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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에 강한 미국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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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에 강한 미국도서관

미국 연수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로 도서관을 꼽는 이들이 많다. 나도 그렇다. 정착 초기에 이 지역 공공도서관을 갔을 때 문화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도서관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한국 도서관도 좋은 곳이 많고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 그런데 이곳 도서관에의 구성과 운영방식에는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있다. 도서관을 좀 다녀본 사람이거나,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그 차이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 만화책 빌려주는 도서관?

나는 주로 캘리포니아 마운틴뷰 도서관에 다녔다. 처음 방문했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규모가 아니라 범위였다. 제법 큰 규모의 도서관이기는 했지만 어마어마한 장서가 있다든가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범위가 대중문화 전반을 아울렀다. 우리나라 도서관에는 엄숙주의가 있다. 만화책을 빌려주는 도서관을 본 적 있을까? 만화는 금기어다. 게다가 일본만화를 가득 쌓아놓고 빌려준다고?

(써니베일 도서관의 만화책 코너)

이곳에선 그렇게 한다. 여기도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오래 전에 읽었던 등 만화책(영문본)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읽어치운 기억이 생생하다. 성인용 코너에는 ‘그래픽 노블’ 코너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책의 구성도 대단히 다양하다. 한국에서 오래 전에 본 변병준 작가의 만화책이 이곳 그래픽 노블 코너에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틴에이저를 겨냥한 코너에는 아예 방이 있다. 예전 만화방 분위기다. 일본 만화 번역본이 유난히 많았다. 이 방은 틴에이저 아닌 이들은 틴에이저를 동반한 경우에만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다. ‘그들만의 아지트’를 도서관 안에 구축하려고 한 흔적으로 보였다.

우리라면 어땠을까. 반대하는 목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듯 하다. 부모들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선정적이거나 잘못된 내용도 사실 적잖이 담겨 있는데 이런 것이 또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2. ‘아이유’ 신보를 빌려주는 도서관

음반 코너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음반을 시대별, 장르별, 가수별로 찾아보고 빌릴 수 있다. 책을중심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한국 도서관과 확연하게 다른 ‘도서관의 범위’가 느껴진 또 다른 대목이다. 이 도서관에는 K-POP 섹션이 상당한 규모로 설치돼 있다. 지금 이 콘텐츠가 그렇게 할 만큼 이곳 사람들에게 인기 있다는 얘기다. (나중에 인기 없으면 얄짤 없이 교체될 것이 분명하다) 아이유의 신보가 전면에 배치돼 있고, EXO 마마무 씨스타 이달의소녀 블랙핑크 등등 트렌디한 앨범을 충분히 갖췄다. 방탄소년단(BTS)의 노래도 그간 유튜브에서 신곡이 나올 때나 가끔 듣는 형편이었는데 여기서 앨범을 빌려서 들을 수 있었다. 일본어 버전을 잘못 빌리긴 했지만,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운틴뷰 도서관의 DVD/ 음반 등 코너)

각 도서관은 오디오북도 대여한다. 오디오북 셀렉션도 대단히 풍부하고, 음반도 오디오북 대여 형태로 빌려들을 수 있다. 유명한 뮤지컬 OST 등을 유튜브를 뒤지지 않고 오리지널 음반 그대로 들을 수 있으니 편리하다.

한국에서 조금 읽다 말았던 스타트업 업계 초창기의 이야기를 담은 을 오디오북으로 흥미롭게 들었다. 오가면서 오디오북을 듣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좋은 환경이다. 다만 영어라 집중을 안 하면 생각이 곧 안드로메다로 떠나는 경우가 있고(사실은 꽤 많고), 좋은 대목에 내 책처럼 표시를 하거나 실물책을 빌릴 때처럼 사진을 찍어 후에 되새기기 어려운 것은 아쉬운 점이다.

4. 어린이 서고에서 느낀 ‘큐레이션’

(마운틴뷰 도서관의 어린이 코너)

어린이 서고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갖춘 장서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작가나 출판사의 ABC 순으로 정리된 기본 서고 외에 주변부에 여러가지 큐레이티드 코너가 있다는 점이 좋았다. 예를 들어 A,B,C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 관해 백권은 족히 넘을 ABC 책이 모여 있다. 숫자를 배우는 책은 그런 책들끼리, 할로윈 시즌엔 할로윈 콘셉트에 관한 책이, 각각 모여서 아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만화로 된 아이들 책도 적지 않게 배치돼 있다. 둘째는 닌자고와 마인크래프트 등을 주제로 한 만화책에 빠져서 (글자도 읽지 못하지만) 계속 관련 책을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중이다. 아이들을 위한 음반, 아이들을 위한 잡지 코너도 마련돼 있다. 도서관에서 다루는 ‘범위’가 다르다는 느낌을 여기서도 받는다.

공간 배치가 헐렁하다. 한국 도서관에서는 책을 쟁여놓는 것 자체가 큰 목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공간이 다소 부족한 느낌이어서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지 않아 보였다. (물론 도서관마다 다를 수 있음) 여기는 그렇지 않다. 책장에 책을 꽂을 자리의 절반 수준만 쓰는 칸이 꽤 있고, 그런 빈 공간에는 책이 표지가 보이도록 배치돼 있다. ‘이 책 한 번 볼래?’라는 말을 거는 책들이다. 사서의 추천도서이므로 대부분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다. 책을 쌓아놓는 것 자체보다, 책을 추천하는 데 대단히 큰 공을 들이는 배치다.

게다가 아이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방에는 아이교육에 도움이 되는 어른 책이 한 가득 서가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과 같이 해볼 놀이에 관한 책이라든가, 교육 이론 등이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한국 도서관에서는 교육에 관한 책은 성인 서가의 한 코너로 배치돼 있지 어린이 코너에 있지 않다. 이곳에도 성인 서가에 교육 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인은 어린이 서가에 있고, 이 책들은 아이를 잘 키우는 법, 아이들과 할 수 있는 놀이 등을 어른들에게 알려준다. 사용자 입장에서 큐레이션이 잘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운틴뷰 도서관의 어린이 서가 내 교육서적(성인용) 코너)

아쉬운 점은 한국어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성인 서가에도 어린이 서가에도 다양한 언어의 책이 구비되어 있는데, 마운틴뷰는 한국어 책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반면 인근 써니베일 도서관에는 한국어 서고가 풍부하게 갖춰져 있다. 한국인 사서의 유무가 도서 구비 유무를 가른다고 한다. 한국인 사서를 1명 채용하게 하려면 한인 커뮤니티의 압력이 필요하다. 한인들이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을 도서관에서도 느낄 수 있는 셈이다.

5. 사서인가 유치원 선생님인가

이곳 도서관은 공원과 붙어 있다. 도서관 문을 열고 나오면 공원이다. 여기서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30분에 약 30~40분간 하는 ‘스토리 타임’은 큰 인기다. 프리스쿨이나 데이케어를 보내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아주 가끔은 아빠)들이 나무 그늘에 저마다 자리를 펴고 앉으면 선생님 두 분이 나와서 책을 읽어주는데, 책만 읽는 게 아니라 내용에 맞는 노래와 율동을 가르쳐 주고 따라하게 한다. 어떨 때는 책 내용으로 인형극도 열린다. 상당히 넓은 열린 공간에서 그림도 잘 보이지 않는 책을 들고 소개하는 게 되겠나 싶기도 했는데 선생님들의 노하우가 워낙 좋고 내용이 간단한 동화책이라 전달에 큰 어려움은 없다.

처음엔 이들이 미취학 아동 전문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은 존재인 줄 알았다. 기타도 잘 치지, 노래도 잘 하지, 청중들의 관심을 끄는 노하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이 코너에 들어가니 좀 전에 춤추고 노래하던 바로 그 선생님들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우리 말로는 ‘사서’라고 하니 책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곳 librarian들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아이들 학교에서 일하는 사서도 결코 도서실 관리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지식의 세계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안내인이고, 학교 전체 운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대부분의 사서 자리는 석사 이상만 지원할 수 있다.

6. 한번에 100권까지 빌려주는 후한 정책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한 번에 최대 빌릴 수 있는 아이템 수가 100개라는 것이다. 책, 음반 등 아이템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자동 연장’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한달 기한으로 빌려주는데 돌려주지 않으면 대개는 한정 없이 연장된다. 다만 그 아이템을 찾는 다른 수요자가 있으면 반납해 달라는 요청 메일이 오기는 한다. 너무나 관대한 제도여서 처음엔 뭘 잘못 이해했나 생각하기도 했다. 한국 뿐 아니라 이곳 대학교에서도 20권이 최대 대출한도인 것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지는 관대함이다.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코로나19 전에는 반납기한을 넘기면 1달러 벌금을 물리던 때도 있었다는데 현재는 ‘노 페널티’ 정책을 쓰고 있다.

도서관 북 세일도 엄청나게 싼 값에 다양한 책(그리고 상태가 좋은 책)을 구할 수 있는 통로다. 도서관 내 상점이나 도서관 한켠에서 상시적으로 책을 팔고 있는데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책이 아니라 인기 도서를 1달러, 2달러 식으로 헐값에 판다. 책 상태도 아주 좋다. 정기 북세일은 이렇게 상시적으로 파는 것보다 한층 더 싼 값에 책을 구할 수 있는 길이다. 도서관 회원이 되어 뉴스레터 등을 받으면 이런 소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북 세일을 이렇게 많이 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앞서 말한 미국 공공도서관의 ‘큐레이팅’ 기능과 관련이 있다. 오래된 책부터 최근 책까지 서고에 ‘스톡’을 쌓아놓는 대학 도서관과 달리 공공도서관은 ‘플로우’가 중요하다고 해설해 준 분이 있었다. 공공도서관은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도록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운영한다. 그 말은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책, 혹은 필요 대비 과다하게 많은 책은 바로바로 내다 팔아서 공간을 확보하고 인기 있는 책, 필요한 책을 중심으로 항상 새롭게 도서관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곳 도서관이 살아있다는 느낌,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원인으로 보인다.

책 뿐만이 아니다. 도서관에서는 다른 온갖 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 한 달에 한번은 자전거를 무료로 고쳐주는 서비스도 하고, 캘리포니아 지역 전체 도서관이 캘리포니아 주립공원과 협약을 통해 주차비를 무상으로 해 주는 서비스(일부 신청자 한정, 순식간에 마감되었음) 등 도서관과 가까이 지내어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 커뮤니티 서비스가 집중되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도서관에서 여러 혜택을 받다 보면, 나도 할 일이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도서관에 volunteer 지원을 하기도 했는데, 한참 후에 날아온 일을 하겠느냐는 메일을 뒤늦게 확인하여 답장하니 더 이상 말이 없어 진행되지 않았다. 상점을 지키며 소소한 물건을 파는 일, 북세일에서 책을 분류하고 파는 일, 각종 브로슈어 제작을 돕는 일 등을 할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 여유가 있다면 지역 주민들과 가까워지기도 할 겸 도서관 자원봉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