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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연수기4 – 내비게이션을 맹신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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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틀랜타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 동안 제일 친한 친구인 석원이의 여동생 연종이가 시애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동남부 애틀랜타에서 미국 북서부 시애틀까지는 비행기로만 4시간 가까이 걸린다. 결혼식이 끝난 뒤 석원이 가족과 우리 가족은 시애틀 관광에 나섰다.

9인승 밴을 빌려 두 가족이 모두 한 차에 타고 시애틀에서 2시간 거리인 마운트 래이니어(Mt. Rainier) 국립공원을 찾아갔다. 시애틀 엽서에서 보면 항상 뒷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만년설의 휴화산이다. 드라이브 코스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는데 우린 파라다이스 코스를 택했다. 눈에 펼쳐진 광경이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모습인지 갸우뚱거릴 정도로 몽환적인 장면들이 이어졌다. 원근감을 가늠할 수 없게 안개마저 끼어 그러한 느낌이 더 했다.

산에서 내려 오자 오후 4시가 다 됐다. 다음 일정을 놓고 차 안에서 한바탕 토론이 있었다. 여자들은 시애틀로 돌아가서 시내 관광을 더 하자고 주장한 반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친구는 2시간 거리인 세인트 헬렌스 화산을 가고 싶어했다. 1980년 5월18일 화산이 폭발, 인근 수십마일의 산림을 화산재로 뒤 덮고 50명이 넘는 목숨까지 앗아간 산이다. 시간상 다소 무리인 점이 없지 않았지만 다시 시애틀 올 일이 있을까 싶어 우린 세인트 헬렌스 화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친구가 내비게이션을 가져온 덕에 초행길이었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운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차가 작은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급기야 내비게이션은 멀쩡한 포장 도로를 놔 두고 비포장 도로로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비포장 도로는 언뜻 봤을 때 야트막한 산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비포장 도로를 무시하고 포장 도로로 갔다. 다행히 내비게이션은 포장 도로를 기점으로 다시 경로 검색을 하더니 새로운 길을 찾아내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우리 차는 어느새 으슥하기 짝이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간혹 허름한 집들이 나오긴 했지만 사람이 사는 집인지 의심될 정도였고, 오가는 차가 한 대는 없었다. 슬슬 불안감과 공포감이 엄습했다.

차를 세워 다시 목적지를 입력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다시 운전을 해 가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도로 옆 안내문을 보고 “어, 여긴 ‘프라이빗 로드’(Private Road)라는데?” 라고 외쳤다. 개인 도로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다. 그러나 표지판을 자세히 살펴 보던 우리 일행은 순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판엔 프라이빗 로드가 아니라 ‘프리미티브 로드’(Primitive Road)라고 쓰여져 있었다. 도대체 도로 상태가 얼마나 원시적이길래 프리미티브 로드란 말인가. 우린 ‘원시 도로’, ‘동물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레 생긴 도로’, ‘인간의 손길이 가지 않은 도로’, ‘원시인이 사는 마을로 통하는 도로’ 등 별별 다른 해석을 다 내 놓았다. 그러나 이 길로 계속 갈 수 없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우린 차를 돌려 지금까지 온 길을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30분 정도를 돌아가자 큰 길이 나타났고 그 때부터 다시 경로를 탐색, 세인트 헬렌스 산을 찾아갔다.

이렇게 헤매는 바람에 세인트 헬렌스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러나 세인트 헬렌스 화산은 충분한 대가를 줬다.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풍광은 우리 일행 모두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화산의 규모와 깊이는 상상을 불허했다. 화산재가 떨어진 곳은 아직도 나무가 전혀 자라지 않고 있었다. 화산재가 뒤 덮은 지역에 들어선 지 한참을 더 달려서야 우린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전망대에 서서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연의 신비와 힘을 숭배할 수 밖에 없었다. 반 토막이 화산 폭발로 날아가 움푹 패인 세인트 헬렌스 산과 해가 지며 붉게 물든 하늘, 화산재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주변의 풍광은 평생 잊지 못할 장면들이었다.

물론 내비게이션 사양과 검색 조건들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미국에선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운전하다 보면 이렇게 낭패를 당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따라서 여행 전엔 미리 인터넷 사이트 ‘구글 어스’나 ‘맵퀘스트’ 등에서 지도와 경로를 뽑아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내비게이션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매일 가던 길만 가게 된다. 또 방향 감각이나 길눈을 키울 수도 없게 된다. 미국에서 알게 된 한국 지인들 중에는 이 때문에 1년 동안 살면서도 지리를 전혀 익히지 못한 분들도 있었다.

사실 내비게이션 보다는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여행이 더 재미있다. 지도는 운전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Information Center)나 비지터 센터(Visitor Center) 등에 가면 쉽게 구할 수가 있고 이곳에선 다른 여행 정보들도 얻을 수가 있다. 인터넷 등에서 경치가 좋은 드라이브 코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찾아보는 것도 유용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