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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미국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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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미국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배운 것

1. 아이가 나흘 동안 배가 아프다고 난리였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도 고기만 먹고 야채는 하나도 안 먹었었는데, 미국이니까 더 오죽했을까. 삼시세끼 고기만 달라고 조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먹이게 됐고, 결국 제 힘으로 일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이럴 때 먹이라는 아이용 변비약을 먹여 봐도 아무 소식이 없고, 결국 한국 의사가 운영하는 소아과를 예약하게 됐다.

의사와 상담은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다. 무슨 조치를 했냐고 묻길래, 그 아이용 변비약을 먹였다고 했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안 그래도 그거 먹이라고 말할까 했는데” 라며 말을 줄인다. 청결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게 달갑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는데, 결국 아무래도 부모가 관장을 해야 할 것 같다니까 찌푸린 표정으로 마지못해 나섰다. 아이를 눕히고 다리를 가슴에 붙인 다음에 그곳에 약물을 넣는 것이었는데, 자기는 약물만 넣고 나면 나갈테니까 부모가 일단 손으로 약물이 못 나오게 꼭 잡고 있다가 혹시 잘 나오지 않으면 뒤처리도 알아서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리고 10분 쯤 지나도 아이만 괴로워하고 크게 차도가 없어서, 결국 옆에 놓여있던 의료용 장갑을 손에 끼고 직접 문제의 그 물건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야 일이 마무리됐는데, 어찌나 단단하게 굳어버렸는지 약물이 아니었다면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제야 문을 열고 머리만 내민 의사는 일이 다 끝났느냐고, 끝났으면 결과물은 또 이곳에 버리지 말고 부모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이렇게 하고 낸 병원비는 99달러, 12만원 정도였다.

2. 아이의 프라이버시도 걸려 있는데다, 또 구질구질하기도 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결국 그 이후에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알아보니까 주변 마트에서 쉽게 아이 관장용 약물을 살 수 있었다. 6개 들이 한 박스에 6달러, 그러니까 한 번에 천 원 정도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병원 가는 비용의 백분의 1이면 된다. 한 번 해보고 나니까 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도 했다. 장기간 여행을 다닐 때도 하나씩 가지고 다니다가 급할 때 쓰기도 좋았다.

3. 그러고 보면 미국은 동네 마트부터 대형마트, 아예 약국을 표방하는 CVS까지 다양한 약을 소매로 그냥 팔고 있다. 감기약 배탈약 건강기능식품 등등을 오리지널약과 더 싼 카피약을 같이 펼쳐놓고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아마존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배송을 해주기도 한다. 병원비가 비싸다, 보험이 보편적이지 않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미국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와 별도로 이렇게 다양한 약과 건강식품을 내가 선택해서 살 수 있고,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었다.

나 같은 경우는 2,3년 전부터 어깨와 목에 근육통이 시작돼서 심한 두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 오기 전에 한국 병원에서 1년간 연수를 간다고 설명하고 최대한 약을 타오긴 했지만 곧 동이 날 상황이 됐다. 절박한 마음으로 인터넷을 찾아봤고, 미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한 약이 효과가 있을거란 글을 찾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아마존에 주문을 했는데, 웬걸,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때그때 병원에 가서 약을 짓고, 얼마 되지 않으면 또 떨어지고 할텐데 하는 생각에, 이 약도 귀국 때 짐가방에 넣어가려고 몇 병 챙겨뒀다.

4. 이런 약이 하나 둘이 아니다. 또 하나 대표적인 것이 멜라토닌이다. 밤에 잠자기 전에 한알을 먹으면 쉽게 잠이 들고 아침까지 왠만해서 깨는 일이 없다. 예전부터 외국에 자주 드나드는 사업가들, 외교관들한테 출장 첫날 이 약을 먹고 잠에 들면 시차적응을 쉽게 할 수 있어서 애용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백 알이 들어있는 한 통에 한국 돈으로 만원 안팎, 그러니까 한 알에 백원 정도 드는 셈이다. 처음엔 호기심에, 나중에는 필요에 따라서 종종 먹어봤는데, 효과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약은 현재 의사 처방 없이는 수입이나 구입이 불가능하다.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정말 부작용이 있나, 미국에서 유명한 의료 사이트, 메이요 클리닉을 찾았더니 두통, 어지러움, 메스꺼움 정도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적어놨다. 이 정도면 오히려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먹고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듣기로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장 많이 보내는, 또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장 많이 싸가는 약 중에 하나가 이 멜라토닌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어떻게든 좀 보내줄 수 없겠느냐는 개인적인 부탁도 여럿 받아봤다. 몇 년 째 이정도 약은 풀어주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이 이어지지만, 권한을 쥔 식약처는 요지부동인 상태다.

이렇다 보니, 이곳 미국에는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약을 항공 택배로 보내주는 일로 생업을 잇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코스트코 같은 곳에 가면, 종이에 빼곡이 사야 할 약을 적어서는 카트에 수북히 약을 사서 결제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5. 미국에선 되도록 한국 기사를 찾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최근에 제목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클릭을 하게 된 기사가 있었다. 올해 감기 환자가 70% 이상 줄었다는 기사였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접촉을 줄였고 거기다가 마스크도 계속 쓰다보니까 감기가 덜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코로나도 순기능이 있다는 말인가, 흥미롭네’ 생각하는 순간, 기사는 갑자기 방향을 크게 틀었다. 그래서 약을 타러 오는 사람들이 줄었고, 결과적으로 약국들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는 팩트가 약국의 경영난이란 결론으로 이어지는건 뭐랄까, 참신한 전개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한국 소비자들이 대부분 약을 자신이 선택할 수 없게 된 데는 이런 논리가 한몫했다는 것,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트나 편의점에서 두통약, 파스, 밴드 같은 기초 의약품을 팔게 된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부작용이 있고 오남용 위험이 있어서 안된다는 주장도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일까. 한 유명 비타민 음료, 또 비타민 알약은 유사 제품을 만들어서 마트에서 팔았다가 곤욕을 치렀던 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치인들 중에도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국민 선택권을 넓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이 정작 힘을 갖게 되자 그런 주장을 무르는 경우도 적잖이 봐왔다. 관련 단체가 힘이 세고 결집이 잘 되다 보니까,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귀국 짐을 싸면서, 본인용으로나 선물용으로나 차곡차곡 쌓이는 약병을 보면서, 언제쯤 한국 소비자들은 자기 선택권을 누리게 될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