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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감정표현에 대한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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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은 오열했다. 시신도 찾지 못한 혈육의 영정 앞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몇몇은 더딘 사고 수습에 거칠게 항의했다. 어떤 이는 누군가의 멱살의 붙잡았고 또 다른 이는 책상을 뒤엎었다. 1997년 8월 괌의 한 호텔 풍경이었다. 그곳은 괌 KAL기 추락사고 대책본부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 미국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족들이 왜 저렇게 거칠게 감정 표현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한국을 잘 아는 괌 주립대학의 한 교수는 그들에게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미국인들은 장례식에서 소리내 울지 않는다. 숱한 영화에서 그들의 장례식은 경건하고 고요하다. `미국인들은 화가 나거나 슬퍼도 감정표현을 자제하는구나.` 9년전 괌 KAL기 추락사고 취재중 겪은 이같은 경험은 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했다.

지난 7월말 기자 생활 14년만에 한국을 떠나 미국 한복판에 1년간 머물 `둥지`를 틀었다. LG상남언론재단 지원으로 미국에서 그들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9년전 내 머리에 박힌 관념대로 그들은 감정 표현을 절제했다.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기 보다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밴 듯 했다. 대학 도서관, 쇼핑센터 등 다중이용시설을 이용할 때면 그들은 항상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잠시 문을 잡아주는 친절을 베푼다.

이곳에 도착해 3일쯤 지나 인터넷 선을 설치할 때 일이다. `미디어컴`이라는 관련 회사의 직원이 집으로 방문해 인터넷선을 연결한 뒤 CD 한 장을 주고 갔다. 하지만 CD에 담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도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다. 미디어컴 서비스센터 ARS에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ARS의 상담원과의 연결은 쉽지 않았다. 한번 통화하려면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마당에 참으로 울화통 터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상담원과 연결되는 순간 내 인내심은 거의 한계점에 다다랐다. 더욱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답답함이 가중돼 목소리만 커졌다. 상담원과의 통화는 기다린 시간 만큼 길어졌다. 내 감정은 흥분된 목소리를 타고 춤을 췄다. 그러나 상담원은 침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시종 같은 톤을 유지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같은 설명을 세번이고 네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도 분명 짜증이 날 상황이건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를 통해 자신의 감정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문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고방식과 문화에 대해 내게 영어를 가르치는 수잔 모핀은 `인디비주얼리즘`(Individualism;개인주의)이라고 설명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심과 책임감이 인디비쥬얼리즘의 요체이며 남에 대한 배려도 거기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었다. 서부개척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자기 스스로 지켜야 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문화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만으로 미국인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과장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사실 또한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말았다.

몇시나 됐을까, 한밤중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2시 30분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누군가 싸우는 소리였다. 창문을 열었다. 미국인이 사는 뒷집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진 듯 했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심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욕을 내뱉으며 집밖으로 나와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밤 정적은 깨지고 마을은 공포스런 분위기에 휩싸였다. 싸움은 그렇게 30여분간 계속됐고 경찰차 사이렌과 함께 끝이 났다.

며칠 뒤 한밤중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잠을 깼다. 새벽 1시였다. 문을 열어보니 또 그 집이었다. 이번엔 싸움이 아니라 파티를 하는 것 같았다. 미국인 남녀 예닐곱명이 널찍한 베란다에 나와 술을 마시며 새벽 2시가 넘도록 시끄럽게 떠들었다. 남들 자는 시간에 어떻게 밖에서 저리 떠들 수 있나. 평소 생각하고 경험했던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인과 한국인은 사고방식과 문화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가 사람의 보편적 정서와 진심을 왜곡할 만큼 큰 장벽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독립심과 책임감 같은 미국 문화의 좋은 점은 배우되 때로는 솔직한 감정 표현이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들도 때론 한국인보다 훨씬 과격하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