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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주택개발청(HDB) 본사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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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4월 싱가폴의 ‘국부’로 불리던 리콴유 전 수상이 죽은 이후 국내 보수·진보 언론들은 리콴유에
대해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가난한 어촌 마을을 세계 일류 선진국으로 올려놓은 선구
자라는 평가가 있었던 반면, 수십 년 장기집권하면서 자유와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라는 평가도 있었습
니다.


그래도 보수·진보 모두 이견 없이 리콴유의 업적으로 높게 평가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싱가폴의 공공
아파트(HDB) 정책입니다. 국민이 집 걱정 없이 살게 해 준 것만큼은 보수·진보 언론할 것 없이 엄지
손가락을 척하고 올린 것입니다.


길었던 중국 신년(Chinese New Year, 설날) 연휴를 보낸 뒤 귀국 연수보고서 작성을 위해 싱가폴의
대표적인 중산층 거주지역인 토아파요에 위치한 HDB 본사를 방문했습니다. 사전에 연락을 하고 가니
홍보 담당자가 내려와 전시관 안내도 해 주고, 티타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싱가폴의 주택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서민 주택인 HDB, HDB보다 상대적으로 고급이고
고가인 민영 콘도미니엄, 그리고 단독주택입니다. 이 중 HDB는 우리나라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비슷한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ousing and Development Board)에서 짓는 공공아파트입니다.


HDB 본사 지하 1층에 위치한 전시관 초반부는 싱가폴 사람들이 ‘플랫(Flat)’이라고 부르는 HDB의
개관이 전시돼 있습니다. HDB는 싱가폴 국민과 영주권자만 구입할 수 있으며 싱가폴 국민의 85%가 HDB
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중 65%는 자가이며, 20%는 임대입니다. 안내를 맡은 콘스탄틴 응 씨가
“싱가폴의 자가보유율은 90%가 넘는다”며 “한국은 어떠냐”고 묻습니다. 국토교통부를 담당했던 제
기억으로 한국의 자가보유율은 60%가 조금 안 됩니다.


전시관에는 3룸과 5룸의 견본주택이 설치돼 있었습니다. 가장 인기가 높은 공급면적 65㎡의 3룸의 구조
는 4베이가 기본입니다. 싱가폴에선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마루 창을 길게 빼지 않고 복도를 길게
해서 베이 수를 늘리는 게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HDB의 내부는 스튜디오부터 5룸까지 다양합니다. 가장 인기가 높은 3룸의 분양가가 한국 돈으로 3억원
정도 합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분양가의 80%를 대출금리 연 1.5% 수준(2016년 1월 기준)으로 빌려줍니다.
나머지 20%도 소득에 따라 최대 18% 포인트까지 저리대출이 가능합니다. 분양가의 2%만 있으면 집을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대출기간은 20년부터 99년까지 가능합니다.


HDB는 일생에 딱 2번만 청약이 가능하기 때문에 투기를 노린 가수요는 거의 없습니다. 또 토지는 국가
소유기 때문에 나중에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된다고 해도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습니다. 그나마
차익을 노릴 수 있는 매물은 개인이 팔려고 내놓은 HDB인데 이 마저도 대부분 국가가 사들여 재임대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HDB 보유를 통한 시세차익은 은행 금리만도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HDB는 순수 주거목적 주택이기 때문에 매입자(=거주자)가 국외 근무 등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곤 따로
임대를 놓는 게 불법이라고 합니다. 불법임대가 적발되면 국가가 집을 몰수하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100여 건이 적발돼 집이 몰수됐다고 합니다.


싱가폴 젊은이들 사이에서 ‘HDB 아파트를 얻자(Let’s Get HDB Flat)‘란 말은 프로포즈로 통합
니다. 사회초년병 시절에 큰 부담없이 장기 대출을 받아 HDB부터 살기 시작해 이후 돈을 벌어 콘도미니
엄이나 단독주택으로 이사가는 것이 일반적인 주거 형태입니다. 본인은 HDB에 계속 살면서 콘도미니엄을
사들인 뒤 임대를 놓아 높은 월세 수입을 올리는 것 역시 가장 일반적인 재테크 방식입니다.



<‘환경 수변도시’ 콘셉트로 개발 중인 싱가폴 북서부 풍골(Punggol) 신도시의 HDB 단지>


반면 외국인에게 싱가폴은 주택 지옥입니다. 외국인이 거주하는 콘도미니엄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
문입니다. 매매가는 HDB 가격의 5배 이상, 임대료는 10배 이상이라는 게 이 곳 공인중개사들의 전언입
니다.


동네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HDB는 플랫이란 이름처럼 외관은 그냥 볼품 없는 성냥갑입니다. 비슷하게
생긴 아파트가 수도 없이 늘어서 있어 내비게이션을 켜도 집을 한 번에 찾아가는 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면 겉모양 거품을 쏙 빼 가격은 내리고 실속을 챙긴 셈입니다.


최근에 새로 지은 HDB의 시설은 민영 콘도미니엄 못지 않습니다. 특히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때문
에 공동시설, 주차장, 녹지, 어린이 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한 번 짓고 임대가 끝나면 사후 관리
는 등한시하는 한국과는 매우 다릅니다. 또 신도시 개념으로 개발하기 때문에 HDB 단지 인근에 쇼핑센터,
스포츠센터, 의료시설, 학교, 대중교통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싱가폴의 콘도미니엄이라면 필수
시설인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는 없지만 집 근처에 스포츠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큰 불편은 못 느낄 듯
합니다.


HDB의 가장 특징적인 공간은 1층입니다. 1층은 캐노피 형태로 지어져 주민공동공간으로 이용됩니다.
‘보이드 데크(Void Deck)’라고 불리는데, 싱가포리언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공간입니다.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주말에 장기와 체스를 두는 주민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결혼식이 열리
기도 하고, 장례식이 열리기도 합니다.


리콴유가 말했던 ‘아시아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러나 사회초년병 시절 주택구입
부담이 적고, 대부분 국민이 HDB에 살기 때문에 거주에 따른 위화감이 없다는 이 2가지 점은 싱가폴 국민
들도 대체로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