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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의료체계 NHS와 코로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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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의료체계 NHS와 코로나 바이러스

영국에서 주거지(주소)가 생기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주거지 인근의 동네 병원인 GP(General Practice)에 등록을 하는 일이다. 동네 주치의나 주치병원쯤에 해당될 것이다. 몸이 아프면 등록한 GP를 찾아가서 1차 진료를 받고, 필요한 경우에는 GP의 의사가 상급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준다. 진료비는 내지 않고 처방 받은 일부 의약품의 경우는 환자가 약값을 내야 한다.

영국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가 병이 도져 큰일을 겪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지만 나의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내가 등록한 윔블던 역 근처 GP의 경우 어린 아이들이 아프다고 하면 그날로 빈 시간을 찾아 약속을 잡아주곤 했다. 하지만 피부과와 같은 비교적 덜 시급한 질환의 경우에는 최소 석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립 병원을 찾기도 했다. 사립 병원 피부과를 찾았을 때는 10분 정도 진찰하고 얘기를 나눴는데 300파운드, 우리 돈으로 45만원이 청구됐다. GP에서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의 병이 아니라면 경우에 따라선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진료비를 안받는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갖가지 장비를 사용해 병을 찾아내는 방식의 진료는 아니지만 GP 의사들은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했다. 무료로 진료를 받으면서도 의사들의 진심이 느껴지니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때가 많았다. 10 여 년 전 영국에서 생활했던 지인은 아이가 팔에 깁스를 해야 하는데, 두려움에 떠는 아이에게 의사가 다양한 색깔의 석고를 내놓으며 그 중 마음에 드는 색깔의 석고를 고르라며 긴장을 풀어줬다는 일화를 전해주기도 했다. 무상 의료인데도 환자를 그처럼 존중하는 태도에 영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봤다는 경험담이었다.

영국의 의료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건의료서비스,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1945년 노동당이 집권한 직후인 1948년 정식 출범했다. 2차 대전 이후 사회 개혁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부자이건 빈자이건 누구나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이상을 토대로 출발했다. 일반 재정이 재원인 보건의료체계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합법적인 영국 거주자는 대개의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단기 방문자에게도 응급의료나 감염병 치료는 무상으로 제공된다.

영국인들은 스스로가 영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집단을 꼽으라고 할 때, 영국 왕실, 영국 군대, 그리고 BBC와 더불어 NHS를 최우선으로 꼽는다고 한다. 몇 년 전 조사에서는 영국인들의 70%가 NHS를 영국이 이룩한 가장 큰 성취로 꼽기도 했다. 그래서 NHS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영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직업으로 꼽힌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다. 과거에 비해 지출은 늘었지만 투입을 늘리는 것은 쉽지 않다. 영국은 더 이상 과거의 영국과는 여러모로 같은 형편이 아니다. 영국인들의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보편적 무상의료’라는 가치는 살아남았다고 해도 노동당과 보수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할 때마다 부침을 겪으며 NHS는 내상도 입었다. 재정 투입도 어려워지는데 고령화로 만성질환자에 대한 의료 수요는 늘어났다. 의료서비스의 질이 유지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NHS 예산의 60%가 의사와 간호사 등의 인건비이다. 이 돈을 줄이려고 영국 보수당 정부는 2010년부터 이들의 임금 인상률을 1% 이내로 제한했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의사와 간호사의 월급이 매년 줄어드는 셈이다. 일선 의료인력의 월급을 깎을 정도이니 의료 인력이 충분할 리 없다. NHS에 대한 만족도가 2010년 70%에서 2018년 53%로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환자들의 대기 시간은 길어져 매년 3천명 이상이 진료를 받기 위해 1년 이상을 기다리기도 한다. 영국의 1인 당 의사와 간호사 수, 그리고 병상 수는 OECD 21개 국 가운데에서도 최저 수준이어서 현장에선 숙련된 의료 인력과 시설이 태부족이고 이로 인한 의료의 질 저하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공공의료 개선을 추진하던 것이 예산문제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2012년 이후 13만 명 이상이 죽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여기에 전체 의사의 11%가 유럽 출신인데, 브렉시트로 이들 가운데 상당 수가 영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가뜩이나 의료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국의 의료시스템은 환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경우에 대처하기에는 이미 취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환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으니 사망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보리스 총리가 감염자 수가 늘어나면 자연면역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을 때는 혀를 찼지만, 영국의 의료 시스템을 고려하면, 이미 2명 중 1명은 감염됐을 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금, 영국 정부로서도 집에 있으라는 말 외에 과연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국가적 자해 행위라고 평가받는 영국의 EU 탈퇴 결정과 그 이후의 국제적 민폐, 그리고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감염자는 폭증하고 컨트롤 타워인 총리와 보건부 장관마저 확진자가 되는 영국의 모습은 영국이 과거의 영화로부터 실로 멀어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영국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비타민으로 면역력을 높이고 마스크와 손 세정제로 스스로를 철저히 방어해야 한다는 각오를 새삼 다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