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 온 뒤 줄곧 묵고 있는 곳은 외교학원 기숙사이다. 사회과학원 연구소측이 사회과학원 기숙사가 너무 멀다며 소개해준 곳이다. 외교학원은 중국 외교부 직속 기관으로 미래의 외교관이나 통상 전문관료를 양성하는 4년제 학원(전문대학)이다. 우리와 달리 중국에서 말하는 `학원’은 관련 부문의 최고 학부 과정으로 4년 과정을 마치면 학사학위를 받는다. 예컨대 중앙 음학학원이나 중앙 미술학원, 북경 전영(영화)학원, 북경 광파(방송)학원은 중국 최고의 전문가 양성기관이다.
숙소가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중국 대학생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최근까지 중국의 대학은 기말시험이 한창이었다. 걸어가면서도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20여년전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중국의 대학은 매년 9월초에 개강해 이듬해 1월 중순, 1학기를 마친다. 외교학원은 1월21일 겨울방학을 시작해 2월25일 개학한다. 우리보다 겨울 방학이 아주 짧다. 2학기는 2월 하순 시작해 7월초에 끝난다.
이 학교 영어과 2학년 학생 천시(陳熙)는 올해 만 18세. `팬더의 고향’ 사천성 출신답게 우람한 체격이지만 얼굴 표정이 귀엽다. 그는 대학 입시에서 750점 만점에 635점을 맞았다고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 정도 점수면 문과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다는 북경대학도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대학에서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외교학원을 골랐다고 했다.
그의 하루 생활은 오전 6시30분, 기숙사(학생 기숙사는 8명이 한방에서 생활한다. 연간 기숙사 비용은 650위안으로 우리 돈 10만원 정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전 7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국기 게양식에 참가해야 한다. 눈이 내리면 행사가 취소되기 때문에 눈 내리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건조하기로 소문난 북경에서 눈 내리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오전 8시, 1교시 수업이 시작한다. 여유가 있으면 구내식당에 들러 여우티아오(꽈배기 모양의 밀가루 튀김)나 바오즈(찐만두), 더우장(콩국)으로 요기한다. 수업 시간 5분 전이나 10분 전이면 걸어가면서 먹는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는 구내식당에 들러 5분만에 간단하게 해결한다. 전화로 미리 도시락을 주문해 식당을 오가는 시간을 아끼기도 한다. 학교 안에 농구나 배드민턴, 탁구를 할 수 있는 시설은 있지만 제대로 이용할 시간이 없다. 수업이 워낙 많은데다 성적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운동 시설은 시간이 많은 이웃의 할아버지, 할머니나 학교 직원들이 이용하고 있다.
학생들의 수업 강도는 엄청나다. 1주일에 5일 수업이기는 하지만 이틀은 야간 수업을 포함해 하루 10시간씩 수업을 받아야 한다. 4층짜리 본관 건물의 빈 강의실에서 불이 꺼지는 오후 10시40분까지 공부를 한 뒤 기숙사에 돌아와 새벽 1, 2시까지 책을 본다. 기숙사 동료들이 모두들 자지 않고 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 일찍 눕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성적 경쟁이 치열한 것은 바로 학교 성적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외교학원 졸업생은 절반이 외교부와 대외경제무역합작부, 신화통신 등 정부 공무원으로, 나머지 절반은 외국 기업을 비롯한 일반 기업체를 가거나 외국 유학이나 군 입대를 한다고 한다. 외교부 등 정부 기관에 가려면 외교학원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때 성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천시는 중경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제 변호사를 하고 싶은 것이 꿈이다. 그는 대학 졸업 이후 기회가 되면 미국 유학을 가고, 여의치 못하면 인민해방군에 입대, 군관(장교)으로 티베트에 가서 군 복무를 할 계획이다(사천성 출신은 예외없이 가까운 티베트 산악지대에서 군 복무를 해야 한다).
중국의 학교가 사회주의 국가답게 교칙이 엄격한 것이 특징이지만 이 학교는 유별나게 기율이 세고 보수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다.
천군과 같은 반의 남학생이 지난해 여름방학 때 같은 과 여학생을 뒤에 태운 채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가 버스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고 한다. 그는 가벼운 타박상을 입은 반면 뒤에 탄 여학생은 중상을 입었다. 남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하는 수 없이 고향이 광동성 광주의 중산대학에 편입했다는 것이다. 단 한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교정을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모두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고3 학생과 같은 분위기다. 화장을 한 여학생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중국에서 4년제 대학에 들어온 것은 일단 엄청난 경쟁력을 갖춘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이 다시 4년동안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면서 경쟁력을 갖춘 뒤 일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유학생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 학교도 다음 학기면 한국 학생들이 몰려온다는 것이 학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앞으로 두나라 대학생들을 직접 비교할 기회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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