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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의 숨은 보석, 필립스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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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의 숨은 보석, 필립스 콜렉션

미국 워싱턴DC의 여러 명소들 가운데 제가 가장 선호하는 곳은 ‘필립스 콜렉션(Phillips Collection)’과 ‘허시혼 미술관’(Hirshhorn Museum)입니다.

워싱턴DC 내셔널 몰에 위치해 있는 허시혼과 달리 듀퐁 서클 인근에 위치한 필립스 콜렉션은 그 매력에 비해 아직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필립스 콜렉션은 제가 워싱턴DC를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꼭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하는 숨은 보석같은 미술관 입니다.

필립스 콜렉션은 미국 최초의 모던아트 미술관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모던아트 미술관인 뉴욕현대미술관(MoMA)보다 8년 앞선 1921년 개관했습니다. 필립스 콜렉션을 만든 던칸 필립스는 피츠버그 철강 사업가 집안의 후손입니다. 형재애가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예일대에 먼저 입학한 형은 동생인 던칸 필립스가 다음해 예일대에 입할 �까지 1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해서죠. 그런데 그렇게 친하던 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동생 던칸 필립스는 형을 기념하기 위해 자택의 일부를 갤러리로 만듭니다. 이후 던칸 필립스는 화가인 마조리 애커와 결혼하면서 갤러리를 일반에 개방합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연수하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대부분의 뮤지엄이 ‘무료’라는 점 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수도에 위치한 미술관, 박물관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필립스 콜렉션은 워싱턴DC의 몇 안 되는 유료 미술관입니다. 저는 1년 회원권을 구매했습니다. 필립스 콜렉션에 있는 ‘로스코의 방’ 때문입니다.

네, 맞습니다. ‘작품을 보면 눈물이 난다’라는 그 마크 로스코입니다. 실제 필립스 콜렉션에 가서 ’로스코의 방’에 앉아 앉아있으면 성당이나 사찰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을 경험합니다.

한국에선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가 지난 2015년 예술의 전당에서 ‘마크 로스코’ 기획전을 열었습니다. 당시 코바나컨텐츠는 한국 전시를 위해 워싱턴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이 소장하고 있던 로스코 작품 50여점을 대여했다고 합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뉩니다. 상당 수의 관객들이 그냥 ‘쓱’ 지나갑니다.

로스코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추상’입니다. 붉은 바탕에 오렌지색 네모 또는 검붉은 바탕에 노란색 네모 등등 입니다. 이게 무슨 ‘예술 작품’이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복사본들을 여러 개 구입해 방에 여기저기 세워 놓았더니 아들 녀석이 보고는 이 정도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로스코’ 관람의 또 다른 형태는 ‘명상’에 잠기는 것입니다.

필립스 콜렉션에 있는 ‘로스코의 방’은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명상에 잠기기에 좋은 곳입니다.

‘로스코의 방’에 들어 서면 방의 네 벽면에서 모두 로스코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방의 가운데에는 의자를 놓아 관람객이 앉아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크 로스코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관람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다소 어두운 곳에서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방의 분위기는 살짝 어둡습니다.

오롯이 감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로스코의 방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로스코의 작품을 응시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는 ‘형태로부터 색(color)을 해방시켰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Reductionism in Art and Brain Science)라는 책을 쓴 에릭 캔델(Eric R. Kandel)은 뇌에는 색깔을 처리하는 전담 영역이 있어 형태가 없어도 색 그 자체로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합니다.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뇌가 색체와 관련한 연상을 이끌어 내서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에릭 캔델은 설명합니다.

더 많은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싶다면 워싱턴 국립 미술관으로 가면 됩니다. 워싱턴 국립 미술관은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서관에는 1900년 이전 작품들이, 동관에는 그 이후 ‘모던아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동관의 가장 위층에는 층 전체가 ‘마크 로스코’ 작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필립스 콜렉션 얘기를 하겠습니다.

필립스 콜렉션에는 ‘로스코의 방’처럼 정적인 공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상주의 화가 르루아르의 대표작인 ‘선상 파티의 점심’(Luncheon of the Boating Party)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낯선 미술관에 가면 기념품 샵을 먼저 방문합니다. 미술관에 걸려있는 다양한 작품들 중에 대표작 또는 기획작품을 기념품으로 파는 경우가 많아 짧은 시간에 그 미술관의 ‘핵심’을 파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선상 파티의 점심’은 필립스 콜렉션에서 머그잔에 담아 팔고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사실상 필립스 콜렉션을 대표한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선상 파티의 점심을 한동안 처다 보고 있으려니 한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겁니다. 자신을 필라델피아 지역 박물관의 큐레이터라고 소개한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모나리자가 있다면 르루아르에게는 ‘선상 파티의 점심’이 있다고 설명하더군요. 다른 미술관에서 수십 개의 르루아르 작품과 ‘선상 파티 위의 점심’을 교차해 전시할 것을 요청했는데 필립스 콜렉션이 거부했을 정도로 필립스 콜렉션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합니다.

필립스 콜렉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https://www.phillipscollection.org)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