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북경통신 3

by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북경 소재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연수중인 YTN 김태현입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해드린 1신과 2신에서는 초기 정착 과정에서 고전한 얘기만 했습니다만 이번 연수기는 즐겁고 유쾌한 경험을 위주로 적어볼까 합니다. 외국 생활을 하거나 해외여행을 하면서 이국의 문물을 접하다 보면 수시로 국내와 비교를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문화와 풍물, 물건을 보고나서 “이걸 할까 말까? 살까 말까?” 고민할 때는 자연스럽게 국내의 사정과 가격이 떠오르곤 합니다. “한국에서는 못하는 것이니 이번 기회에 어쨌든 한번 해보자” “국내에는 없는 물건이니 사갈까”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훨씬 싸고 좋으니 사가자” 등등. 이렇듯 자신의 본무대가 상황 판단의 잣대가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상품경제의 파고가 높아져 가는 중국에서는 이런 느낌이 더욱 절실합니다. 정치, 사회 분야는 상당히 안정돼 있는 편이지만 경제 만큼은 대단한 변동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중국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외국인들로서는 이곳의 사정에 따라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기복을 겪게 됩니다. 저와 가족들도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락가락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는데, 중국에서 겪은 생활의 明暗들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냉탕” 이야기



1신과 2신에서 적은 외국인 거류증 받기까지의 곡절과 황당한 은행 얘기는 중국 냉탕 시리즈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되는 일이 없는 나라”에서 정상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되는 일만 생각한다면 정말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 날 때가 많겠지요.



1. 황당한 은행 시리즈 속편 — 북경에서 제가 고르고 고른 끝에 지금 주로 이용하는 은행은 규모는 아담하지만 현지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자랑합니다. 바로 북경 동북부의 명소인 리도 호텔 안에 있는 중국은행(Bank of China) 출장소로 중국내 불변의 고율 수수료를 제외하곤 매우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시설도 훌륭하고 전용 안내원이 있어 요령을 모르는 외국인을 친절히 도와줍니다. 그런데도 가끔 먹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골탕은 피할 수 없습니다. 주범은 바로 온라인 전산망. 은행 컴퓨터가 다운되면 예금을 인출하려고 줄을 선 고객들은 일단 은행 문을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전산망이 언제 다시 가동될지 모르기 때문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전산망이 멈추면 온라인 송금 서비스는 물론 기본적인 인출, 예금 서비스도 중단됩니다. 물론 서비스가 괜찮은 이 은행은 고객에게 무작정 몇시간 뒤 다시 오라고 하는 대신 미리 전화를 걸어 온라인망 복구 여부를 확인한 뒤 다시 오라며 명함을 건네줍니다. 당일 돈이 필요할 사람은 정말 난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몇 차례 비슷한 일을 당하고 난 뒤에는 미리 넉넉히 현금을 찾아놓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년에 많아야 세 번쯤 있는 일이겠지만 (중국의 장기연휴는 음력설, 5.1 노동절, 10.1 국경절 3차례입니다.) 지난 10월 1일 국경절을 맞아 중국은행이 무려 9일동안 문을 닫아 저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토, 일요일은 원래 휴무인데 국경절 휴무기간으로 일주일을 더 잡은 것입니다. 모든 은행이 같은 기간 동안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제가 중국에서 개설한 계좌가 하나 뿐이어서 결국 집안의 돈이 바닥나고 며칠동안 중국 인민 평균 수준의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은행을 자주 가지 않아 장기 휴무 사실을 몰랐던 상당수 외국인 고객들은 예금 잔고가 있으면서도 돈을 찾지 못하는 답답한 경우를 당했을 것입니다.



2. 돈을 집어던지는 중국인들 — 중국에서는 잔돈을 거슬러 줄 때 돈을 `휙` 하고 던져주는 사람이 많아 한국인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식당 카운터 여직원이 잔돈을 내줄 때도 던지고 깔끔한 외모의 은행원도 인출한 돈을 내줄 때 던져서 줍니다. 중국 화폐는 대부분 지폐여서 다행이기는 하지만 던져진 지폐들이 흐트러지기도 합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예절이 말이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전혀 개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거스름을 받을 때 손을 딱 펴놓고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도 좀 우스운 모양이겠지요. 몇 년째 중국에서 살고있는 한 한국인이 어느날 식당에서 계산할 때 돈을 던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어이쿠! 나도 중국 사람 다됐구나” 라며 스스로 개탄했다고 합니다. 저도 귀국하기 전에 언젠가 돌연 돈을 던지는 습관이 생긴다면 중국생활에 충분히 익숙해진 것으로 자부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던져서 건네주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랜 습관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인구가 너무 많아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거대 국가의 낙후한 서비스 정신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관공서에서도 좋은 서비스 태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그랬습니다만 중국 관공서 직원들이 민원인을 대하는 태도는 냉담하고 불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범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관여하지 않습니다. 바로 옆 사람의 업무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옆줄이 아무리 길어도 자신의 앞에 줄을 서지 않으면 일을 처리해주거나 도와주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한번은 관공서에 일을 처리하러 갔는데 몇가지 증빙 가운데 하나가 부족했습니다. 저 자신도 서류가 미비한 것 같아 긴 줄에서 빠져나와 잡지를 들여다 보고 있는 옆자리의 한가한 직원에게 문의를 해봤으나 저 쪽에 줄을 서라고만 말할 뿐 다른 대꾸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줄은 줄대로 길게 서고 빠진 서류를 챙겨서 다음날 다시 와야 했습니다.



3. 삭풍이 불어도 난방이 안되는 아파트 — 가을은 북경 사람들에게 가장 쾌적한 계절로 꼽힙니다. 추색이 완연한 양광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북경의 고궁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경의 가을은 원래 짧다고 하는데 올해는 더욱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의 끝자락에 문득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높고 청명한 눈부신 하늘을 2-3주 가량 봤을까요. 10월 중순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면서 연일 우중충한 흐린 날씨가 이어졌는데 그것이 가을의 끝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북경 북동부의 작은 신도시 아파트촌입니다. 세 식구가 공부하며 지내기에는 아파트 시설이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만 추위가 시작됐는데도 난방이 되지 않아 10월 중순부터 집안에서 옷을 껴입은 채로 지내야 했습니다. 중국정부는 자원관리를 위해 양자강 이북 지역은 11월 15일부터 난방을 시작하도록 하고 있고 양자강 이북은 아예 난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대부분 어김없이 지켜지는 듯합니다. 사실 양자강은 꼬불꼬불 흐르기 때문에 이남과 이북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거나 위도 상의 상하가 뒤바뀐 경우도 많아 억울한 겨우살이를 호소하는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름높은 북경의 삭풍의 불기 시작해 추위가 본격화됐는데도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전혀 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건조한 날씨와 찬바람 때문에 결국 집사람과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콜록거렸고 잠을 잘 때는 집안의 모든 이불을 꺼내서 덮고 자야 했습니다. 추위에 내성이 있는 중국인 이웃들도 일찍 찾아온 추위를 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도 올해는 찬바람이 일찍 분다며 두툼한 옷을 꺼내입긴 했지만 난방 개시일을 알고 있어서인지 관리사무소 측을 탓하지는 않았습니다. 11월 5일을 전후해서는 간밤에 살얼음이 낄 정도의 추위가 일주일쯤 이어지다 11일에는 급기야 북경에 첫 눈을 뿌렸습니다. 관리사무소 측도 주민들의 원성을 고려했던지 첫 눈이 온 다음 규정보다 이틀을 앞당겨 13일부터 난방을 넣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냉기로 썰렁하던 집안에 온기가 들어오니 집안 분위기가 한결 푸근해져서 난방이 끝나는 3월 15일까지 겨울을 인간답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득 남경과 상해 등 양자강 이남 지역에서 난방을 스스로 해결하며 긴 겨울을 나야하는 수많은 동포들이 생각납니다.



4. 외국인 차별 — 요금도 다르다

중국인의 외국인 차별은 역사가 매우 오랜 구습입니다. 94년 이전에는 아예 외국인용 전용화폐가 따로 있어 환율은 물론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도 대부분 이중이었습니다. 화폐가 통합된 이후 자연히 개선이 이뤄졌겠습니다만 외국인은 알게 모르게 여전히 차별을 받는게 중국의 현실입니다. 정찰제가 아닌 일반 상점에서도 물가를 아는 중국인과 물가를 모르는 외국인은 다른 값을 내고 호텔이나 여관도 각종 할인제도가 많아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이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상인 기질이 농후한 중국인들은 지금도 가격흥정(討價還價)에 매우 익숙하고 또 이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에는 당초 값이 매겨져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 값에 사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익숙하게 깎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관광용 선물 가게의 중국 상인들은 엄청나게 부풀린 가격을 불러댑니다. 그러나 한두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물건을 곧바로 사지 않고 관심을 보이면 값을 조금씩 깎아줍니다. 이때부터는 시간이 곧 돈입니다. 시간을 투자해 뜸을 들이고 신중한 자세를 보일수록 상인이 부르는 가격이 점점 내려가고 손님이 고민 끝에 물건을 사지 않고 떠날 태세를 보이면 마지막 순간에 최저가로 추정되는 가격을 부릅니다. 이런 식의 가격 흥정은 매우 간단한 원리이지만 실제로 중국 상인은 재빠르고 영리하게 값을 흥정하기 때문에 손님은 결국 물건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장의 성격과 상품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상인이 처음에 부르는 가격과 실제 사는 가격은 2-3배에서 많으면 5-6배까지 차이가 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상인들은 손님이 비싸다는 반응을 보일 경우 “그러면 당신은 얼마에 사기를 원하느냐?”고 역으로 질문해와 손님의 허를 찌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저자거리에서 쇼핑할 때는 물건 값을 마음 속으로 미리 정해두고 흥정을 하는게 하나의 요령이랄 수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맞아서 사게 되면 좋고 사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흥정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손님은 안사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상인은 안팔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아무래도 어렵기 마련입니다. 중국생활 경험이 풍부한 몇몇 한국인들은 중국 상인의 고무줄 가격흥정을 능가하는 “후려치기” 솜씨를 갖고 있어 중국인이 오히려 놀라기도 합니다. 이런 고단수 고객과 중국 상인들과의 아슬아슬하고 파격적인 가격흥정, 한판 승부가 벌어지면 지나던 사람들이 어느새 모여들어 흥정의 결과를 관심있게 지켜보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은 이렇듯 천성적으로 흥정을 즐기지만 외국인 소비자는 물건을 살 때마다 이 가격이 사도 되는 적정한 가격인지 아니면 부풀린 가격인지 의심한 끝에 구매 여부를 결정해야 하니 중국생활이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끝)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