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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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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사회

렌터카를 빌릴 때 일이었다. 온라인으로 예약과 지불을 마친 상태라 별 문제없이 차를 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렌터카 매장 직원이 난감한 얼굴로 연수자 명의의 신용카드로는 대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증금 개념으로 최대 340달러 정도를 긁을 수 있어야 하는데 연수자의 카드로는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렌터카 지불을 마친 상태였기에 고작 300달러가 한도인 카드(secured credit card)만 하나 달랑 들고 간 것이 잘못이었다. 현금은 충분하게 있었지만, 현금은 안 받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차를 빌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차로 40분 거리인 집까지 다시 가서 한국 신용카드나 잔고가 넉넉한 있는 미국 데빗 카드를 들고 다시 매장을 찾는 방법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신용카드 한도가 높은 아내 명의로 예약 자체를 변경하고 연수자를 추가 운전자로 등록하는 것이었다. 차를 급하게 빌려야 했기 때문에 아내를 매장으로 부르는 후자의 방법을 선택했다. 결국 차를 빌리긴 했으나 아내의 눈총을 피할 길은 없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렌터카 소동’은 ‘쥐꼬리’만한 한도의 카드만을 발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비롯됐다. 연수자는 미국 정착 초반기에 높은 한도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아무리 높은 한도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오랜 기간 연체 없이 사용했어도 미국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크레딧(Credit) 점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착 초기 은행 계좌와 데빗 카드 등을 만들려고 찾아 간 곳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BoA)였다. SSN(Social Security Number)이 없어도 은행 계좌를 트거나 카드를 발급받는데 BoA의 문턱이 그나마 낮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문대로였다. 한국과 비교하면 시간이 꽤 걸리긴 했으나 계좌와 데빗 카드 신청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은행 담당자는 체크카드와 비슷한 개념인 ‘시큐어드 크레딧 카드’ 발급을 추천했다. 300달러를 보증금 개념으로 예치해두고 그 금액 한도만큼 신용카드처럼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다.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시큐어드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았다. 물론 어느 정도 크레딧 점수를 쌓은 뒤 한도가 높은 카드를 신청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SSN를 은행에 추후 등록하고 높은 한도의 카드를 발급받으면 된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역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귀찮음의 발로였고, 결국 렌터카 소동으로 귀결됐다.

미국에서 크레딧 점수는 주택 매입, 대출, 신용카드 발급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각종 경제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집이 없이 살 수는 있어도 크레딧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주택이나 자동차 구입을 위해 대출을 받을 때 크레딧 점수에 따라 이자율 차이가 많이 난다. 주택이나 자동차 구입에는 큰 돈이 드는 만큼 이자를 무시할 수는 없다. 집을 렌트할 때도 크레딧 점수가 영향을 준다. 월세를 밀리지 않고 따박따박 받아야 하는 집주인 입장에서 크레딧 점수가 낮은 세입자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집 렌트 때 세입자의 크레딧 점수를 확인하는 집 주인도 많다.

크레딧 점수가 없는 정착 초기 외국인에게는 미국식 신용 사회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 발급부터 막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신용 등급에 맞게 경제 생활을 해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신용과 그에 따른 빚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적인 속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사회가 미국이다. 개인의 신용 정도를 넘어서는 경제 생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 무분별한 발급으로 ‘카드 대란’ 사태를 마주했던 한국 상황을 곱씹어보면 미국식 신용 사회가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크레딧 중심 사회인 만큼 크레딧 점수를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다. 한인 인터넷 카페에서 크레딧 점수를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한 글들을 적잖이 찾아 볼 수 있다. 연체가 없어야 하고, 신용 한도를 초과한 지출은 삼가야 한다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