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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체험하는 다인종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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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워싱턴포스트는 1면 커버스토리와 안쪽 2개면에 걸쳐 인종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제목은 ‘Is the all-white neighborhood declining?’ 존 로간이라는 브라운대 사회학과 교수가 1960년대 이후 미국 인구 센서스를 바탕으로 워싱턴DC 일대(버지니아,메릴랜드 포함)의 인종구성 변화를 연구한 결과물인데, 무척 흥미로운 기사였다. 워싱턴DC와 버지니아 메릴랜드는 미국 내에서 소득수준이 높은 대표적인 지역으로, 일찍이 다인종화된 뉴욕과 달리 전통적으로 보수 백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해온 지역이다.

기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이 절대적이었던 이 동네가 갈수록 다인종사회로 변해 지금은 백인이 오히려 소수계(minority)로 뒤바뀐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버지니아주에서도 잘사는 북버지니아의 경우 백인 끼리만 몰려사는(segregated) 지역이 30년전에는 80% 이상에 달했으나, 지금은 부자동네인 페어팩스 카운티만 하더라도 채 2%가 안된다고 한다. 이는 특히 히스패닉과 아시안계 이민자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대로 가면 30년후엔 미국 전역에서 백인이 마이너리티로 물러날 것이고 이로 인한 사회 지형의 변화, 문화 갈등이 커질 것이라는 게 기사의 결론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국 전역에 걸쳐 글로벌 이웃(global neighborhood)이 보편화되는 것과 달리 흑인의 경우 갈수록 끼리끼리 모여사는 지역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가령 워싱턴DC의 경우 소득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동부와 남동부는 흑인인구 비중이 갈수록 늘어, 상당수 동네는 인구 85% 이상이 흑인인 곳으로 바뀌고 있다고 기사는 전했다. 실제 DC를 가로지르는 메트로 가운데 북동부에서 출발하는 레드(red) 라인을 타보면 흑인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띈다.

이런 현상은 당초 DC 동남북에 거주하던 백인들이 속속 빠져나오고 있기 때문인데, 기사에 따르면 백인들의 경우 자기 동네로 흑인들이 이사를 와 흑인 비중이 30% 정도가 되면 뭔가 불안을 느끼게 되고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등진다고 한다. 인종 차별적 발언일 수도 있지만, DC에서는 특히 밤중에 북동부나 남동부쪽은 가지 말라는 말들을 자주 듣는데, 흑인들이 밀집해있어 사고 발생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사는 동네(북버지니아 비엔나)를 둘러봐도 확실히 미국이 다인종 사회란 점을 실감하게 된다. 동네 마트나 식당 어디엘 가도 다양한 피부색이 넘쳐난다. 얼마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초등학교 1학년인 딸 아이가 가입한 걸스카우트 멤버 가족 모임이 있어 참석했는데,그야말로 인종이 다양한 글로벌 모임이었다. 멤버 8명중 백인은 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멕시코, 일본, 방글라데시, 베트남, 이란 이민자 가족이었다,

미국 초등학교는 소속 카운티마다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인종구성까지 자세하게 공개돼있는데, 전통적으로 학군이 좋아 백인 비중이 높았던 패어팩스 카운티 비엔나의 경우도 다인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비엔나 지역 초등학교는 평균적으로 백인이 60-70%, 아시안이 15-20%, 히스패닉이 10-15%, 나머지가 5% 미만(지난 2008년 기준)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새 아시안과 히스패닉 인구 유입이 급증하면서 상당수 학교가 백인 비중이 절반 근처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백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며칠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입주민 파티가 열렸는데, 온통 화이트 어메리칸 일색이었다. 평소 단지내에서 한국인을 포함해 아시안이 꽤 눈에 띄었는데, 이날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만난 ‘앨런 맥과이어’라는 백인 할머니와 얘기하던 중 다인종 문제를 꺼내봤다. 요즘 백인들을 만나면 내가 꺼내는 단골 얘기중 하나가 인종 문제다. 그러자 이 할머니(NBC 프로듀서로 은퇴한 엘리트 할머니) 왈,“나도 그랜드 페어런츠가 독일에서 건너온 이민자 출신이다. 백인들도 따지고 보면 피부색만 같았지 모두 다른 인종들이다. 인종의 다양성이 바로 지금의 미국 경쟁력을 가져온 이유중 하나라고 본다.” 사실 만나는 백인들의 십중팔구는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내가 “혹시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드냐?”고 물었더니 “절대 아니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시 속내는 다르지 않을까.

워싱턴포스트는 화제가 된 기사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필자와 독자들이 온라인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공간을 마련하는데, 앞서 언급한 인종문제를 다룬 기사에는 상당수 백인들이 참여해 익명으로 자기의견을 솔직히 밝히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불안하다는 감정을 드러냈고, 일부는 교육을 덜받은 인종들이 백인 동네에 몰려들어와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댓글을 올린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한 백인은 부자동네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이사와서 집앞 잔디도 깎지 않아 동네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며 불평을 늘어놨다.

미국에 이민온 지 10년이 넘는 한 한국인 이민자 왈,사실 백인들은 겉으로는 다른 인종에 관대하고 배려가 몸에 베어있는 것 같지만 뒤돌아서면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이 상당수라고 한다.물론 유유상종이라고 같은 인종끼리 있을 때 더 편안하고 위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주변에 보면 백인들만의 끼리끼리 문화가 의외로 많다. 연수나온 초기 미국 사회 곳곳을 경험해보자는 생각에서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교회와 성당을 나간 적이 있다. 교회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에 비해 보수적인 성당은 백인이 거의 100%다. 자기들끼리 미사를 올리고, 미사가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네트워크를 다진다.

언젠가 인종 문제로 SAIS 대학원생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학생도 동의했다. 학부는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학생인데, 그 학생 왈, 백인들의 경우 이주자들이 정착하면서 일찍이 다인종화된 서부나 동부 대도시보다는 백인들이 절대다수인 시카고 같은 중부 도시에 가면 왠지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한다.

혹자는 미국 전역에 걸쳐 진행되는 급속한 다인종화는 미국 앞날에 또다른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 류의 주장이다. 사실 다인종화는 인종간 갈등,이로 인한 사회 불안 등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적어도 미국은 태생적으로 주인이 없었던 이민자 국가로 과거 수백년 동안 우호적인 이민정책을 통해 오히려 미국의 경쟁력을 키우는 요소로 승화시켰던 만큼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한 표를 걸고 싶다. 물론 최근에는 과도하게 개방적인 이민 정책이 미국내 일자리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민정책을 뜯어고치자는 얘기도 많이 나오지만 말이다.

이런 판단은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내 아이들이 다니는 미국 초등학교 교육을 보면, 미국이 다인종 사회 답게 다른 소수 인종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고 서로 화학적 결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를 실감케 한다. 예컨대 둘째 아이의 경우 연수나오기전 영어를 거의 준비안하고 나와 아이 본인은 물론 부모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등교 첫날, 학교를 마치고 스쿨버스에서 내린 둘째 아이의 첫마디. “아빠, 학교가 너무 재미있어요”대체 뭐가 그리 좋았을까, 궁금증이 컸는데, 좀 지나면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둘째는 초등학교 킨더(K) 과정인데,한 반에 학생 20명, 교사는 3명이었다. 학급 전체를 운영하는 교사(head teacher)외에 나머지 2명의 보조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해 어려움을 느끼거나 하는 일들을 옆에서 바짝 붙어 도와주고 있었다. 헤드 티처도 나중에 몇 번 면담을 해보니 학생 개개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부모 못지 않았다. 아이가 처음에 영어를 못하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라고 했던 것은 이런 교육 시스템 덕분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회 분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확실히 다인종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키는 엄청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