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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를 넘어서… 美 다문화 교육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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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를 넘어서… 美 다문화 교육의 명암

가을 학기 시작 직전 학교 개방(open house) 행사일인 지난해 8월 19일 오전 찾은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州) 페어팩스 카운티 맥클린 지역 공립 스프링힐 초등학교의 풍경은, 흡사 국제 학교 같았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동북아시아와 아랍 국가, 인도 등으로 출신을 짐작하게 해 주는 외모의 가족이 워낙 많아 단순 비중으로는 아시아계가 주류처럼 보일 정도였고 가족 안에서는 모국어를 쓰는 경우가 흔했다.

대략 알고는 있었다. 버지니아, 특히 수도 워싱턴DC와 가까운 페어팩스에는 미국에 파견된 각 나라 해외 주재원 가족이 적지 않게 산다. ‘전형적인’ 미국은 아니다.

▦인터내셔널

학교 역시 국제적인 분위기에 얼마간 익숙지 싶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의 ‘환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모든 것이 낯선 터라 하릴없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방인을 맞으며 소통을 막는 언어의 문턱이나마 먼저 낮춰 주려 학교가 애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에 왔으니 당연히 영어로 말하라’는 식의 태도는 적어도 아니었던 것이, 아이 전언에 따르면, 자기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 번역기를 동원할망정 분명 한국어를 모를 교사가 영어만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목표는 ‘교육 기회의 균등 보장’이다. 홈페이지를 보면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은 인종, 성별, 사회ㆍ경제적 지위 등과 함께 ‘집에서 쓰는 언어’를 형평성(equity) 제약 요인에 포함시키며 학생들이 잠재력 극대화에 필요한 양질의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받는 데 이들 요인이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노라 약속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 홈페이지.

수단마저 미국답다. 실용적이다. 우열 없는 공존이 다문화 교육의 종착지일지언정 이주민한테는 아무래도 ‘적응’이 급선무이고, 얼마나 빨리 제 생각을 충분히 섬세하게 전달하거나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주류 언어 구사 역량을 끌어올리느냐가 이후 성공의 관건 중 하나다. 때문에 일부 교과에 한해, 영어가 서툰 이주 학생들을 대상으로 ‘ESOL(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전담 교사를 붙이고 일정 기간 원어민들과 떼어 수준별 수업을 제공하는 것은 차별이라기보다 배려에 가깝다.

ESOL 교사가 진행하는 ‘연착륙’ 프로그램의 역할은 두 가지다. 무엇보다, 영어 습득 유도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 읽기, 쓰기를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또 하나는 교과 학습 보완이다. 미 연방 교육부는 각 교육구에, 언어 미숙 탓에 ‘영어 소수’ 학생들이 겪을 수 있는 교과 학업 결손을 방지하기 위한 과정을 설계해 시행하게끔 독려하고 있는데 정규 과목 이해를 돕는 ‘보조 교사’ 노릇도 ESOL 교사의 몫이다. 2학년으로 편입한 아이는 이런 분반 수업을 위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상대로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이 주관한 ESOL 등급 테스트를 개학 전에 받았다.

▦그래도 영어

한국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미국과 같을 수는 없다. 더 스스럼없고 수평적인 듯한 사제 간 관계나 분위기는 예상대로였다. ‘기본 문화’ 덕이라는 것이 내 짐작인데, 확실히 미국인은 훨씬 더 개별적ㆍ독립적이다. ‘집단으로부터의 자유’가 ‘강박’ 수준이다. 서로 이름을 부르고 타인과 눈을 맞추며, 그 욕망을 확인한다.

공동체는 개인의 완성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학교는 전위 조직이고, 교사들은 소명 의식이 단단하다. 아이들의 잠재적 가능성에 먼저 주목하고, 동기 부여를 위한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 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다. 오히려 더 너그럽다. 청교도의 후손이어서일까. 감내해야 할 사명으로 여기는 듯 불통이라는 시련을 견디며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도전을 저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도리어 아이들에게 배운다”는 낙관과 긍정으로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 나간다.


지난해 8월 개학을 며칠 앞두고 미국 버지니아주 스프링힐 초등학교가 학부모들에게 교실을 미리 공개했다. 이주민 학생이 많아 국제 학교 분위기였다.

문제는 그것이 ‘선교’이거나 ‘시혜’라는 인식이다. 아직 미국은 세계의 꼭대기이고 영어는 권력이다. 자부와 오만으로 치면, 여전히 중국인을 미국인에 견줄 수 없다. 자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위계와 우열 구도가 예전 그대로인 그들의 관념 세계에서 소수 이방 문화는 극복되고 소외돼야 하는 무엇일 공산이 크다. 미국에 온 이상 최대한 녹아 드는 것이 최선이고 이방인이 기회를 잡으려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다. 미국 다문화 교육에, 독일 같은 유럽 나라가 도입한 상호 문화 교육은 따로 포함되지 않는다. 집에서까지 모국어보다 영어를 쓰게 하는 식으로 서두르지는 말라고 조언하거나 수업 때 자국 문화를 소개하게 해 주는 정도다.

▦기회의 나라

이민과 식민(植民)의 나라이다 보니, 양상이 적대적이든 어떻든 간에 미국은 공생과 그 활용에 익숙해진 것 같다. 거기서 저력이라 할 만한 것이 배태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계 유명인사인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18일 페이스북에 “그들은 다인종 인재를 곳곳에 배치하고 능력을 발휘하도록 시스템을 정비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가진 한계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사는 ‘차별 배제’의 역사다. ‘기회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다문화 교육이 태동한 것도, 흑백 균열이 촉발한 시민권 운동에서였다. 동화 정책은 그런 수세적 이력의 산물이다. 전선은 인종에서 민족으로 확대됐고,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야 갈등이 봉합될 수 있었다. 억압적 성격을 감추고 있는 것이 ‘용광로(melting pot)’라는 클리셰다.

공교롭게 지난해 연말 비슷한 시기 넷플릭스가 선보인 두 영화 ‘패싱’과 ‘파워 오브 도그’는 시대적 배경과 문제 의식도 유사했는데, 제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냈다가는 차별과 혐오를 피할 수 없던 1920년대 당시 미국 인종적ㆍ성적 소수자의 처지를 다뤘다. 하지만 정체성 상실은 인권 피해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의 불행이다.

▦코즈머폴리턴

세계가 섞이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됐다. 민족 기반 공동체 의식이 묽어졌다. 더 이상 젊은 세대에게는 ‘한반도 남북 통일’이 지상 과제가 아니다. 과거 유목민의 불가피한 운명적 ‘디아스포라(離散)’가 대부분이던 이주는 이제, 자기 삶을 꾸리기에 적합한 곳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코즈머폴리턴’의 자발적인 선택이 됐다. 여러 문화적 배경과 정체성은 더는 약점이 아니라 이주민이 배타적으로 누리는 강점이다.

이질적인 문화는 길항하지 않는다. 경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고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 이주민을 착근시켜야 가능하다. 그들 자손이 밥그릇을 빼앗아 가리라는 불안을 극복해야 한다. 노동력 충당 차원에만 머물지 않으려면, 다양성 강화를 적극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다문화 교육은 전범만이 아니다. 반면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