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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통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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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



YTN 김태현 기자 북경 1신 (2000.9.13)



1년 연수 일정으로 북경에 도착한지 한 달이 됐습니다. 오늘은 몇 고비의 곡절 끝에 나와 가족들이 외국인 거류증을 받은 날이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공안 당국이 집사람의 성씨를 바꾸는 기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영어 이름이 병기돼 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습니다. 공안당국과의 접촉을 무조건 줄이기 위해 성씨 수정은 요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자의 종류에 따라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제 경우 거류증 취득이 며칠 더 미뤄졌다면 정신적 불편함과 함께 과태료도 상당액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 땅을 많이 겪어본 사람들로부터 중국은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곳’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얼마간 중국인들 틈에 섞여 살아보니 정말 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뜻밖에 겪게되는 상황들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기왕 벌어진 상황을 감수하고 실마리를 풀어가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책이 찾아지곤 합니다.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는 말은 중국적인 상황의 황당함과 함께 그 해법을 잘 설명해 줍니다.

북경에서의 첫 소식은 제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보금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8월 15일 북경에 도착한 뒤 첫 번째 임무는 가족들이 합류하는 25일까지 적당한 집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인들의 충고를 종합한 결과 제가 공부하게 될 사회과학원 연구생원(대학원)에서 차로 5-6분, 자전거로 15분 거리인 북경 북동부의 중소형 신도시 왕징(望京)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습니다. 미리 소개받은 곳도 있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왕징 아파트 단지내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가 7-8곳의 아파트를 이틀간 둘러봤습니다. 집 구하는 절차는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중개소에 나와있는 집들을 둘러보고 중개업자를 통해서 집세 등의 조건을 조정하기도 하고, 계약이 이뤄지면 집주인이 중개업자에게 ‘복비’를 지불하는 식입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고 세 식구가 공부하며 지내기 가장 적합한 곳을 골라 월 7백 달러 쯤의 집세를 주기로 하고 중국인 집 주인과 계약을 했습니다. 북경 도착 4일째 되는 날, 저당금( 押金이라고 하는데 주인 마음대로 1-3개월 분의 집세를 미리 받고 나중에 집에서 나올 때 파손된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뒤 돌려받습니다.) 2개월 분 집세를 합쳐 2,600 달러를 지불하고 주인으로부터 집 열쇠를 건네받았습니다. 입국후 가장 큰 숙제를 끝마친 셈이어서 이날은 이부자리도 없는 침대에서 기분 좋게 잠이 들었습니다.

며칠 뒤 가족들이 합류하고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는 집안 곳곳에서 출몰하는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것 외에는 골칫거리가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왔으니 이제 학교에 등록하고 1년 거주에 필요한 거류증을 받을 차례. 학생용 X비자로 들어온 경우 반드시 거류증을 받아야하는데 입국일로부터 한달 안에 받으면 되고 필요한 서류는 모두 가지고 있으니 안심할 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외국 유학생의 등록일까지 며칠을 기다려 학교에 가서 등록절차를 밟던중 학교 측에서 집 주소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왕징은 합법적인 외국인 거주지역이 아니니 집 주인한테 말해 공안국 파출소에서 거주 증명을 떼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 왕징은 외국인 거주가 허용된 곳이며 따라서 단지 안에 수백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부동산 중개소에서도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공공 교육기관이라서 꽤 까다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없이 학교 문을 나섰고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파출소에서 거주증명을 받아 달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주인의 대답은 지금은 외국인에게 증명서를 내주지 않으며 파출소에 신청서를 내면 오히려 외국인 거주를 알리는 꼴이 돼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의 경우 과거에는 파출소에 거주증명을 신청하면 곧바로 받을 수 있는 사실상의 허가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외국인 거주에 관한 단속이 엄격해져서 신청을 해도 허가를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신청의 결과는 불법거주 신고로 끝나고 만다는 얘기였습니다. 이같이 앞뒤가 대충 들어맞으면서도 무언가 모순되는 제도운용이 중국의 스타일인 듯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두루 물어본 결과 집을 세놓는 주인들은 세원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해 외국인이나 중국인에게 집을 빌려줘도 정식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길이 막막한 상황에 놓였지만 ‘안되는 일이 없는’ 중국에서 어떻게든 일은 풀리기 마련입니다. 방법중 하나는 주인에게 거주증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력히 요구하면, 주인이 이른바 ‘꽌시왕'(關係의 네트워크)을 동원해 거주증명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이렇게 시도해 보기로 했고 주인도 자기대로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며칠 사이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습니다. 공안들이 불법 거주 외국인을 뿌리뽑겠다며 유례없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선 것입니다. 인근 지역에서 외국인들이 연루된 마약 거래가 적발된 것을 계기로 마침 10월 1일 국가 창건일을 앞두고 중국거주 외국인에 대한 단속이 본격화됐다는 소문도 퍼졌습니다. 주인도 단속이 너무 강화돼 손을 쓰기 어렵다는 대답을 해왔습니다. 수백 세대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라서 당연히 거주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알고 집을 정했는데 입주한지 며칠 만에 경찰의 단속을 피해 다녀야 하는 불법 거주자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엔 이사를 해야 하는데 복덕방, 집주인과 한판 말씨름을 붙어야 하고(논리적이고 속사포처럼 말할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전투적 중국어는 정말 어렵습니다.) 상당한 금전적 손해와 시간적 손실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습니다. 부동산 업자와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강력히 항의해 봤지만 자신도 허가증명을 내주지 않을 줄은 몰랐고 단속도 이렇게 강화될 것도 예상할수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뒤늦게 알아보니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왕징 아파트 단지는 당국의 묵인 하에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기는 하지만 외교 단지나 아시안게임 선수촌 등과 같이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집 주인도 정식으로 소유, 전세 등기를 하고 세금도 정확하게 내는) 곳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거류증은 받아야 하고(거류증을 못받으면 하루하루 불어나는 벌금도 엄청나고 단속될 경우 추방될 수도 있습니다.) 학교는 거주증명이 없으면 등록을 못한다고 하니 진퇴양난의 처지가 됐습니다. 긴급히 모 기업 주재원으로 수년째 북경에 살고 있는 중국 전문가인 대학 동창에게 SOS를 쳤습니다. 이 친구는 우선 학교측의 양해를 구해 주소를 대체하는 방법을 써보라며 합법적인 외국인 거주지인 자신의 주소를 알려줬습니다. 학교측에서 집 주소에 문제가 있다고 했으니 문제가 없는 주소로 바꿔본 뒤 정 그래야 한다면 다만 며칠 만이라도 정말 친구 집으로 이사할 생각까지 하고 학교측 유학생 담당자에게 주소를 바꾸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가 쉽게 풀렸습니다. 담당자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두말 않고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나 원 참, 참으로 묘한 곳이죠. 어떻게 안되던 일이 주소를 임의대로 바꾸니 갑자기 되는 경우가 다 있습니까. 이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가짜 주소를 적어내면 되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어쨌거나 친구의 주소를 빌려 학교 등록을 마치고는 최종 목표인 외국인 거류증을 신청하기 위해 북경시 공안국으로 향했습니다. 발걸음이 금방 가벼워졌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역시 어느 곳 하나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한참 동안 줄을 선 끝에 만난 북경시 공안국의 외국인 거류증 담당자는 학교에서 1차로 작성한 우리 가족의 신청서를 들여다보더니 이곳에 정말 거주하는지 알 수 없으니 거류증명을 받아오라는 말을 딱 한마디 한 뒤 다른 업무를 보면서 더 이상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으악 ! 어떻게 우리 집 주인이 못 받는 증명을 남의 집에서 받아온단 말인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중국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주소를 빌려준 친구를 다시 찾아가는 수 밖에 없었지요. 우리 집 주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통사정이 친구에게는 통했습니다. 이 친구는 몇년 만에 타국에서 만난 붕우(朋友)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자신의 광범위한 꽌시 네트워크를 가동해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상세한 과정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업할 친구의 안전을 고려해 공개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친구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중국인들과 말씨름하고 다시 이사하는 번거로움 없이 지금 사는 곳에 머물 수 있게 됐습니다. 때를 맞추기나 한 듯 외국인 거주 단속도 풍랑이 걷힌 바다처럼 갑자기 잠잠해졌습니다. 10월 1일을 전후한 고비를 넘긴 셈이니 1년간 편안할 것이라고 주변에서 얘기도 해줬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평화에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몸의 적응은 다소 더딥니다. 정복을 입은 공안들이 아파트 단지 입구를 지키고 서있고 사복 공안들이 아파트를 한집한집 방문하던 때 생긴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집으로 들어올 때도 좌우를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승강기에 함께 탄 사람들이 나와 같은 층에 내리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펴본 뒤 신속하게 집안으로 몸을 던지듯이 들어옵니다. 이같은 조심성은 이제 불필요해졌고 공안의 단속에 걸릴 일도 없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중국에서 몸 가짐을 신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이상 북경 1신은 개인의 불우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내용이 다소 장황해졌습니다만

<1> 마음 편히 장기간 중국에 머물려면 한 점 의혹 없는 거처를 정할 것

<2> 절차를 처리할 때 한두번 퇴자를 당해도 될 만큼 시간의 여유를 둘 것

<3> 가다가 막히면 길을 뚫어줄 각 방면의 전문가를 수소문할 것

<4> 공안과 접촉할 일을 최소화할 것 등의 행동방침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신은 그동안의 헛수고를 발판으로 얻은 요긴한 중국정보를 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