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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V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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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자동차와 관련된 업무만을 전담하는 관공서가 따로 있다. 바로 DMV(Department of Motor Vehicles)라는 곳인데 운전면허 시험부터 차량의 등록과 말소 등 차량과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일을 여기서 처리한다.

내가 처음으로 DMV를 방문한 건 미국에 온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입국 직후 집과 차를 구하기 위해 일단 차를 렌트해 운전을 하고 다녔고 딜러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중고차를 발견했다. 차를 구입하겠다고 하자 딜러는 “차를 사려면 국제면허증만으론 안되고 노스캐롤라이나 면허증이나 NC ID(노스캐롤라이나 거주를 증명하는 신분증)가 있어야 한다. 면허를 당장 따기 어려우면 DMV를 찾아가 일단 NC ID를 발급받아 오라”고 했다.

다음 날 딜러가 말해준 서류(여권과 DS 2019 등)를 들고 DMV를 방문했다. 면허시험을 보러 가는게 아니라 단지 ID를 발급받으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너무 일찍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오전 10시쯤 갔다. 접수대에서 직원이 “무슨 일로 왔냐?”고 해서 “NC ID 받으러 왔다”고 했더니 대기표를 건네줬다. 대기실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대기표를 받아 들고 2시간쯤 기다렸을 때 한 직원이 대기 중인 사람들 앞으로 오더니 “컴퓨터 시스템이 다운됐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다음 날 다시 오라”는 거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정작 자리를 뜨는 살마은 많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이때부터는 일 처리 속도가 3배쯤 느려진 것 같았다. 결국 점심도 먹지 못하고 꼼짝없이 3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돌아왔다.

창구로 가서 “NC ID를 받으러 왔다”고 말하고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창구 직원이 현재 거주지를 묻기에 “지금은 아직 집을 못 구해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 증명서는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호텔 예약 확인 이메일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줬다. 이메일에는 숙박 일자와 함께 결제 내역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호텔 체류를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직원은 “이런건 소용 없고 호텔측에서 체류 사실을 증명해주는 ‘문서’를 받아와야 한다”고 했다. “5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그냥 해주면 안될까”하고 사정도 해봤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5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하니 좀 딱해 보였는지 “내일 서류를 가지고 다시 오면 대기표를 받지 말고 나한테 바로 와라. 그러면 곧바로 처리해줄게”라고 했다. 그 말에 그나마 위안을 삼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 호텔에서 발급해준 체류 증명서를 들고 다시 DMV로 향했다. 이 날은 그 직원의 말대로 대기표를 받지 않고 바로 그 직원이 있는 창구로 갔다. 그런데 그 직원이 대기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전날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오늘 대기표를 받지 말고 곧바로 창구로 오면 처리해주겠다고 당신이 약속했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직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는 원래 약속 같은 건 하지 않는다”며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대기표를 받아 순서를 기다렸다.

내 순서가 돼 이번엔 다른 직원이 있는 창구로 갔다. 그런데 그 직원은 내가 내민 호텔 체류 증명서를 보더니 “이런 건 거주 증명이 될 수 없다. 아파트 계약서나 공과금 청구서 같은 걸 가져와야 인정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저기 있는 저 직원이 호텔 체류 증명서를 가져오면 처리해주겠다고 했다”고 설명했으나 그 직원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거기서 화를 내고 더 이상 항의를 해 봤자 소용 없을 거란 예감이 들어 또다시 발길을 돌렸다. 

며칠 뒤 나는 마침내 아파트 계약을 체결했고 곧바로 계약서를 들고 다시 DMV로 달려갔다. DMV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고 번호표를 받고 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ID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ID를 발급받고 차를 구입하고 나자 DMV에 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차는 딜러 매장에서 샀기 때문에 등록 절차는 딜러가 대신 해줬지만,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 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아직 한국 운전면허증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어 1년간 체류하기 위해선 면허 시험을 봐야 한다)

DMV에서 겪었던 일 때문에 운전면허 시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감독관이 괜한 트집을 잡아 떨어뜨리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에 시험에 대한 자신감도 점점 저하됐다. 그러던 중 면허시험 합격률이 높다는 한 DMV 얘기를 접하게 됐다. 감독관들이 친절하고 실기 점수도 후하게 준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약 50분 가량 떨어진 다소 먼 거리였지만, 면허시험 만큼은 편한 마음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그 DMV를 택했다. 그 곳은 소문대로 분위기가 좋았다. 기다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특히 직원들이 아주 친절했다. 도로 주행 테스트를 위해 나와 동승했던 감독관은 내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자 “걱정할 것 없다”며 시종 자상한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고, 심지어 아내의 경우엔 감독관이 한국어로 “좌회전” “우회전”을 외치며 시종 유쾌한 분위기 속에 테스트를 진행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 부부는 무난하게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귀국 직전 자동차를 팔고 번호판을 반납하러 가기 전까지는 다시는 DMV에 갈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 한달 뒤 DMV에 갈 일이 또 생기고 말았다. 한 달 만에 이사를 하게 돼 주소가 바뀌었는데 이럴 경우 DMV에 가서 운전면허증을 재발급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DMV 방문, 그런데 이번에도 또 퇴짜를 맞고 말았다. 단지 주소가 바뀌었을 뿐이니 기존 면허증과 새로 이사 온 아파트 계약서만 가져 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권과 DS-2019, I-94를 모두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권 등의 기록은 이미 DMV 전산에 남아 있지 않느냐”고 말해 봤지만, 내 신분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관련 서류를 통해 그 사이 신분상의 변화가 없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DMV측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류를 보완한 뒤 다시 DMV를 방문해 면허증을 재발급 받았다. 불과 한달 여 사이 DMV를 무려 여섯 차례나 방문한 것이다.

이처럼 여러 차례 DMV를 들락거리면서 느낀 점은 우선, DMV 방문에 앞서 사전 조사를 통해 준비를 제대로 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DMV에 한번 방문하면 몇 시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기 때문에 준비 소홀로 퇴짜를 맞을 경우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손해가 막심하다. 아울러 어느 DMV를 갈지 잘 선택해야 한다.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아무 DMV나 무턱대고 찾아가기 보다는 사람들의 방문 후기 등을 검색해 직원들이 친절한 지 대기 시간이 길지 않은 지 등을 미리 알아본 뒤 DMV를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