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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미국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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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도착할 때만 해도, 머릿속으로는 우리나라의 전당대회 모습을 떠올렸다. 당원들끼리 체육관에 둘러앉아 후보 이름을 연호하며 구호를 외치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행사장에 도착한 지 채 5분도 안돼,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정치 행사라고는 볼수 없는,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였다.

공화당 대선 경선이 한창인 지난주, 보수주의 정치행동위원회(CPAC) 2012년 행사장을 찾았다. 마침 행사가 열리는 워싱턴DC 메리어트 호텔이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존스홉킨스 SAIS에서 멀지 않은 것 같아 걸어서 갔는데, 역시나 구글맵은 믿으면 안된다. 눈으로는 분명 지근거리인데, 걸으니 무려 30분 넘게 걸렸다.

CPAC(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mmittee)은 일종의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총회로, 미국보수연합(American Conservative Union)과 강경보수단체인 티파티(Tea Party) 공동 주최로 매년 열린다. 올해로 39회째를 맞는다.

아무튼, 행사장에 도착하고 나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 1,2층 전체가 축제처럼 시끌벅적한 게 정치행사 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백명이 운집한 대강당에서 패널간 토론이 벌어지는 한편으로, 곳곳에선 참여자들이 소규모 부스를 차려놓고 자신들의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나 캔디 상자 등을 나눠주고 있었다. 한켠에선 오바마 대통령을 풍자하는 즉석 공연도 벌어졌고, ‘보수의 가치’를 주제로 한 자유토론도 눈에 띄었다.

이색적인 것은 참여자들중 젊은이들이 상당수였다는 점이다. 주최측에 물어보니 전체 참석자 2만5000여명중 30-40% 정도가 학생이라고 한다. 워싱턴DC나 뉴욕 등에서 온 대학생 뿐 아니라 고등학생 참석자도 제법 많았다. Young America Foundation이라는 청년보수단체 회원들이 대부분이고, 개인적으로 ‘보수주의’에 관심이 많아 참석했다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행사장 2층에서는 Leadership Institute 주최로 ‘보수주의 지도자가 되려면…’이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는데,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학생들 관심이 컸다.

사실 이 행사장을 찾은 것은 미국 보수주의 실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서였다. 공화당 대선 경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 보수주의의 중심이 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나절 행사장에 있었지만, 이곳저곳 돌아보며, 몇몇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확실히 예상대로 ‘미국 보수주의는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갔던 다음날 이번 대선 경선에 뛰어든 후보들이 일제히 행사장을 찾아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고 하지만, 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자신을 Tea Party 회원이라고 소개한 한 남자는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이 이길 것으로 보냐”는 물음에 뜻밖에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했다. “왜냐”고 되물었더니, 세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는 몇 번의 선거를 경험했지만 이번처럼 공화당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로 싸운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바마를 물리칠 뛰어난 후보가 없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지금 시점이 보수주의가 자리잡기에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의미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보수주의 가치인 정부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government)가 이번 경제위기로 설 땅이 없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마도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시장에 깊숙이 개입해 유럽식 사회 민주주의를 닮아가는 것을 걱정하는 의미로 이해됐다.

‘보수의 부흥’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는 “지금 우리에겐 베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같은 선지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Barry Goldwater가 누군지 궁금해 아이폰으로 검색해보니, 미국 보수주의의 선구자격인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행사장에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3명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이 걸렸는데, 그 중 한명이 Barry Goldwater였다. 나머지 두명은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영국 수상이었다.

물론 행사장에서 만난 상당수는 특정 후보 지지자들로,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할 것이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합리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미트 롬니 지지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Tea Party 소속 회원들중에선 닉 샌토럼과 뉴트 깅그리치 지지자들이 절반으로 나뉘는 것 같았다.

행사장 2층 Tea Party 부스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지금이야 말로 보수가 단결해 오바마를 이길 한명의 후보로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 학생의 주장대로 현실이 움직일 수 있을까?

클린턴 행정부 때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교수는 “Aftershock” 라는 책에서 미국 역사를 Pendulum(시계추)에 비교했다. 예컨대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전에는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사회적 모순이 극으로 치닫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New Deal 정책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모순을 해결해가는 과정(이른바 Great Prosperity 기간), 1980년대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이후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다시 모순이 심화되는 것처럼 역사는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반복한다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 콜럼비아대 교수도 최근 펴낸 “The Price of Civilization”이란 책에서, 미국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임금 수준(실질임금 기준)은 1973년에 피크를 치고 이후 줄곧 하락한 반면, 상위 1%로 부의 집중이 심화돼 소득 불평등 지수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본다면, 금융위기(Great Recession) 이후 지금은 모순이 극한까지 달해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이런 분석이 맞다면 확실히 지금은 보수주의가 설 땅이 갈수록 좁아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1%의 소수를 타깃으로 한 ‘Occupy Wall Street’가 괜히 등장한 게 아닌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