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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촛불 속 새겨야 할 트럼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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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다들 클린턴이 대통령 될 거라 생각하죠?”
미국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미 대선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누구나 그러했듯’ 나 역시
트럼프 대통령을 그려본 적이 없던 때다. 하지만 이곳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한 분은 이미
트럼프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트럼프 당선에 내기까지 걸었다는 그는 조목조목 그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힐러리의 우세를 점치던
미국 미디어의 왜곡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거의 모든 미디어가 힐러리에 편향돼 있다”고
비판한 그는 트럼프의 유세장을 한번 찾아가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트럼프 열기를 직접 접
할 기회를 갖지는 못한 채로 그 교수의 전망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언론은 반성에 나서기보다
‘Angry White’라는 존재를 끄집어내 잘못된 예측을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렸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언론 역시 다분히 그러한 시각으로 미 대선 결과의 정리를 일단락했다는 점이다.


*성난 백인들이 진짜 화가 난 이유


‘성난 백인들’이 이번 대선의 중요한 변수였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화가 났을까. 임기
막바지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고공행진을 기록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다.
20조 달러, 우리 돈 2경에 이르는 국가부채다. 그가 취임하던 해는 국가부채 규모가 10조를 웃돌았
으니 8년만에 약 두배로 늘어난 셈이다. 부채의 증가는 각종 복지정책 확대가 한 몫을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바마케어다.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대신 저소득층에 정부가 지원을 하고,
가입전 건강상태를 이유로 보험사가 보험가입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게 골자. 이에 따른 수혜자
는 제한적이고 그로 인해 보험료 인상이나 세금 증가의 불이익을 받게 된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평가다.


국가부채를 갚을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다. 불황의 대명사가 된 ‘러스트
벨트(미국 오대호 일대 쇠락한 공업지역)’는 물론, 다른 지역 역시 일자리가 사라져 난리다. 세계적
인 경기 침체 속에 크고 작은 생산기지가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자리를 옮긴 탓이다. 그럼에도, 세금
을 내지 않고 복지 혜택을 기대하는 히스패닉의 입국 러시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1,0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불법체류자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으며, 정착 후 미국 시민이 된 히스패닉 유권자들
은 이제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층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됐다. 성난 백인들이 성낼 만하다. 분
노한 이들은, 언론에서 묘사하는 ‘교육 수준이 낮고 일자리를 못 찾는 백인 남성’에 국한하지 않는다.
부서진 곳간 문을 바라보며 팔짱만 끼는 민주당 태도에 실망한 다수의 유권자들은 투표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길들여지지 않은 채, 30년을 기다렸다


이들의 분노를 정확히 포착한 게 트럼프이지만 그가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미 30억 달러
자산가의 면모를 갖췄던 1987년부터 트럼프는 공화당의 대선 후보 찬조 연사로 나서며 큰 인기를 모
았다. 이듬해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대권을 향한 자신의 꿈을 그대로 내비쳤다. 이후에
도 차기 유력 정치인의 지위를 유지하다 2011년엔 미트 롬니(Mitt Romney)나, 마이크 허커비(Mike
Huckabee)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공화당 내 최고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100
억 달러에 이른다는 재산을 과시하며, 말로만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는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를 꾀
하여 왔다.


그렇게 30년간 내공을 닦다 출사표를 낸 트럼프의 핵심 전략은 ‘속내의 발현’. 정치적으로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해득실을 재지 않으
니 그의 말은 구체적이고 일관된다. 또한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자신감있는 리더의
모습을 한껏 자랑할 수 있다. 그의 현란한 언변을 맛볼 수 있는 유세장에 인파가 몰린 것은 이 때
문이다.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실제로 침체된 미국 사회가 변하겠구나’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현재의 미국 사회를 답답하게 느끼는 유권자라면 망치를 휘두르며 낡은 틀을 부수는 트럼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트럼프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개인과 각종 단체로
부터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 없던, 정치 신인 트럼프는 그 누구에게도 빚이 없다. 정치자금 후원자
나 이익단체로부터 정치적 부채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다른 후보들이 발언에 신중을 기하면 기할수
록 트럼프 발언의 신뢰도는 높아갔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를 바탕으로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 당시 “거대기업과 엘리트 미디어,
주요 정치자금 기부자가 힐러리의 선거운동에 줄을 서고 있다”면서 “그녀는 이들의 꼭두각시이고,
이들은 그녀를 조종할 수 있다”고 공세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트럼프를 모르는 언론, 언론을 아는 트럼프


때로는 솔직함이 지나쳐 공격의 빌미를 주기도 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폭로된 그의 사적인 대화는
차치하더라도, 공식석상에서도 트럼프는 끊임없이 설화를 낳았다. “멕시코 이민자는 마약을 가져
오고 범죄를 일으킨다. 성폭행범들이다”, “중국이 미국을 계속 강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여성 앵커)의 눈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녀의 다른 어딘가에서 피가 나오고 있
었을 것이다”라는 등 망언은 끊이지 않았다. 풍부한 먹잇감을 두고 미디어는 트럼프를 물어뜯었다.
공화당과는 한배를 탈 수 없는 진보적 색채의 미디어만이 아니었다. ‘fox news’같은 보수적 미디어
역시, 독불장군 안하무인 후보로는 힐러리 클린턴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판단해 트럼프 공격에 힘을
모았다.


트럼프는 그런 미디어 공세에 일찌감치 고개를 돌렸다. 미디어에 머리를 조아리고 화해의 악수를 청
할 시간에 그는 유세장을 찾아 지지자들과 직접 만났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운드바이트 한 문장에
신경쓰기보다 SNS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직접 퍼뜨렸다. 선거운동 중반에 이미 트럼프 트위터 팔로
워 수는 700만을 넘겨 4백만에 불과한 클린턴을 크게 앞질러있던 것이다. 또한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넘나들며 정치광고를 쏟아냈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위해 이민자를 막고 일자리를 지
키겠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가 유권자들에게 박혔다. 미디어의 공세가 격해져도, ‘그들은 부패하고
편향됐다’는 한마디면 끝이었다. 너무 미디어를 모른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높은 시청률의 리얼리티
쇼 ‘Apprentice’를 10년 이상 제작 진행했던 그는 언론의 생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미디어가 닫은 목소리, 트럼프가 들었다


트럼프와 미디어의 관계를 말하자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샤이(shy) 트럼프’이다. 트럼프를
좋아하지만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지는 않았던 그들. 불만이 누적돼 있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들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그들이 설문조사에서도 속내를 숨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만
들었던 것은 누구일까. ‘이방인이 들어와 내 일자리까지 빼앗아가는 게 싫다’, ‘이슬람 사람들은 그냥
무섭다’, ‘다른 나라가 어떻게 되건 미국이 부강해지는 게 최선이다’, ‘내 세금으로 왜 남 좋은 일 시
키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는 미디어에서 배척됐다. 정의(正義)라고 포장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
치들만 즐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생각이 그러할까.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더 많은 경우 후자를
선택하는 게 인간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미디어는 두세번 읽어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고
답적 글로 대중을 계도하려고만 했다. 이런 미디어에 의해 속물이 돼버린 다수의 유권자들은 트럼프
에게 위안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선거운동 기간 중 트럼프와 결별했다가 결과를 보고 마음을 바꾼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트럼프는 이 나라에서 아무도 듣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
한 건 이 때문이다.


*백만 촛불 속에도 새겨야 할 ‘트럼프 교훈’


미디어에 의해 속물로 낙인찍힌, 밀려난 대중들은 한국에도 있다. 성적을 위해서라면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웃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설라치면 얼굴을 찌푸리곤 한다. 논박할 수
없는 논리나 유려한 문장에 대항하기보다 투표를 통한 몸부림에 익숙한 이들이다. 교육이건 부동산
이건 예민한 이슈에서 겉과 속이 다른 모순 덩어리 기득권이 역겨운 이들은 여전히 칼을 갈고 있는
지 모른다. 유권자는 선거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나 선각자를 뽑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
익 대변자를 뽑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공동체 정신의 포기가 트럼프 쇼크의 교훈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솔직한 목소리와 욕망에 귀
를 기울여주고 이를 다독이는 태도가 우선돼야 한다는 취지다. 정치와 미디어가 현실을 덮어버리면
덮어버릴수록 그 괴리 속에서 또다른 극단적 트럼프는 꾸준히 나올 수밖에 없는 탓이다. 정치는 여
러 이해관계 속에서 최선이 아니라 차선, 최악이 아닌 차악을 가리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맞이한 한국 정치의 밑바닥에서 다행히 정의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한다. 대선
을 비롯한 앞으로의 정치 일정을 가늠하기도 힘들다. 이때 새로운 민주주의를 준비하는 이들이라면
트럼프의 교훈을 더욱 깊이 새겨야 한다. 현실 정치의 구현은 결국 촛불이 아닌, 투표소 커튼 뒤
유권자들의 기표봉에 달려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