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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xas Tribune Festival을 가다 – 미국 정치문화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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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에 있는 유력 언론사를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The Texas Tribune일 겁니다. 그 Texas Tribune
이 이달 16일부터 18일까지 제가 연수 중인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행사를 열었습니다.
지역뿐 아니라 워싱턴의 유력 정치인들도 상당수 참가해 지역과 국가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행사였습
니다. 참가비가 무려 350달러… 다행히 학교에 소속된 저 같은 사람들은 단돈(?) 50달러에 비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금기란 없다


첫날 저녁 야외 파티에 이어 열린 기조 대담은 텍사스주 부지사가 맡았습니다. 주의 살림살이를 놓고
많은 얘기가 오갔는데 아시다시피 미국은 세제와 복지, 교육 등 일반 행정업무의 상당부분을 주가 직
접 집행하는 만큼 청중들의 관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이방인의 눈길을 끈 것은 대담 분위기
였습니다. 조용히 경청하는 게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발언이 나오면 지지의 박수를 치고
그렇지 않은 말에는 침묵으로 대답했습니다. 대신 진행자가 이를 노련하게 포착해 청중들을 대신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교도의 국가 미국, 그 종교적 근간을 인정할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진행자와 부지사의 설전은 예상
치 못한 볼거리였습니다. 부지사는 미국이 기독교를 기초로 세워진 나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진행자가 자신은 유대인, 그것도 아주 골수 유대인인데 그렇다면 자신 같
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반박했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에서 금기 시 되는 종교 문제를 이렇게
대놓고 이슈화하는 게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부지사는 미국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을 부정한
다면 이는 미국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는 어땠을
까요? 절대로 험악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지하면 지지하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대로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는 선에서 대담의 의미를 찾는 듯 했습니다.


텍사스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Campus Carry와 Open Carry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텍사스는 지난 6월
대학 내 총기 휴대를 허용하는 Campus Carry법안과 총기를 밖으로 보이게 휴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Open Carry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지금까지도 반대 여론이 적지 않은 만큼 논쟁은 뜨거웠습니다.
(참고로 텍사스 전체로는 공화당이 우세하나 유독 주도인 오스틴에서만은 민주당이 강세입니다.)


부지사와의 대담시간이 끝나자 청중들이 각 복도 앞에 설치된 마이크 쪽으로 나와 줄을 섰습니다. 신
선하더군요.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부지사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편한 자세로, 그러나 무척이나 성의
있게 청중들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한 청중이 대학 내에서 총기 휴대를 허용하는 건 예상치 못한 사고
를 유발할 수 있다며 문제점을 지적하자 부지사는 누군가 총기를 남용했을 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가 우선돼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총을 밖으로 보이도록 휴대할 수 있게 한 법안에 대해선 총기
소지는 헌법적 권한으로 문제될 게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의견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어디서도 야유나 소동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이런 솔직한 질의
응답이 가능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평소 무슨 사안이 터지면 토론회장에서 점거농성이 벌어지고
누군가 끌려 나가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던 터라 더욱 그랬습니다. 견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치인이
자기 소신을 이렇게 명확히 표현하는 문화가 부러웠습니다.
 
▣ 낸시 펠로시(Nancy Pelosi)를 만나다


다음날은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의 대담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메인 이벤트였습니다.
청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낸시 의원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활기차 보였습니다. 먼저
텍사스와 자신의 연인에 대해 언급한 뒤 자신의 정치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로서 일자리 창출을 통한 중산층 재건과 부유층에 대한 증세, 총기 규제 등 당의
주요 정책을 조목조목 역설했습니다. 또 여성 정치인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로서 겪어야 했던 어려
움을 담백하게 털어놓으면서 직장 맘에 대한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후보로 지명돼 대권을 쥘 경우 對 의회 관계를 현재의 오바마 대통령과 어떻게
차별화해 나갈 걸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여성 최초의 하원 의장을 지낸 자신의 경력을 먼저 언급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최고의 여성 정치인들 간 경쟁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낸시 의원은(자신의 적극적인 지지로 당선된) 오바마 대통령이 의회와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점을 전제로 한 질문임을 의식한 듯 총선 패배로 민주당이 다수당의 지위를 상실한 탓에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추진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면서 공화당의 비협조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청중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터라 앞서 부지사 때와 같은 날카로운 공방은 벌
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 그녀의 대담을 보면서 이채로웠던 게 있습니다. 한국적 정서
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었습니다. 우아한 몸가짐이나 발언에 어울리지 않게 입장할 때부터 뭔가
캔디나 젤리 같은 걸 계속 입에 물고 진행을 하더군요. 문화적 차이인지, 그녀의 개인적 취향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미국적 시각에서의 북한 문제


마지막으로 관심이 갔던 것은 America’s Place in the World라는 주제로 열린 대담이었습니다. 팀
케인(Tim Kaine) 민주당 상원의원과 마이클 맥콜(Michael McCaul) 공화당 하원의원이 토론자로 나서
미국이 처한 국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논의의 상당 부분이 국가 안보에 집중됐는데
주로 시리아와 이란, 러시아와 중국 등이 거론됐습니다.


한국 기자인 만큼 제가 관심이 있었던 주제는 북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핵문제와 중국 문제
를 거론할 때 이름 정도만 거론됐을 뿐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국과의 외교적 수사를
걷어낸, 그야말로 미국인들끼리의 안보 논의에 북한은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도 없겠다 싶어 청중들
을 상대로 한 질문 시간에 줄을 섰습니다. 하지만 제 바로 앞에서 진행자가 대담을 정리하더군요.


좀 아쉽다 싶어 무대 앞으로 나가자 대담을 마치고 내려온 의원들이 청중들을 상대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의원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그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대중 정치인의 이런 면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하원의원보다는 상원의원이, 야당의원보다는 여당의원이 현안에 대해 더 깊숙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팀 케인 민주당 상원의원 쪽에 섰습니다. 한 명씩 차례를 기다려 인사를 나누는데 저에게도 드
디어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언제 돌아설지 몰라 “북한은 핵도 있고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되기도 했었
는데 왜 논의대상에서 소외돼 있는지 모르겠다. 아까 대담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더라. 미국의 국가
안보 차원에서 북한은 중동 지역 국가들보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건가?”라고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북한… 중요하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을 지렛대로 논의해 볼 여지가 있다. 중
국은 북한에 대해 영향력이 있다. 또 한반도 주변에는 (우방국인) 일본도 있다. 아무런 지렛대가 없
는 중동 지역과는 다르다.” 중국을 통해 북한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미국이 어느
국가를 통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라며 선을 그었습니다. 공식적이고도 준비된 답변 같았습니다.
미국 정치인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인사 때 괜히 한국 기자라고 소개했나 후회가 드는 순
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