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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일기2(사스로 격리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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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찾아온 북경의 봄 날씨



저는 이번 연수를 무효로 하고, 재단측에 1년 더 연수할 기회를 달라고 조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스 때문입니다. 저에게 3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의 시간은 ‘잃어버린 3개월’입니다. 그 3개월이 어떤 3개월인지 아십니까. 올해 북경의 봄은 거의 30여년 만에 처음 보는 환상의 봄 날씨였습니다. 매년 봄이면 북경 하늘을 뒤덮었던 황사가 한 차례도 없었고, 건조한 날씨로 먼지가 풀풀 날리던 거리가 올 봄에는 예년의 여름보다 잦게 내린 비로 촉촉하고 쾌적했습니다. 제가 수업을 들었던 한 교수는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66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해 봄 날씨가 그렇게 좋았다”면서 “올 봄이 꼭 그때처럼 날씨가 좋아”라고 하더군요. 가뜩이나 심란한데 문화혁명을 시작할 때 같다니, 불길한 느낌마저 덜더군요.



그러나 30여년 만에 찾아온 북경의 꽃 시절을 저는 거의 방구석에 쳐 박혀 보냈습니다. 심지어 1주일 동안은 격리 당한 채 꼼짝달싹 못했습니다. 북경은 4~5월 한때 하루 최고 200명 이상의 사스 확진 환자와 또 그와 비슷한 숫자의 사스 의심환자가 발생할 만큼 사스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중국 정부는 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바깥 출입과 지역간 이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제가 있는 북경대학을 포함해 중국의 각 대학들은 물론이고, 각 아파트 단지도 거주민들을 제외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각 기관, 단위(학교, 아파트 단지, 회사 등등)마다 구성원들에게 출입증을 발급해주고, 출입증이 없으면 나다니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출입증을 가지고 학교를 나가더라고, 나가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별로 없었으니, 여행이나 나들이는 꿈도 꿀 형편이 못됐습니다.



사실 4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저도 북경에 머무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어디 어디에서 환자가 발생했다더라” “어느 건물이 환자가 발생해 완전 폐쇄되고 그곳 사람들은 격리됐다더라” “어디서 누가 사스로 죽었다더라” 이런 내용들뿐이었습니다. 유학생을 만나건, 한국인 이웃을 만나건, 연수하는 언론계 동료를 만나건 언제나 화제는 ‘사스’였습니다. 북경의 거리는 흰색 마스크를 쓰고 말없이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만 눈에 띄는 ‘침묵의 거리’였습니다. 그 마스크의 행렬들은 마치 북경의 대기 중에 사스 바이러스가 떠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죠. 결국 저는 4월 말 가족들을 먼저 귀국시켰습니다. 연수 기간 중 가족들과 평생 기억에 남는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너무 아쉽더군요. 하지만 두 아이가 너무 어려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가족을 들여보내고 저는 학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출입이 통제되던 때라, 학교 밖에 거처를 정하면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모습도 일변했습니다. 하나 둘씩 귀국하던 유학생들이 4월 말에 이르러서는 출국 러시를 이뤄 학교는 텅 비다시피 했습니다. 원래 제가 수업을 듣는 반 학생 수는 18명이었는데, 5월 초에는 유학생들이 대부분 귀국해버려, 다른 2개 반과 합반을 했습니다. 그러나 합반을 한 뒤의 학생 수가 6명에 불과했습니다. 학기가 끝나던 6월 중순 북경대학 유학생 사무실에 확인해보니 540여명이었던 유학생 수가 75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중에는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처럼 늙수그레한 ‘노땅’들이 많았죠. 수업도 정상적인 진행이 불가능했습니다. 학교측도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지 않도록 수업을 진행하라고 권유한 데다,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 숫자도 교수와 잡담하기 딱 알맞은 숫자여서 수업은 한 동안은 잡담 반, 수업 반으로 진행됐습니다.



1주일간 격리당하다



제가 1주일 동안 격리 당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중국 정부는 매년 5월1일부터 7~9일간 지속되는 5•1절 연휴를, 사스 때문에 완전 폐지를 검토하다가 결국 최소화 시키도록 결정했습니다. 북경대학은 9일 연휴를 5일로 축소했죠. 그 연휴 기간을 그냥 기숙사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게 억울해서 해외 여행을 감행(?)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여행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해외 여행은 돌발한 집안 사정으로 무산됐습니다. 당초 이미 귀국해있던 제 처와 합류한 다음, 여행을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북경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돌아오니, 학교 진입을 막으면서 1주일간 격리돼 있은 뒤 건강에 문제가 없어야 다시 수업에 참여할 수 있고, 기숙사 방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사스 환자 미발생국인 한국에서 돌아온 사람을 WHO가 공식적으로 사스 위험지역으로 지정한 북경에서 격리돼야 한다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조치였습니다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격리돼 있는 1주일 동안은 감옥살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기숙사 한 개 동을 완전히 비우고 격리 동으로 사용했는데, 복도에도 나오지 못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도록 했습니다. 밥은 배달해주고, 매일 두 차례씩 체온을 체크한 뒤 제출했습니다. 감옥 죄수들에게도 운동 시간은 주는데, 반경 2~3m 가량 되는 방 안에서만 맴돌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감옥보다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 뿐이지 감옥보다 더 심하게 통제했던 셈이죠. 저는 처음 이틀 동안 무료하고 답답하다가, 다음 이틀 동안은 분을 삭이기 힘들 만큼 화가 치밀고, 나머지 사흘간은 ‘그래 봐야 나만 마음 상한다’ 싶어, 포기하는 심리적 변화 과정을 겪었습니다.



격리 생활을 끝나고 나온 뒤, 마침 과제물로 800자 내외의 ‘의론문(議論文)’ 한 편을 제출하라고 하길래, ‘북경대학의 사스방지대책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그야말로 ‘자근자근’ 씹어놓았습니다. 원래 기자들의 장기가 ‘남을 씹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없이 씹다보니 800자를 넘어 1000자 가까이 되더군요. 간단히 말해 “북경대학측이 취한 사스방지대책을 들여다보면,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이며,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인 것은 물론이고, 불법의 흔적마저 군데군데 눈에 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은 교수는 낯이 뜨겁다 못해 아마 열 좀 받았을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적표를 받아보니, 뜻밖에 제 의론문에 거의 최고 점수를 주었더군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스 속의 낭만



5월 말~6월초로 접어들면서 북경에서도 사스 기세가 완연히 한풀 꺾였습니다. 대중들이 모이는 공원이나 유람지 같은 곳은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문을 닫은 곳이 많아서 학교 바깥 활동은 제약돼 있었지만 학교 안에서만은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벗은 사람들 숫자가 더 많아진 것도 이때를 전후해서 였습니다. 북경대학은 실내 활동은 여전히 제한했지만 야외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했습니다. 주말마다 운동장에 야외 극장을 설치해 영화를 상영하고, 북경대학교 교수가 강연자로 나서 야외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주로 저녁 6시30분에 열린 야외 강연회는 적게는 80여명에서 많을 때는 200~3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운동서클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태극권 강습회를 마련해 매일 저녁 9시 무렵이면 교정 한 켠에서 30~40여명이 태극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문외한이 보면 태극권은 느린 춤 동작을 닮았거든요.



사스는 가족들을 먼저 들여보내게 하는 아쉬움과 연수 생활 중 품었던 각종 계획을 무산시켰지만, 학교 기숙사로 들어와서 아름다운 북경대 교정을, 그것도 달 밝은 밤, 웨이밍후(未名湖)변을 한가롭게 거닐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웨이밍후변을 거닐다 보면 한번도 예외 없이 목격하는 풍경이 있습니다. 북경대 재학 청춘남녀들이 벤치에 끌어앉거나 감싸앉고 앉아서 밀어를 속삭이는 풍경이죠. 그들은 아름다운 북경대 교정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액센트들입니다. 북경대학교 교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다음 기회에 소개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