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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기지 세운 넷플릭스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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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기지 세운 넷플릭스의 전략

박수련 중앙일보 기자

방문학자로 연수중인 UCLA가 위치한 미국 로스엔젤레스는 City of Contents, 말 그대로 ‘콘텐츠의 도시’다. 지난 8개월 동안 LA에 살면서 보니 LA의 옥외광고판들은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HBO, Hulu 등 비디오 스트리밍 기업들이 쏟아내는 신작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 많은 콘텐츠를 누가 다 볼까 싶지만, 괜한 걱정일 뿐. 넷플릭스만 해도 지난해말 기준 전세계 1억 4000만명(한국 가입자는 120만명으로 추정)의 유료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월평균 10달러씩 내고 넷플릭스 오리지널(자체 제작) 콘텐츠를 즐긴다. 전세계 영화산업을 강타한 넷플릭스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기술기업으로 1997년 출발했지만, 이제는 전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수도인 할리우드를 장악했다. ‘유료 구독 기반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키운 넷플릭스는 2년 전 LA 할리우드에 오피스를 마련했다. 지난 3월 이곳에서 넷플릭스가 글로벌 미디어 60여곳을 초청해 간담회를 연다기에 그 현장에 다녀왔다. 이 행사엔 넷플릭스의 창업자이자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를 비롯해, 콘텐츠 총괄(CCO)인 테드 사란도스, 프로덕트 총괄(CPO)인 그렉 피터스 등 핵심 임원들이 나와 전세계 32개국에서 온 60여명의 기자들 앞에서 넷플릭스의 전략을 소개했다. 소비자의 제한된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점에서 뉴스 미디어도 넷플릭스의 전략과 이들의 경쟁력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취재했던 내용을 이곳에 공유한다.

LA 시내 곳곳에는 옥외광고판이 무척 많다. 이를 채우는 대부분은 넷플릭스∙아마존∙훌루∙HBO∙Showtime 등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내놓는 신작들이다. 거의 1~2주 단위로 새로운 광고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지난 3월 18일, 19일 이틀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복판에 위치한 넷플릭스 오피스를 찾았다. 넷플릭스가 글로벌 32개국에서 60여개 매체를 초청한 ‘넷플릭스 랩스 데이(Netflix Labs Day)’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넷플릭스 오피스는 100년 전 워너브러더스가 간판을 걸고 최초의 유성영화(재즈싱어, 1927년)를 찍었던 ‘선셋 브론슨 스튜디오’ 부지 내부에 있었다. 넷플릭스는 2년 전 이곳에 사무실을 열었다. 1997년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으로 출발해 성장해온 넷플릭스는 창업 20년 만에 세계 영화ㆍ방송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에 전략 기지를 세웠다.

넷플릭스 창업자이자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

이틀간 만난 넷플릭스 임원들은 한 목소리로 차별화된 오리지널(직접 제작) 콘텐트와 이를 뒷받침할 기술로 현재의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산업을 혁신하겠다고 강조했다. 기술기업으로서 보유한 기술과 혁신을 강조하는 기업문화 등을 무기로 콘텐츠 산업을 리드하겠다는 자신감이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기술 그 자체보단 창의적이고 진정성있는 콘텐츠에 대한 갈증을 수없이 드러냈다. 특히 리드 헤이스팅스 CEO는 “우린 기술 기업이 아니라, 디즈니 같은 미디어 기업”이라고 말했다. 개인정보 유출 및 반(反)독점 측면에서 비판받는 기술 기업들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온 대답이었지만, 다른 발언들과 종합해보면 그는 콘텐츠 기업으로서 경쟁력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헤이스팅스 CEO는 디즈니ㆍ애플 등 넷플릭스와 유사한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를 준비 중인 경쟁사들에 대해 “경쟁자가 있을 때 사람들은 성과를 더 잘 내지 않느냐”며 “힘은 들겠지만 경쟁은 구독자와 창작자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또 “(다음주에 공개될)애플의 비디오 서비스에 넷플릭스를 넣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소비자에겐 우리가 만든 서비스에서 콘텐트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다른 임원들도 데이터나 기술력보다 콘텐트 기업으로서 넷플릭스의 경쟁력을 강조했다. 서비스 전반을 책임지는 그렉 피터스 최고제품책임자(CPO)도 이날 “우리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라며 “가장 최신의 기술을 갖고 미래형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가 개인화된 콘텐트 추천 기술과 데이터 기반의 의사 결정을 강조하며 ’기술력‘을 차별화 포인트로 삼았던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다.

2000년대 초반 DVD대여 서비스로 거대 비디오대여점 체인 ‘블록버스터’를 밀어낸 넷플릭스는 2006년부터는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셋톱박스 없이 콘텐츠를 볼 수 있는 OTT(Over the top) 서비스로서 넷플릭스는 수학자, 컴퓨터 공학자 등을 대거 영입해 고객의 과거 시청 목록 같은 데이터를 분석했다.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기술 기반 서비스로 넷플릭스는 빠르게 성장했다. 2006년엔 역시 실리콘밸리 기술기업인 아마존도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시작했다. 이들 기술 기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쟁하면서 시장을 키웠다. 이 때문에 미국 소비자들이 케이블TV 가입을 해지하는 일명 ‘코드커팅(code cutting)’이 확산돼 최근 수년간 케이블TV 사업자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케이블TV의 하락세는 미국 내에선 어느 정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결론이 난 것 같다. 제2, 제3의 넷플릭스를 꿈꾸는 신규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우선 애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융합을 통해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이 직접 비디오 서비스 플랫폼을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애플은 넷플릭스 행사가 열린 일주일 후(3월 25일) 애플TV 앱 공개 계획을 발표했다. 오프라 윈프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제니퍼 애니스톤 등이 애플 오리지널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더구나 올 연말에는 더 큰 거물이 등장한다. 콘텐츠 왕국 디즈니가 넷플릭스와 유사한 스트리밍 서비스(디즈니 플러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디즈니가 할리우드의 대표 스튜디오인 21세기 폭스를 사들이는 인수합병(M&A)이 최근 미 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면서 디즈니 플러스에 담길 지적재산권(IP)의 경쟁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디즈니는 이미 지난해부터 넷플릭스에 공급해왔던 디즈니 IP들을 모두 빼낸 상태다. HBO를 소유한 워너미디어가 거대 통신사 AT&T에 최근 인수합병 되면서 HBO도 넷플릭스에게 더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2018년)에 이어 올해 골든 글로브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마’의 한 장면.

이런 경쟁 상황에 대한 넷플릭스의 전략은 뛰어난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이다. 외부의 콘텐트 공급자들에게 매달리지 않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직접 성공작을 만들어내는 게 빠른 길이다. 실제 넷플릭스는 2016년 글로벌 시장 도전을 선언한 이후 매년 콘텐트 확보를 위해 막대하게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엔 연매출(157억 9000만 달러)의 약 75%인 120억 달러 가량을 콘텐트에 투자했다. 헤이스팅스 CEO는 이날 “우리와 비디오 스트리밍 시장에서 13년 이상 경쟁하는 아마존이 연간 40억~50억 달러를 콘텐트에 투자한다는데 우리는 그 두 배 이상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매년 수십억 달러씩 증가하는 콘텐트 신규 투자분의 대부분은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하는 오리지널에 투입된다.

리드 헤이스팅스 CEO는 “광고를 안하는 넷플릭스는 1억 4000만명의 구독자에게 받는 10달러 안팎의 구독료가 우리의 유일한 매출원”이라며 “앞으로도 광고 비즈니스나 스포츠 중계 같은 데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고 없이 질높은 콘텐트로 소비자 지갑을 열겠다는 전략에 따라 넷플릭스는 콘텐트의 질과 양 모두를 잡아야 한다.

출처:중앙일보

넷플릭스 임원들의 콘텐트 욕심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벨라 바하라 넷플릭스 인터내셔널 오리지널 담당 부사장은 “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콘텐트로 움직이는(content-driven) 기업”이라며 “전세계에서 독창적이고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풀어낼 수 있는 창작자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콘텐트 분야를 총괄하는 테드 사란도스는 “한국의 ‘킹덤’을 보며 한국적인 면을 쥐어 짜거나 글로벌 요소를 억지로 가미하지 않고서도, 스토리가 훌륭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테드 사란도스 CCO가 행사 첫날 점심식사 시간에 기자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나눈 짧은 인터뷰에선 한국 콘텐츠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지난해 하반기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이 글로벌 소비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넷플릭스의 관심도 더 커진 분위기였다. 사란도스 COO는 “이제까지는 한국의 K콘텐츠가 해외 시장에 소개될 기회나 통로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대단위로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배급할 수 있는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을 활용하면서 전세계에 ‘킹덤’ 같은 작품이 히트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넷플릭스의 최고 콘텐츠 책임자(CCO)인 테드 사란도스.

넷플릭스서 성공 사례로 소개한 미국 이외 지역 오리지널 콘텐츠들은 한국의 ‘킹덤’ 외에도, 스페인 ‘La Casa de Papel(한국에선 ‘종이의 집’), 영국의 ‘섹스 에듀케이션’ 등 다양했다.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과의 협업을 강화해 고품질 애니메이션 콘텐츠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넷플릭스는 올해도 전년도 연매출(157억9000만 달러)과 맞먹는 규모를 콘텐츠 확보에 투입한다. 사란도스 CCO는 이날 인터뷰에서 올해 콘텐트 투자 규모를 150억 달러로 예상한 투자은행업계 전망에 대해 “그렇다”고 확인했다.
이 같은 콘텐트 강조 전략 때문에 넷플릭스가 점차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유사해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올해 1월 넷플릭스는 미국 영화ㆍ방송 산업계의 막강한 이해집단인 영화산업협회(MPAA) 가입에 성공했다. 1922년 창립 이후 최근 60년 간 디즈니ㆍ20세기폭스ㆍ파라마운트ㆍ소니ㆍ유니버셜ㆍ워너브라더스 등 6개 영화 스튜디오만 회원으로 둔 MPAA에 넷플릭스가 낀 것이다. 디즈니가 21세기 폭스(20세기폭스 스튜디오의 모회사)를 713억달러에 인수하면서 MPAA에 새로운 멤버가 들어갈 여지가 생겼는데, 이를 넷플릭스가 차지한 것. MPAA는 미국 내 극장에 상영될 영화의 등급을 판정하는, 영향력이 막강한 단체다. 영화 상영관들과 갈등을 빚으면서도, 골든글로브, 아카데미,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연이어 수상작을 배출하며 할리우드 영화산업계에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 넷플릭스로선 MPAA 멤버가 됨으로써 할리우드에 좀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대해 테드 사란도스 CCO는 “우린 기술에 뿌리를 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라며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기술 기업이 되긴 어렵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술을 활용해 다른 엔터기업들이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있다”며 기술적 우위를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MPAA에서 여러 기업들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해 협력하고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여지를 남겼다.

넷플릭스는 국내에서도 진출 2년 만에 유료 가입자를 100만명 가까이(앱조사업체 와이즈앱 2019년 1월 발표) 확보했다. 무료체험 이벤트를 통해 넷플릭스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인 소비자까지 합치면 130만명에 육박한다. 케이블TV 사업자인 LG유플러스와 협력을 통해 신규 가입자를 늘리는 ‘번들 상품’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는 해외 곳곳에서 현지 통신사업자들과 손잡고 유료가입자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우수한 콘텐츠에 대한 욕심이 넷플릭스의 더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고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들에 대한 풍부한 지원은 이 제작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스튜디오와 일해본 경험이 많은 이들은 ‘넷플릭스의 기술적 지원, 재정적 지원, 창작의 자유를 존중하는 문화’에 대해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창작자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존중한다’는 경영진의 일관된 메시지가 뛰어난 창작자들을 넷플릭스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수한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이들에게 월 10달러 안팎의 구독료를 내는 소비자들의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다. 올해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벌어질 치열한 경쟁에서 넷플릭스가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지 궁금하다. ‘대기업’ 디즈니의 거대 자본과 막강한 IP를 ‘부티크 스튜디오’ 같은 넷플릭스가 어떻게 막아낼 지 내년이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