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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통 1 – ‘예스 맴’으로 시작된 미국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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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통 1 – ‘예스 맴’으로 시작된 미국 생활

첫 인상부터 험상궂다. 거기에 마스크까지 썼으니 말도 잘 들리지 않는다. 미국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하는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 굳이 해석하면 차량국이라고도 하고 자동차국이라고도 한다. 그곳에 근무하는 미국 공무원들. 불친절하기로 악명이 높다. 미국에는 악명 높은 공무원 두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 DMV 공무원들과 공항에서 마주치는 출입국 관리 직원들. 해외 연수기에 매번 주연으로 등장하는 공무원들이다.

8월 더운 날씨에 시험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늘 하루 끝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이 들 쯤 에이전시가 다른 지역 DMV로 가자고 한다. 같은 주에서는 어느 지역에서든 시험을 봐도 무방하다.

차를 타고 1시간을 가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의 주행 1시간은 한국과는 체감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신호등에도 걸리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시간이 걸리지만 미국은 거의 직진이다.

1시간이 조금 지나 도착한 곳은 한적한 DMV. 원래 시험을 보려고 했던 노스캐롤라이나 캐리 지역은 이제 막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그곳에 비해 이곳은 과거 화려했지만 지금은 퇴락했다. 덕분에 큰 사무실에 비해 오는 사람은 적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DMV에 대한 선입견으로 긴장 된다. 입구에서 서류를 심사하는 40대 여성이 웃음을 보인다. 한국 사람이란 걸 알고 관심을 보인다. 자신이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최대한 친절하고 긍정적으로 대답해준다. 덕분에 일단 DMV 사무실엔 무혈입성.

사무실엔 공무원 10여명이 있는데 각각 자리를 스테이션이라고 한다. 기다리면 방송으로 ‘00번 대기자, 00번 스테이션으로 오세요’라는 방송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영어 듣기 평가. 나는 예약이 아닌 워크인(WALK-IN, 예약없이 그냥 감)이어서 좀 기다려야한다. 그렇게 20여분 동안 열심히 토익을 볼 때처럼 온 신경을 쏟아 영어 듣기 ‘실전’을 할 쯤 내 번호가 불린다.

20대 후반 백인 여성이다. 미국 온 후 가장 먼저 익힌 ‘HOW ARE YOU?’ 라고 자신 있게 물어본 후 돌아온 질문들엔 멍하니 상대방 눈만 쳐다본 상황이 이어진다. 답답한지 손으로 앞에 있는 시력 테스트 기기에 눈을 대란다. 한국 안과 가면 시력 측정할 때 사용하는 망원경과 비슷하다. 다만 이 안엔 시력 테스트표 뿐 만 아니라 다양한 교통 표지판이 있다. 가기 전에 외운 실력으로 당당히 읽어내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게 쳐다본다. 말은 못 알아듣는데…

키 재고 눈 색깔 살펴보더니 묻는다. ‘오늘 필기시험과 주행 시험을 다 볼거냐?’ ‘예스 맴, 다 볼 거다’ ‘연습했냐?’ ‘예스 맴, 열심히 했다’ 또 고개를 갸우뚱. ‘자신 있냐’ ‘예스 맴, 자신 있다’ 한숨 쉬며 ‘오케이.’

필기 시험은 컴퓨터로 보는데 한국어로 치게 해준다. 26개 가운데 20개를 맞아야 합격이다. 다행히 열심히 외운 덕분에 4개 틀리고 겨우 통과.

문제의 주행시험. 필기시험이야 내 하기 나름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주행 시험은 상대방인 감독자가 있어 복잡한 상황이 발생한다. 연수기에 ‘불친절한 DMV 공무원’과 함께 공동 주연으로 등장하는 ‘고무줄 주행 시험’. ‘누구는 이렇게 해서 떨어졌는데 누구는 이렇게 했는데도 붙었다’, ‘내가 한국에서 10년 무사고인데 여기 감독관의 판단 기준이 이상하다’, ‘감독관의 괘씸죄에 걸렸다’ 등등…

두 가지만 기억했다.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고 무조건 예스 맴(또는 썰)’. ‘무조건 하라는 대로 하라’는 건 감독관의 권위를 높여주면서 심기를 거슬리지 않겠다는 것. ‘무조건 예스 맴’은 내가 당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감독관은 처음 서류를 접수하고 필기시험을 안내해준 좀 전의 20대 백인 여성. 시작부터 ‘예스 맴’을 남발한 덕분에 분위기는 좋았다. 필기시험 끝나기 밖으로 가서 주행시험을 보잔다. ‘예스 맴.’

여기서부터는 최대한 친절 모드로 나가야한다. 나가는 출입문도 열어주고 ‘예스 맴’을 연발한다. 차에 타라더니 ‘오른쪽 깜빡이 올려봐라.’ ‘예스 맴.’ ‘왼쪽도’ ‘예스 맴.’ ‘브레이크 밝아봐라.’ ‘예스 맴.’ ‘빵빵도 해보고.’ ‘예스 맴.’ ‘이제 출발하자.’ ‘예스 맴.’, 맴, 맴, 맴…

‘좌회전 해봐’ ‘예스 맴’ ‘왜 속도 줄여? 뒷차가 위험하다’ ‘예스 맴’ ‘다시 좌회전’ ‘예스 맴’ 이후 ‘갓길 정차해봐’ ‘예스 맴’ ‘3턴 해봐’ ‘예스 맴’ ‘후진 해봐’ ‘예스 맴’ ‘이제 돌아가자’ ‘예스 맴’ ‘우회전 해’ ‘예스 맴’ ‘다시 우회전’ ‘예스 맴’…맴, 맴, 맴, 맴,,

드디어 다시 사무실 앞에 도착. 잠시 1,2초 정적이 흐르고 ‘굿 모닝’ 보다 내 인생 가장 영어가 잘 들리던 말. ‘유 패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렇게 어렵고 까다롭다는 DMV 운전 면허 시험을 내가 정녕 반나절 만에 통과한 것인가. 나도 모르게 나온 말. ‘쌩큐 썰…아니 쌩큐 맴’. ‘생큐 맴’은 미처 연습하지 못한 탓인가. 다 합격했던 시험을 망칠 뻔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종이로 된 임시 면허증을 준다. 2주 안에 플라스틱 정식 면허증이 우편으로 도착한다고 한다. 그러나 착오로 한 달 걸려 받은 면허증. 다시 한 번 외친다. ‘쌩큐, 맴 썰, 에브리바디’. 이제 ‘맴’이든 ‘썰’이든 상관없다.

<첨언>
합격의 요인은 위 ‘예스 맴’과 함께 과장된 몸짓이다. 좌회전, 우회전, 3포인트 턴을 할 때 반드시 어깨와 머리를 팍팍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마치 내가 배우가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