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읽은 여러 권의 책 중 ‘Hillbilly Elegy(미국 백인촌놈들의 슬픈 노래)’라는 수필이 있다.
켄터키, 오하이오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뉴욕 예일대를 나와서 지금은 실리콘밸리 투자회사에 일하는
30대 초반의 남성이 쓴 책이다. 책의 부제는 ‘A memoir of a family and culture in crisis’. ‘elegy’나
‘crisis’ 같은 단어에서 바로 느낌이 오지만 기본적으로 사회 주류에서 소외된 산골 백인들의 슬픔과 좌절
을 소재로 한 내용이다.
이 책은 작년 미국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셀러로 트럼프의 당선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아직 한국에
번역은 안됐다) 트럼프가 미국 중하층 백인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받은 배경을 잘 풀어내고 있다는 평가
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인 J.D. Vance는 출간 이후 수많은 방송과 강연장에 나와 책의 의미를 설명했
다.
그는 자신이 트럼프 지지자도 아니고, 오바마를 음해하는 일부 무식한 백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에 길들여진 전통 백인사회의 문제점을 미국 전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국사회의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냈다. 거칠 게 말하면 전체 백인을 ‘잘난 백인’과
‘못난 백인’으로 가른 것이다. 이들 ‘못난 백인’을 다른 사람들은 ‘hillbilly’ ‘redneck’, 또는 ‘white
trash’라며 모욕한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한 채 평생 육체노동을 하고, small town에 틀어박혀 평탄
하지 못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설명하는 책의 한 구절.
‘I may be white, but I do not identify with the WASPs of the Northeast. Instead, I identify with
the millions of working-class white Americans of Scots-Irish descent who have no college degree.’
Hillbilly들은 뉴욕 월가나 서부 실리콘밸리에서 미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이들에게서 뒤쳐짐(left behind)
을 느끼고 쉽게 좌절(frustrated)하는 성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다. 낙후공업지역(rust belt)의 쇠락, 세계화에 따른 일자리 공동화를
겪으면서 몇 세대를 이어온 가난이 더욱 심각해지자 계층 상승(upward mobility)의 꿈이 사라지고 Ame-
rican Dream은 자신들이 아닌 소수인종과 이민자들의 몫이 됐다는 한탄이다. 학습된 무력감은 자녀
세대가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문제가 증폭된다. 마을 전체에 제대로 된 주립대학을 들어간 학생은 거의
없고 high school dropouts만 넘쳐난다. 책에는 ‘mountain dew mouth’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가난하고
무관심한 부모가 자녀들에게 값싼 청량음료만 잔뜩 먹여서 아이들 이빨이 모조리 상해버렸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Hillbilly들의 좌절에 대한 다른 인종들의 시선은 아직 내가 겪기로는 차갑기 그지없다. USC캠퍼스
에서 만난 반(反)트럼프 성향의 한 흑인 여대생은 “자기들이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 아니냐. 그들이
가난한 건 맞지만 왜 그걸 남탓으로 돌리냐”고 했다. 이런 백인들에게는 자기 운명을 제 손으로 개척해
나갈 의지가 이민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약하다는 비판이다. 가뜩이나 요즘 캘리포니아 지역은 심해
지는 불체자 단속, 마이너리티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 등으로 히스패닉과 아시안의 민심이 흉흉하다.
피부 색깔별로 그리고 소득계층별로 누가 더 불만이 많은지, 누가 더 차별을 받고 있는지 서로 고함을
지르며 내기라도 하는 분위기다. 이곳에 사는 한 한인 이민자가 “어릴 때는 자녀들이 어떻게든 한인들
을 피해다니고 백인 주류사회에 엮이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대학생이 되고 나이가 들어서는 한인들 커뮤
니티를 찾아다니게 된다”는 말을 했을 때 쉽게 수긍이 갔다. 멜팅팟은 커녕, 이런 따로국밥이 없다.
최근 이 책을 비롯해 우연히도 ‘American Dream의 위기’에 관한 책이나 글을 많이 접했다. Hard work
가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했던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불신감이 사회에 팽배하다.
트럼프의 당선도 상대적 소외감과 열등감에 빠진 Hillbilly들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큰 악순환의 출발이다. 자신의 실패를 정부 탓이나 사회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늘수록, 일터에서
게을러지고 복지 시스템에 얹혀사는 자들이 늘어난다(이 책의 저자도 우려하는 점). 계층·인종·세대 간
갈등이 커지면서 삿대질과 폭력성이 늘고 서로를 음해하는 가짜뉴스가 여기서도 판을 친다. 요즘의 나라
꼴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