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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도 뛰어야 하는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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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워킹데드’의 워커(좌), 영화 ‘부산행’의 좀비(우)

워킹데드와 부산행

워킹데드, 2010년부터 2022년까지 11차례 시즌에 걸쳐 방영된 미국의 대표적인 좀비 드라마다. 챗비서(ChatGPT)에게 워킹데드에 나온 좀비, ‘워커(Walker)’의 특징을 물었다. 움직임이 느리고, 소리에 민감하다고 한다.

미국에 워커가 있다면, 한국엔 K좀비가 있다. 대표작은 2016년 부산행이다. 마찬가지로 챗비서에게 K좀비의 특징을 물었다. 움직임이 빠르다 못해 달리기도 하고, 소리에 민감한 건 물론 눈도 밝다고 한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枳子)가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좀비는 태평양을 건너 뜀박질도 하는 K좀비로 다시 태어났다. 긴박한 상황을 만들어 긴장감과 흥미를 높이지 않으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는 나라가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좀비도 뛰어야 하는 나라를 떠나 좀비가 걷다 못해 기는 나라에 2023년 8월 10일 도착했다. K좀비는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입주 엿새 전 ‘연기 통보’

미국에서 살 집은 ‘트리니타스 벤쳐스’가 지은 ‘아틀라스 에덴스’라는 천3백 세대 규모의 새 아파트였다. 그런데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엿새 전인 8월 4일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입주 예정일이 8월 10일이었는데 같은 달 26일로 연기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유도 없었다. 대신 옆 건물에 임시숙소를 주겠다고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시차는 13시간, 미국 시각으로 업무 중에 통화가 연결되려면 새벽녘에 전화기를 붙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통화해보니 더 가관이었다. 필수적인 전기부품을 조달하지 못해 준공 승인을 못 받았고, 13일까진 임시숙소도 제공할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입학과 개학으로 학부모들이 대거 몰려와 호텔에 방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였다.

영어는 싸우면서 는다고 했다. 여러 차례 통화와 언쟁이 이어진 끝에 제공할 수 없다던 호텔은, 학교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인 케네소 대학 근처 트리니타스 소유 호텔로, 다시 학교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인 에덴스 소재 호텔로 바뀌었다.

“리빙 라스베가스에 나온 호텔 같네요”

8월 10일 오후 1시쯤 애틀랜타 하츠필드 잭슨 공항을 나왔다. 호텔이 있는 에덴스까지 데려다줄 기사님을 만났다. 간호사로 미국에 정착한 딸을 따라 온 가족이 이주한 분이었다. 기사님으로부터 미국 생활, 조지아의 자연환경, 독일산 차에 대한 혹평, 일본산 차에 대한 칭찬을 들으며 구름이 흩뿌려진 푸른 하늘과, 울창한 푸른 숲만 보이는 도로를 달렸다. 1시간 반 남짓, 드디어 앞으로 1년 동안 살 에덴스에 도착했다.

트리니타스가 임시숙소로 제공한 호텔은 6층 규모의 본 건물에 2층 규모의 부속건물이 붙어있는 형태였다. 이 가운데 내가 사흘만 머물 예정이었던 객실은 1층, 문을 열면 바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어두침침한 조명과 낡은 가구,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 2개가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짐을 내려다 주시던 기사님이 무심코 “리빙 라스베가스에 나온 호텔 같네요”라고 내뱉었다.

좀비도 뛰어야 하는 나라에서… - 해외연수기, KBS 이승철, 미국, LG상남언론재단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호텔 장면

이곳에 대한 평가는 나와 같은 사정으로 같은 호텔에 머물렀던 다른 임차인의 리뷰가 가장 정확하다. 그는 ‘아틀라스 에덴스’ 아파트 리뷰를 작성할 때 “처음 사흘 동안 우리를 소름이 끼치는 남자들이 밤새도록 모텔 밖에서 마약을 하고, 어린 소녀들에게 성희롱하는 가장 수상한 호텔 처넣었다”라고 적었다. 이 임차인은 다행히 사흘만 머물렀지만, 나는 그 호텔에서 무려 아흐레를 머물러야 했다.

입주 연기는 ‘연례행사’

조지아 대학교가 있는 에덴스 지역은 학생용 부동산 수요가 많은 지역이다. 문제는 학생들이 대부분 법적 대응에 미숙하다는 점을 부동산 업체들이 악용한다는 점이다. 건물을 짓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다 지은 것처럼 학부모와 학생들을 속인 뒤 계약하고, 나중에 입주가 지연돼 그들이 피해를 겪는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나도 올해 피해자 2백 세대 중에 한 사람이 됐다.

애초 트리니타스는 8월 10일 예정이었던 입주가 19일에는 가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공지한 지 며칠도 안 돼 26일로 입주일을 미뤘다. 대신 19일부턴 같은 아파트 단지 내 임시숙소를 제공했다. 미국 도착 아흐레 만에 마약 소굴 같았던 호텔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 부랑자가 없는 안전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이후에도 입주가 계속 지연됐다는 것이다. 트리니타스의 미숙한 일 처리는 준공 승인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입주 예정일을 통보하고, 당일 갑작스럽게 연기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렇게 26일, 29일, 30일, 31일을 지나 9월 1일이 돼서야 계약했던 숙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입주 연기 5번 만에 입주한 아파트

잘못 부과한 렌트, 고치는 데 ‘하세월’

트리니타스의 미숙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호텔에 묵었던 것, 임시숙소에 묵었던 것에 대해 렌트를 이중으로 부과하고, 주차비는 호텔, 임시숙소, 계약한 숙소까지 삼중으로 부과했다.

다시금 통화와 이메일로 수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돈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선 답이 없다. 결국 임대사무실을 찾아갔다. 매니저와 상담했지만, IT 부문의 오류일 뿐 자신들은 부과한 적이 없다, 낼 필요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이미 돈을 빼갔는데도 말이다.

결국 입주일이었던 9월 1일, 결행했다. 계약한 숙소의 키를 받기 위한 줄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당황한 매니저를 대신해 슈퍼바이저가 나섰고, 오류를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3주가 지나도 오류는 수정되지 않았고, 다시금 임대사무실 담당자에게 물었지만, 인디애나에 있는 IT팀이 수정하고 있다는 답변만 받았다. 벌써 10월, 입주 계약 시 선입금한 10월 렌트를 다시 내라는 메시지가 날아오지만, 트리니타스는 잘못 부과했던 렌트를 환불해주지 않고 있다.

모르면 거부하고 보는 미국 공무원

미국 시골의 부동산 업체만 미숙할까. 공무원도 미숙하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사회보장번호를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방문연구원을 위한 J-1 비자로 입국한 사람들이 사회보장번호를 받을 때는 미국에서 일하고 급여를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금 관련 증빙이 필요 없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내게 세금 관련 증빙을 요구했다.

먼저, F-1 비자로 입국한 게 아니라 J-1 비자로 입국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20명 남짓의 방문연구원 가운데 여기서 세금 관련 증빙을 요구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마지막으로 그 세금 관련 증빙이 꼭 필요하다면 어떤 양식인지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은 막무가내, 세금 관련 증빙 서류 때문에 학교 측 담당자와 통화를 시도하는 나를 청원경찰을 동원해 쫓아냈다.

일단 물러났다. 잠시 숨을 고르고 청원경찰에게 슈퍼바이저를 불러달라고 했다. 10여 분 뒤 슈퍼바이저가 나와 다시금 세금 관련 증빙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러면 참고할 양식을 달라고 요청했다. 10여 분이 흐른 뒤 다시 나온 슈퍼바이저는 난감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F-1 비자 아니냐고? F-1이 아닌 J-1 비자라고 답하자, 더욱 난감한 얼굴로 J-1 비자는 세금 관련 증빙이 필요 없다며 다른 공무원에게 안내했다. 규정도 모르는 공무원이 만든 촌극이었다.

정착에만 두 달…“그냥 내려놓자”

이처럼 정착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일은 이곳저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다. 엔진오일이 엔진룸을 적실 정도로 새서 일주일 새 중고차를 2번이나 등록하기도 하고, 학비를 수표로 냈는데, 은행이 2차례나 반려해서 수수료를 낸 분도 있다. 사회보장번호를 신청했는데 담당자가 빠뜨렸는지 두 달 만에 신청됐다는 분도 있고, 담당자가 이름을 구분 못해 이름이 비슷한 다른 사람의 정보와 섞여 혼선을 겪는 분도 있다.

내가 겪는 일도 그 많은 혼선 가운데 하나일 거로 생각하며 어느 순간 내려놨다. 그렇게 세 차례에 걸친 이주와 자동차 등록, 사회보장번호 발급, 운전면허증 발급을 받는 데 두 달을 고스란히 바쳤고, 운전면허 발급받을 땐 아무 일 없이 너무 부드럽게 처리돼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였다. 그새 무더웠던 조지아의 여름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