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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중국…연수 개시 2개월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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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 대로 중국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다. 베이징에 정착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처음 며칠 나와 가족들을 언짢고 불편하게 만든 것은 주로
피상적인 현상들이었다. 황사현상을 매일 겪는 수준의 공기오염, 과일과 채소를 빼면 서울보다
싼 걸 찾을 수 없는 살인적인 물가, 신호등 색깔이 뭐건 간에 횡단보도로 돌진하는 차량 행렬,
아기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담배연기를 내뿜는 애연가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애들 변을 보
게 하는 중국 부모들…. 아마 중국에 대한 불만을 일일이 늘어놓자면 하루가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라고
나 할까. 이걸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현상은 꽤 뿌리가 깊어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외국인이 중국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실감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때는 지난 9월 4일. 연수기관인 중국런민대학의 등록일이었다. 내가 가져간 서류들을 살피던
런민대 유학생 사무실 관계자가 나와 내 가족들의 비자를 보더니 대뜸 “이 비자로는 우리 학교
에서 1년간 공부할 수 없다. 입국 후 3개월이 되면 당신과 가족들은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라
고 했다. 처음으로 등교한 날 들은 얘기치곤 꽤 가혹했다.



나와 가족들이 받은 비자는 유효기간 90일짜리 F(방문) 비자다. 런민대 국제관계학원에서 나를
1년간 방문학자로 초청하면서 받으라고 안내해준 비자고, 서울 주재 중국대사관에서도 아무 문
제없이(취재활동 금지를 조건으로 내걸긴 했지만) 내준 비자다. F 비자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최장 유효기간은 180일이고 유효기간 이상을 체류하려면 연장을 해야 한다. 학교 측에선 “당신
이 받은 F 비자는 유효기간이 90일짜리지만 중국 입국 후 비자를 연장하면 1년 체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비행기를 탔는데 막상 학교에 와보니 말이 달라진 것이다. “왜 갑자기
내 비자에 문제가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9월 1일을 기해 비자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바뀐 비자 규정에 따라 우리 가족이 받은 F 비자는 연장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 경우엔 해결책이 있었다. F 비자를 X(학생) 비자로 바꿔 거류증을 신청하
면 1년간 중국에서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아들은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마저도 불가능하다. 학교 관계자는 “가족과 함께 중국에 살고 싶으면 당신 가족은 한국에 돌아
가 새로운 비자를 받아와야 한다. 또 당신 아내와 아들이 당신 가족임을 입증하는 서류도 서울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받아오라”고 했다. 결국 왕복 항공권(베이징-서울) 두 장이 있어야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얘기를 듣던 나는 기분이 몹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내 비자에 문제가 생긴 것은 내가 뭘 잘못
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부가 별안간 비자 규정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학교 관계자는 나를
마치 잠재적 죄인으로 취급했다. 말투도 다분히 경고에 가까웠다.



멀쩡한 비자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런 상황을
만든 정부가 1차 책임을 지는 게 정답이다. 아마 대다수의 선진국이나 우리나라 같았으면 비자
규정 변경으로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을 위해 유예기간이나 각종 구제책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 있는 정부의 태도다. 하지만 중국에서 그런 걸 바라는 건 아직은 사치인 것 같다.



더 기가 찬 것은 학교 측의 태도다. ‘F 비자만 받아오면 된다’(국제관계학원 관계자)며 안심시
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법체류자가 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유학생 사무실 관계자)고
겁을 주니 말이다. 내가 보기엔 중국 정부 다음으로 책임이 큰 게 학교 측인데, 구제책이나 도움
의 손길을 건네기는커녕 ‘정부 정책이 바뀐 거니 우린 책임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버스 한 대(중국 정부)가 내 옷에 흙탕물을 튀게 했는데 타고 있던 승객 하나(학교)가 “그 옷 입
고 아무 데도 못 가니까 돈 좀 주고 깨끗이 빨아 입으라”고 큰소리치는 격이다. 말로라도 “안타
깝게 됐다. 미안하지만 한국에 다녀와야겠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말투도 시종 싸늘함을
넘어 위협조다.



어쨌거나 갑자기 생긴 비자 문제 때문에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과 비자 대행업체 등 이곳저곳을
쑤시며 해결책을 알아보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대사관에서조차 “중국에선 그런 일 비일비
재해요”라는 식이니 말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아내와 아들은 10월 중 원치 않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다. 가을 여행 성수기 시즌이라 100만원은 족히 깨질 것이다. 서울에 간다고
해서 해결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중국대사관이 과연 새로운 비자와 가족관계증명 서류를 내줄지,
내준다면 언제 내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아내와 아들은 돌아오는 항공편 일정도 확정하지 못한
채 서울에서 적어도 1주일 동안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고, 그 기간만큼 아들은 한 학기 등
록금 400만원짜리 유치원에도 결석해야 한다. 수업료로 치부하고 잊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과
돈이다. 또 이 과정에서 치러야 할 정신적 고통은 또 어떤가.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 중국인이 하는 말을 무턱대고 믿지 말 것. 중국인이 특별히
거짓말을 잘하거나 악의에 가득 차서가 아니라, 일이 잘못될 경우 절대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 남에게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이면 절대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따라서 중국인이 하는 말을 들을 때는 아무
리 사소한 사안이라도 잘 새겨듣고, 크로스 체크와 유사시 대비책 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특히 비자 문제와 같이 중대한 사안의 경우 중국인 한 사람의 말만 믿고 안심했다간 나처럼 큰 낭패
를 볼 수도 있다. 차기 중국 연수자들께서는 비자 문제를 특별히 꼼꼼히 챙기셔야 할 것 같다.



또 이번 일을 통해 중국이 우쭐거린다는 느낌도 받았다. 한때 중국인들이 느끼던 후진국 콤플렉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와 G2 국가로의 급부상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되고, 이제 슬슬 배부른
소리들을 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중국 기관의 공식 초청을 받아 입국한 외국인들의 장기 체류를
불편하게 만든 이번 비자 규정만 봐도 그렇다. 과거 같으면 외국인을 한명이라도 더 받아서 돈이든
지식이든 자기네 필요한 걸 취하려 했을 텐데 말이다. 미국 수준의 선진국 흉내를 내고 싶은 걸까?
중국인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젠 우리도 먹고살 만해. 너희들(외국인) 아쉽지 않아’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중국이 명실상부한 G2국가, 선진국, 대국이 되고 싶다면 욱일승천한 국력과 자부심에 걸맞은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비자 문제처럼 중국 체류 외국인들의 안위에 직접
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을 일방적으로 바꿔놓고 모든 불편과 책임을 외국인들에게 전가하
는 방식은 분명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아마 중국이 계속 이런 식으로 군다면 어느 순간 ‘중국
은 오만하다’는 인상을 전세계에 남기게 될 것이다. 이런 인식은 한번 굳어지면 좀처럼 해소하기가
어렵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겪는 반미감정도 ‘오만하다’는 인상을 풍기고 다닌 것과 무
관치 않지 않은가.



더군다나 중국은 아직 미국이 아니다. 똑같이 거만한 행동을 해도 미국은 ‘에이 더럽다’는 불평을
듣지만, 중국은 ‘너흰 아직 멀었구나’란 비아냥을 듣는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중국이 어깨에 들어
간 힘을 스스로 빼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