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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병원 응급실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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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수 중에 가장 가지 않기를 바라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병원일겁니다. 외국에 나와 있을때
일수록 가족의 건강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응급실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곳
입니다. 연수가 종반에 접어들 때까지 별탈이 없길래 ‘다행이다’ 싶었는데 방심한 탓일까요.
사달이 났습니다.


지난달 초부터 아이가 닷새정도 열감기를 달고 다녔지만 세살때 신종 인플루엔자도 거뜬히 이겨낸
녀석이라 만만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이번 열감기는 묘한 게 열만 나고 콧물 기침 등의 일반 감기
증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낮에 멀쩡하다가 밤에만 39도를 오르내려 부모를 긴장시키는 특이한
감기증세였습니다.


닷새가량 지나 다행히 열이 떨어지길래 나아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등굣길에 차에
서 내린 녀석이 “다리에 힘이 안들어간다”며 어기적거리며 학교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간 ‘저게
뭐지’했지만 학교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길래 괜찮나 싶었습니다. 결국 저녁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밖에서 놀고 들어와 소파에서 TV를 보던 녀석이 저녁 식사 시간에 부엌까지 기어서 오는 겁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불안해하던 아내는 놀라서 ‘어떡해’를 연발
하고 마음처럼 안되는 다리에 아들 녀석도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혹시 소아바미, 아니면 바이
러스 감염?’ 등등 온갖 걱정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쳤습니다.


사방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가장 가까우면서 믿을만한 병원이 어디예요?’


저녁 9시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데 머리에서는 ‘미국 연수 와서 애
한테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심각한 증상이면 당장 한국 돌아가야 되나’ 등 온갖 잡생각이
머리속을 휘저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어떻게 응급실에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
입니다.


도착하자 마자 아이를 안고 정신없이 뛰어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응급실 풍경이 국내에서
많이 봤던 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교통사고 환자, 긴급 이송환자, 감기환자까지 겹쳐 북새통인 국내
응급실과 달리 너무 조용하고 차분한 풍경이었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Athens(에덴스,그리스
수도 아테네와 스펠링이 같음)는 인구 12만명의 중소도시지만 병원은 제법 큰 편입니다.


응급실 대기실에서 마음은 타들어가는 데 자판기 초콜릿에 눈독을 들이는 여유를 부리는 아이를
보니 다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 했습니다. 과거 병력을 기록하는 문진표 작성을 마치자
의사가 왔습니다. 다행히 자상해 보이는 여의사였습니다.


‘어려운 의학용어가 난무할텐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연수 담당 교수한테
도움이라도 청할 걸’ 등 뒤늦은 우려와 후회를 뒤로 하고 아들과 의사 사이에서 3자 통역 비슷
하게 설명을 하느라 한바탕 진땀을 쏟았습니다. 간단한 문진과 폐렴 검진을 위한 X레이 촬영 등
한두가지 검사를 마친 후 다시 30분 정도 기다리자 의사의 호출이 왔습니다.


“걷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고열 감기로 인한 일시적 근육통 때문이다. 급성 기관지염과 B형
  독감이 동시에 와서 아이가 힘들었던 것 같다”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의사의 처방은 딸랑 열흘치 항생제. 웬만한
감기에도 어린이에게 좀처럼 항생제를 권하지 않는 미국 병원 처방으로는 센 편이라는 게 아내
의 설명이었습니다. 체크아웃 데스크에 들러 처방전을 받으라더군요. 간단한 환자 확인 절차 후
보험유무를 물었습니다. 한국서 가입한 실손보험만 있는 연수생들은 미국에서 사실상 무보험 상
태입니다. 무보험 환자라는 것을 확인한 직원은 처방전을 주면서 집에 가면 된다고 합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착오가 있는 것 같아  “계산은 여기서 하지 않냐”는 질문이 자동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응급실 갔다가 계산도 않고 나왔다가 낭패라도 보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집에 가
서 기다리면 수일내 우편으로 청구서가 갈 것이다”. 예상치 못한 직원의 설명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영 개운치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미국 병원 응급 시스템은 한국과 크게 달랐습니다.‘선 치료, 후 청구’ 시스템입니다.
한국에서는 응급실서 치료를 하더라도 치료비를 계산하지 않으면 퇴원을 시켜주지 않고 환자
를 볼모로 잡는 일이 다반사인데 이곳은 일단 퇴원 후에 청구서를 보내는 방식이네요. 제가
아는 지인도 큰 교통사고로 병원신세를 졌는데 퇴원 후 두달뒤에야 청구서가 날라왔다네요.
 
미국 병원의 무지막지한 치료비 폭탄 얘기는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병원을 다녀온 후 한동안 매일 우체통을 살피는 게 일과가 되었습니다. 드디로 병원 다녀온 지
3주만에 청구서가 나왔습니다. X레이 촬영 등 병원치료비 1080달러.‘어 생각보다 많지 않네’
싶었는데 몇일 뒤 또 다른 청구서가 왔습니다. 의사 진료 및 응급실 이용료 440달러. 그런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방사선협회에서도 소액이지만 청구서를 보내왔네요.


병원 한곳에서 청구서 3곳장을 받은 것입니다. X레이 촬영, 타액 검사 등 간단한 검사를 포함
해 약 1시간 동안 응급실에 머문 비용은 약 1500달러,한화로 180만원 가량입니다. 한국에선
비슷한 수준의 응급실 진료 검사비가 물론 보험적용 덕분이지만 4만~5만원 수준입니다. 미국서
보험없이 중병으로 병원을 찾았다 파산한다는 얘기가 농담같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보험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무방비 상태에 노출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병원 자주 다니면 한국 보험제도 예찬론자 된다는 선배들의 얘기가 결코 농담이 아니었
습니다.


트럼부 정부의 과거 지우기 1호 법안인 오바마 케어가 공화당의 내전으로 기사회생하는 과정
을 현지에서 지켜보는 와중에 미국 의료시스템의 한 단면을 경험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
던 일이었습니다. 의무가입 규정과 중소 자영업자의 보험료 부담 증가로 오바마 케어는 제가
살고 있는 조지아에서도 백인 비중이 높은 도시일수록 비판 여론이 높습니다. 하지만 오바마
케어 도입 전 5,000만명에 달하던 무보험자가 2,500만명 수준으로 절반가량 줄어든 점은 오바
마 케어의 긍정적 효과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수천만명의 시민들이 무보험속에서 살아
가며 오직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나라가 ‘슈퍼 파워’  미국이라는 점
은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뜻하지 않은 응급실 체험은 엄청난 수술비 때문에 잘린 두손가락
가운데 어느 쪽을 붙여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던 다큐 영화 ‘식코’속 시골 농부의 모습이
여전히 미국의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깨우쳐주는 경험이었습니다.


미국 연수를 준비한다면 가족들의 건강과 관련, 국내서 검사 또는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국내
서 미리 처리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특히 치아와 관련한 치료는 한국서 하는 게 낫습니다.
자녀가 충치가 있는 경우 한국서 발치를 하고 오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미국서 발치하
면 치아 하나당 170달러 내외, 물론 실손보험을 통해 사후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번거로운데
다 단순 발치의 경우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실손보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의 경우 아이 유치
2개를 발치하는데 350달러 가량 들었습니다. 발치 시간은 단 2분이었습니다. 일반 의료서비스
를 비교해 보면 의사소통 문제를 떠나 한국이 미국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점은 경험을 해보면
실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