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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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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살다 보니 예전에는 몰랐던 이면들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인종이다. 한국 사회에선 인종 개념이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가 ‘채병건’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한국인이라면 채병건이 아시안인지 백인인지 아니면 히스패닉 계통인지를 먼저 따질 이유가 없다. 우리는 단일 문화, 단일 인종 사회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생활하면서 ‘인종’을 변수로 삼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전혀 다르다. 내가 몇 시간후 만날 사람이 ‘Mr.A’ 또는 ‘Mrs.B’ 라고 들었을 때 우선 그가 백인인지 흑인인지 아니면 히스패닉인지 등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Mr. A’라고 이름은 알려줘도 그가 어떤 인종인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조건 미국 사람이니 ‘백인’이라고 예상해서 나갔다가 상대가 흑인이거나 아시안 임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표정을 보여줬다가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얼굴색으로 사람을 따지는 것만큼 천박한 것도 없다. 특히 유색 인종인 아시안이 스스로를 백인과 동일시해 다른 유색 인종을 깔보는 태도 만큼이나 어리석은 것도 없다. 하지만 미국 생활 3개월의 짧은 경험에선 인종의 차이가 자꾸 계층의 차이로 느껴져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곳 채플힐에는 식료품점, 대형 할인점이 이곳저곳에 있는데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월마트에선 히스패닉과 흑인들을 자주 만난다. 다른 할인점도 그러러니 여기고 잊어버렸는데 유기농 야채, 식품을 주로 판다는-따라서 값도 더 비싼- 몇몇 식품점에 들어가 보니 흑인은 찾아 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백인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다. 이곳에서 몇 달 지내 보니 가장 값이 싼 곳이 월마트다.

미국에선 인종 차별적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막상 살아 보니 보이지 않는 장벽이 느껴진다. 지난달 작은 호텔에 체크인을 하는데 앞에 서 있던 백인 여성 손님에게는 화사하게 웃으며 응대하던 젊은 카운터 직원이 내 얼굴을 대하고선 갑자기 무표정해지며 단문으로만 묻기 시작했다. 내 인상이 험악해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거나, 아니면 영어가 서툴 것이 분명한 아시안에게 장황하게 물어 봐야 소용이 없어 짧은 단어 몇 개로만 묻는 식이었다. 나 역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잘 알아 듣지도 못하는 영어식 인사 치레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던 만큼 단문-단답으로 마무리된 체크인에 섭섭할 이유가 없었다.

한번은 호텔 무료 이용권을 사용하기 위해 해당 호텔의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흑인 여성이었던 상담원은 서툰 발음과 내가 불러준 내 이름으로 오리지널 미국인이 아닌 아시안 이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나 역시 발음을 듣고 금방 흑인 여성 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 상담원은 이용권에 대해 이것 저것을 물어 보다가 막판엔 이용권에 적힌 숫자가 ‘미확인’이라며 예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다시 확인해 달라’며 세 번을 전화로 숫자를 불러 줬는데도 ‘확인되지 않는 번호’라고만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내가 여행하려는 도시(채터누가)의 호텔로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그 호텔에선 이용권 숫자를 묻지도 않고 예약을 해 준다. 물론 체크인 할때 이용권 숫자를 확인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얼마 후 TV에 재미 있는 광고가 나왔다. 일종의 공익 광고였다. 한 백인 남성이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아파트 관리 사무실로 전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히스패닉의 발음으로 누가 들어도 히스패닉이라고 생각할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대며 아파트가 있는 물어보자 수화기에선 ‘No’라며 집이 없다는 대답이 나온다. 이 남성이 다시 중국식 이름을 들며 중국식 발음으로 방을 물어보자 대답은 역시 ‘Sorry’라며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번엔 자기의 원래 이름을 들어서 히스패닉이나 아시안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자 바로 그 아파트에서 ‘Yes’라며 방이 있다는 답이 나온다. 이 장면 위로 인종을 따져 입주자를 선별하면 처벌받느니 뭐니 하는 자막이 올라온다.

6년 전께 한인 이민사를 취재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등지를 돌며 한인 1.5세, 2세 들을 집중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한인 2세로부터 ‘GLASS CEILING’이라는 말을 듣고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었다. 한인들과 같은 유색 인종에겐 역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 미국에서 짧게나마 살아보니 유리 천정이 그때보다 더 진하게 느껴진다. 미국이 버락 오바마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내부적으로는 미국 사회에 잠재된 인종적 장벽, 인종적 갈등을 잠재우고 외부적으로는 국제 사회로부터 미국의 전세계 경영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도덕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기 위한 외통수였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요즘 하곤 한다.

그런데 채플힐에는 공립 도서관이 있다. (사족을 덧붙이면 이곳에 갈 때마다 반드시 한국 부모와 아이들을 만난다. 백인들의 교육열도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도서관에 가면 이곳에서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백인 어머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 직후 오바마 당선자의 저서인 ‘담대한 희망’이 전세계 서점에 내걸린 적이 있었다. 이 도서관에도 이 책이 있다. 그런데 그 저서가 ‘흑인 저서’ 서가에 꽃혀있다.



*.채플힐 공립도서관 ‘흑인 저서’ 서가에 꽃혀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담대한 희망’.
이 칸에는 흑인 노예사나 흑인인권운동 등의 흑인을 주제로 한 책들이 모아져 있다.



‘The Audacity of Hope’의 좌우에는 ‘Slavery’ ‘Black Legacy’ 등의 제목이 쓰인 책들이 보인다. 현직 대통령의 저서라면 잘 보이는 전면의 서가에 공을 들여 배치하거나, 아니면 정치학 서가에 올릴 법도 한데 이런 저런 고려 없이 흑인 서가로 분류해 버린 한 중소 도시 도서관의 논리도 여전히 내게는 미스테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