국의 디플레이션과 장기침체 위험이 증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위안화를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에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SDR은 IMF 회원국이 달러 유동성이 부족할 때 담보 없이 필요한 만큼 외화를 특별 인출할 수 있는 권리다.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과 비슷한 개념이다. SDR 기반 통화는 달러화와 엔화, 파운드화, 유로화 4개였다. 그런데 위안화의 세계 기축통화 지위를 노리는 중국이 위안화를 SDR에 편입시키려고 작년 8월 위안화 가치를 시장환율에 맞춰 고시하는 방식으로 위안화 환율 전략을 수정했다는 분석이다. SDR의 편입 조건은 특정통화가 전 세계에 아무런 제약 없이 거래되고, 시장 자율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져야 한다. 중국은 작년 12월 위안화를 SDR 준비통화에 편입시키는데 결국 성공했다.

ㄴ. 헤지펀드와의 ‘한판 승부
올해 초 중국 정부와 미 월가는 ‘총성 없는 전쟁’을 치렀다. 위안화 가치가 급락하자 미국 헤지펀드 업계가 향후 위안화 가치 하락에 베팅하고 나선 것이다. 헤지펀드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를 포함해 미국의 유명 투자자들이 위안화 약세 베팅에 합류했다. 소로스는 “위안화 절하가 세계 문제로 전이되고 있으며, 2008년 금융 위기를 떠올리게 한다”며 위안화 하락에 베팅하라는 여론 몰이까지 나섰다. 미국 헤지펀드인 헤이먼 캐피털 매니지먼트는 포트폴리오의 85%가량을 앞으로 3년간 위안화와 홍콩달러가 떨어지면 수익을 내는 거래에 투자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중국 정부는 이번에는 ‘환투기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위안화가 갑자기 폭락할 경우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고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뿐만 아니라 대외부채가 많은 기업의 파산으로 이어져 중국 경제의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위안화 평가 절하를 통해 경기부양을 노렸던 중국 정부도 적극적인 환율 방어로 돌아섰다. 이는 위안화 하락에 배팅한 투자자들에게 큰 손실을 안겨줬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위안화 약세에 베팅하며 중국 당국과 장기간 힘겨루기를 해온 미 월가의 헤지펀드들은 약 5억6천200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동원해 위안화 방어에 나선 중국 외환당국도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인민은행이 2015년 8월부터 최근까지 4천730억 달러(약 555조 원)를 시장 개입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2014년 6월 3조9천90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하기 시작했고 2016년 4월말 현재 3조2천197억달러까지 줄었다.

이번에는 브렉시트 후폭풍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당국은 또다시 딜레마에 놓였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안전자산 선호로 미 달러값이 뛰면서 위안화값(6월 29일 기준)은 5년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 기업의 수출경쟁력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위안화 평가절하는 반길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는 없다. 위안화 값의 급락은 자본유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8월 위안화 기습 절하 이후 연말까지 1조 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가는 ‘교훈’을 경험한 바 있다.


4.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신흥국

주요국의 통화전쟁은 그 폐해가 주변의 신흥국까지 전해진다는 점에서 ‘남의 일’이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를 살펴보자. 이 시기를 전후해 미국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푼 달러는 상당수가 신흥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 연준의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신흥국 자본 유출입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한국은행)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연준의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으로 신흥국의 자본유입이 크게 늘어났다. 이 기간 외화차입은 중국이 7천억달러가 넘었고 이어 브라질, 터키 순으로 많았다. 한국은 신흥국 가운데 외화차입 규모가 10위였지만, 주식에 유입된 자금 규모는 5위, 채권은 2위였다.

보고서는 “미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는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정상화하면 국가별 자본유출 규모가 자본 유입 규모와 비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말했다. 즉, 자금이 많이 유입된 신흥국에선 대규모 자금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사례는 과거 미국의 금리 인상기 때도 경험한 바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94년 금리인상기 때다. 미 연준은 1990년 시작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2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 17개월간 기준금리를 당시 사상 최저 수준인 3%로 유지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자 1994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년 동안 기준금리를 3.0%에서 6.0%로 3%포인트나 올렸다. 이 때문에 1993년 말 6%를 밑돌던 미국 국채 30년물의 금리는 1994년 말 8% 위로 치솟았고 채권가격이 폭락하면서 ‘채권시장의 대학살’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당시 저금리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막대한 유동성이 유입돼 주식시장의 호황을 누렸던 멕시코 등 중남미 신흥국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의 유동성 유입이 본격화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멕시코 주가는 30배 가까이, 아르헨티나 주가는 약 20배 이상 폭등했다. 그러나 금리 인상 이후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멕시코,·아르헨티나의 주가가 1년 만에 고점 대비 50% 이상 폭락하는 등 중남미 금융시장이 뿌리째 흔들렸다. 1994년 멕시코는 자금유출이 확대되면서 외환보유액이 60억 달러 수준으로 감소했다. 결국 외환위기를 맞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됐고 중남미 각국은 경제위기를 겪었다.



▶1994~1995년 정책금리 인상과 국채금리( 한국은행)

Ⅲ. 나오며

통화전쟁은 결국 자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과거 사례에서 보듯 한쪽이 이득을 얻으면 상대국은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또 통화전쟁을 일으킨 국가도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어 어떻게 보면 ‘마이너스 섬 게임’이다. 더 나아가 참전하지 않은 국가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통화전쟁은 위기 때마다 반복되는 경향을 보이다. 각국이 제 살길을 도모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속되는 통화전쟁에서 한국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주요국들이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추는 상황에서 마냥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다. 고래싸움에 등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보폭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각국이 양적완화 정책을 편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 할 수는 없다. 원화는 달러화, 엔화와 달리 기축통화가 아니어서다. 기축통화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말한다. 미국과 일본이 돈을 마구 찍어내서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것도 이들이 시중에 푼 돈을 다른 나라들이 보유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원화를 다른 국가들이 굳이 보유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한국은행이 찍어낸 돈은 고스란히 국내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인플레이션과 원화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자본유출이 발생할 수 있다. 양적완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결국 통화전쟁에 살아남기 위해 함께 참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근본 해법이 될 수 없다. 자국 통화의 국제적 위상은 결국 그 나라의 경제력에 따라 좌우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엄청난 양의 달러를 찍어내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조짐을 보이자 달러 위상은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이다. 유럽과 일본이 막대한 돈 풀기에도 여전히 경기위축과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국의 경제사정이 나아지고 경제적 불확실성이 줄어들면 화폐의 위상은 저절로 올라간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경제의 근본체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대외상황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뇌관으로 가계부채 문제가 꼽힌다. 올해 1분기말 금융권 전체의 가계신용 잔액은 사상 최대치인 1천223조7천억원이다. 고정금리 대출 비중은 36.8% 수준이다. 앞으로 금리가 오르면 전체 가계부채 중 약 700~800조 정도는 이자 부담이 커지게 된다. 가계부채 증가세를 둔화하고, 변동금리 위주인 부채의 질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성공 여부도 관건이다. 한국은 30대 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 기업 영업이익의 70%를 차지한다. 경제 구조가 그만큼 왜곡돼있다는 의미다. 한해 동안 벌어들인 영업이익으로 최근 3년간 대출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은 3천200개가 넘는다. 특히 해운·조선·철강업을 중심으로 한계기업은 5년 새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대외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체력을 키우려면 한계상황에 도달한 부실기업부터 선제적으로 구조 조정해야 한다.



Ⅳ. 참고자료


  • 1. 레이쓰하이(2014), 2015-2016 슈퍼달러의 대반격: G2 전쟁』, 부키

  • 2. 최윤식(2013), 2030 대담한 미래-대한민국, 제2의 외환위기 거쳐 ‘잃어버린 10년’간다, 지식노마드

  • 3. 김상훈, 미국 경제의 주요 이슈 점검 및 2015년 전망, 한국은행, 2015년 1월

  • 4. 홍익희(2016), 환율전쟁 이야기-교묘한 달러 곡예의 역사와 환율전쟁, 한스미디어

  • 5. 왕양(2015), 세계 경제 패권을 향한 환율전쟁, 평단문화사

  • 6. 김보성·박기덕·주현도 ‘주요국 중앙은행의 마이너스 정책금리 운영 현황’, 한국은행, 2016년 4월

  • 7. KIEF대외경제정책연구원, 브렉시트의 경제적 영향과 정책적 시사점, 2016년 5월

  • 8. 미 연준 홈페이지(www.federalreserve.gov)

  • 9. 워싱턴포스트, The Fed’s mistake? Not rising rates fast enough, 2016. 6월 19일

  • 10. 파이낸셜타임스 ‘China spent $470bn to maintain confidence in renminbi’ 2016년 6월 13

  • 11. 프로젝트 신디케이트(www.project-syndicate.org)

  • 12. 서상원·구병수, Spillovers from U.S. Unconventional Monetary Policy and Its Normalization to Emerging Markets, 한국은행, 2016년 3월

  • 13. Eichengreen, Tapering Talk: The Impact of Expectations of Reduced Federal Reserve Security Purchases on Emerging Markets, Emerging Markets Review, 2015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