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를 하루 앞둔 2024년 12월 31일 밤, 볼 드롭을 앞두고 들뜬 사람들로 가득한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부근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브라이언트 파크 부근에서 가득한 인파에 잠깐 갇혔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가방은 열려 있고, 주머니는 비었습니다. 확인해보니 핸드폰이 사라졌더라고요. 소매치기를 당한 게 분명했습니다.

가족의 핸드폰을 이용해 제 번호로 전화를 걸어 “충분히 보상할 테니 돌려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화는 툭 끊겼습니다. 제 영어 실력이 문제라 소매치기가 못 알아들은 건지, 소매치기가 영어를 못해서 제가 애절하게 제시한 ‘딜’이 무산된 건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위치 추적 결과, 제 핸드폰은 범죄가 빈발하기로 유명한 지역까지 이동한 상태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그 위험한 지역에 가서 찾느니 깔끔하게 포기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음날 급히 새 핸드폰을 사고 필수 앱들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 관련 앱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비밀번호를 몇 차례 잘못 입력했더니, 로그인이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높은 인증의 벽
주거래 은행의 고객센터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은행 측은 먼저 계좌번호를 물었습니다. 이어 법무부 출입국 기록을 통해 제가 해외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OTP 카드로 인증을 요구했습니다. 실물 OTP 카드를 잊지 않고 챙겨오길 잘했다 싶더라고요. 같은 방법으로 주거래 증권사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발급한 OTP 카드의 배터리 수명이 해외에서 다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거래 은행에 따르면 방법은 있습니다. 단 한국에 배우자 등 대리인이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합니다. 영사관에서 은행 업무 등 위임을 위한 위임장을 발급받고, 은행 전자금융이용신청서를 출력해 자필로 작성하고, 신분증 사본을 준비합니다. 이걸 한국에 있는 대리인에게 국제우편으로 보냅니다. 대리인이 본인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를 지참해 OTP를 재발급받은 다음 다시 국제우편으로 보내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합니다. 듣기만 해도 번거로운 절차였지만,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국 전에 준비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모든 금융회사에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또 다른 거래 은행은 국내에서 개통한 핸드폰을 통한 본인 인증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사용 카드회사도 앱카드를 이용하려면 역시 핸드폰 인증이 필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USIM은 도둑맞은 핸드폰과 함께 사라진 상태였죠.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eSIM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문의했습니다만, 실물 USIM을 사용하던 사람이 eSIM으로 교체하려면 직접 방문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제가 외국에 있어서 방문이 어렵고, 당장 핸드폰 인증이 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지만 별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USIM을 핸드폰에서 분리해 집 어딘가에 따로 보관했어야 했나’ 라는 후회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랬다간 집에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이후 국소적 ‘돈맥경화’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출국 전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좀 더 준비했을 것입니다. 계좌번호를 모르면 인증이 어려운 만큼, 통장 등 사본을 챙겨두거나 번호를 메모해 두는 게 필요합니다. 실물 OTP 카드를 가져올 경우, 배터리 상태를 확인해서 필요하다면 미리 재발급을 받고, 모바일 OTP 사용자라면 핸드폰 분실 시 해외에서 대처 방안을 숙지해야겠습니다. 인증의 기본이 국내 통신사의 핸드폰인 만큼, 저처럼 핸드폰을 분실했을 때 플랜B를 통신사에 미리 알아둬야겠고요. 아이핀과 같은 또 다른 인증 수단도 준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해외에서 핸드폰을 분실하고 나니, 금융 접근성 자체가 차단될 수 있다는 점을 체감했습니다. 해외 장기 체류자들을 위한 유연한 인증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리 신고한 해외 체류 동안에는 이메일이나 등록된 해외 휴대전화 번호 등을 보완 인증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