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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으로 분리된 워싱턴, 스포츠로 하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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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으로 분리된 워싱턴, 스포츠로 하나 됐다.

지난 10월 23일 미 의회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하원 탄핵조사위원회가 로라 쿠퍼 국방부 차관보를 증인으로 불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스캔들 의혹과 관련해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한 비공개 청문회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공화당 하원 2인자인 스티브 스칼리스 의원을 비롯한 20여명의 공화당 강성 의원들이 탄핵 조사장에 난입해 점거하면서 청문회가 4시간 가까이 파행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

트럼프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위를 놓고 민주, 공화 양당의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워싱턴은 유례없는 정치적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탄핵 움직임을 ‘마녀사냥’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다. 민주당은 탄핵 국면을 내년 대선까지 끌고가 선거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고 있다. 이를 알고 있는 공화당과 트럼프 대통령도 민주당의 시도가 유례없는 정치공세라면서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치의 도시 워싱턴에 예상치 못한 언더독(약자)이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성공신화를 만들면서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

사진1.워싱턴 내셔널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뒤 구단 관계자가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

그 주인공은 바로 메이저리그 야구단인 워싱턴 내셔널스다. 사실 내셔널스가 올 시즌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지난 5월말까지 50전 19승 31패로 월드시리즈 진출을 위한 지구 우승은 고사하고 지구 최하위까지 밀렸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디비전 시리즈 진출전에 진출해 밀워키 브루어스를 꺾었지만 상대는 올 시즌 106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LA다저스였다. 특히 LA다저스는 류현진 선수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선수라는 클레이튼 커쇼 등이 버티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사실 워싱턴과 LA간의 경기가 성사됐을 때만 해도 그냥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한번 구경해본다는 샘 치고 디비전 시리즈 티켓을 70달러 가까이 주고 구입했다.

나조차도 큰 기대 없이 본 팀이 예상을 뒤엎고 강팀인 LA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차례로 꺾자 워싱토니언들은 모두 흥분했다. 이들이 이렇게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권력의 중심지로 미국을 대표하는 수도인 워싱턴이었지만 사실 스포츠, 그중에서도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야구에서만큼은 워싱턴은 중심이 아니었다.

사진2.워싱턴 내셔널스가 8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자 우승을 기원하는 야구팬이 기발한 복장으로 방송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치의 수도가 워싱턴이었다면 야구의 수도는 명문 구단인 뉴욕양키스나 시카고 컵스, LA다저스 등이 있는 뉴욕이나 시카고 LA가 야구의 수도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수도인 워싱턴에서 야구의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월드시리즈가 열린 것은 1933년이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쟁쟁한 우승후보인 LA다저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 전통의 강자 등을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 등에서 차례로 격파하고 무려 86년 만에 미국의 수도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게 되자 모든 워싱토니언이 들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1972년부터 2004년까지는 아예 워싱턴을 연고로 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이 없었다. 이미 워싱턴은 두 번이나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수익성 등을 이유로 연고지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파와 정치적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된 워싱턴에서 정치 이야기 외에 다른 공통 이야기를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내셔널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를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폭스뉴스의 진행자 크리스 월리스는 “워싱턴은 매우 다각화되고 정치적 이해관계로 나눠진 상황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야구였다”고 말했다.

사진3. 지난 10월 8일 워싱턴 내셔널스 파크에서 열린 LA다저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4차전. 류현진이 등판하는 경기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이날 관중의 열기는 대단했다.

아무튼 10월 30일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마지막 7차전 경기에서 워싱턴 내셔널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6대2로 꺾으면서 시리즈전적 4승3패로 최종 우승을 차지하자 워싱턴은 물론 내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 워싱턴 인근 도시가 모두 들썩였다.

내셔널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워싱턴 시내에 있는 ‘내셔널스파크’ 야구장에는 비가 쏟아지는데도 1만 6000명이 넘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중계 전광판을 보며 단체 응원전을 펼쳤다. 또 이 광경을 ABC와 NBC, CBS, FOX 등이 생중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CNN의 간판 베터랑 앵커인 울프 블리처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광경은 너무나도 특별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4.11월 2일 백악관 인근에서 열린 대대적인 우승 환영 카퍼레이드. 수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내셔널스의 우승을 축하했다.

여기에 워싱턴 내셔널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미국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웅 만들기가 녹아들면서 더욱 감동을 줬다. 사실 현재 워싱턴에는 맥스 슈워저와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라는 두 명의 우수한 투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슈퍼스타가 없다. 대체로 30대 중후반의 노장 선수와 이제 갓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풋내기 20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런데 이런 팀이 시즌 내내 막강한 전력을 보여준 LA다저스를 디비전 시리즈 5차전에서, 그것도 8회까지 1대3으로 뒤지고 있다가 동점 홈런과 역전 만루 홈런으로 경기를 뒤집은 것은 야구팬이 아닌 사람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셔널스가 우승컵을 들고 오자 워싱턴시는 11월2일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백악관 바로 옆에서 열었다. 워싱턴 연고 구단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것은 1924년 ‘워싱턴 새니터스’이후 9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워싱턴의 중심인 ‘내셔널몰’ 광장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워싱턴 내셔널스의 유니폼인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GO, NATS’를 외쳤다. 남녀노소 모두 옷을 맞춰 입고 나와 우승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워싱턴 시 당국이 연고 팀의 우승을 축하하며 개최한 축하 퍼레이드는 깊어가는 가을을 더욱 느낄 수 있게 만든 한판의 축제마당이었다. 이 때문인지 워싱턴 내셔널스 구단의 마이크 리조 단장은 우승의 원인은 열렬한 응원을 해준 팬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진5.워싱턴내셔널스 팬들이 지난 11월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대대적인 환영행사 참가를 위해 워싱턴 인근 비엔나 역에서 붉은색 옷을 입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내셔널스를 상징하는 붉은 색종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자 워싱턴 거리는 온통 단풍이 물든 것과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연고지 야구팀의 우승이 분열로 점철된 워싱턴에 단합을 안겼으며 시민 모두에게 행복감을 줬다고 말해 감동을 줬다.

퍼레이드를 마치고 의회 의사당 앞에 세워진 무대에서 열린 공식 축하행사에서 선수들과 시민들은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들은 4일에는 백악관에서 트럼트 대통령이 주최한 오찬을 함께 했다.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축하연에는 3500여명의 관중이 지켜봤다. 우리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팀이 연고지에서 카퍼레이드를 한 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