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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기억하는 방식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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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연수생활도 벌써 4분의 3이 지나갔습니다.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딴 나라 얘기처럼 들렸던 “연수생은 짐을 풀고 나면 짐 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조언들이 실감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독서, 여행, 영어공부 등 연수 전 세웠던 계획들은 절반도 채 이행하지 못했지만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우리나라와 얽혀 있는 미국의 속살을 들여다본 것은 값진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라도 “’미국’ 하면 떠올리게 될 풍경”을 3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디즈니랜드  


미국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지난 겨울 올랜도 디즈니랜드 여행 때 목격한 풍경입니다.‘디즈니랜드’라는 명성은 높았지만 실제 놀이기구의 수준이나 운영 시스템은 국내 테마 파크의 그것들과 크게 차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곳에서 제가 놀란 것은 놀이기구를 타기 전 유모차를 세워 놓는 공간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딸과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디즈니랜드를 찾았던 저는 국내에서처럼 놀이기구 대기줄 앞에서 직원들에게 “유모차를 세우려 하니 자물쇠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대기줄 구석 한 켠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족히 40~50 대쯤 되는 유모차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습니다. 물론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은 채 였습니다. 값비싼 유모차도 꽤 많이 보였고 보온병, 기저귀 같은 신생아 용품들을 바리바리 싣고 있는 유모차도 많았습니다. 직원들은 뒷짐을 지고 있어 “누가 끌고 가면 어떻게 할까”라고 걱정도 됐지만 기우였습니다. 놀이기구 탑승이 끝나자 부모들은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차례차례 그곳을 빠져 나갔습니다. 관람객이 하루 수십만 명씩 지나치는 곳이지만, 미국 사회가 구성원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라는 것을 목도한 느낌이었습니다.




올랜도 디즈니랜드, 놀이기구 대기줄 옆에 유모차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좌회전할 때도 그렇습니다. 여러 방면의 차가 교차로에 도착할 경우 먼저 도착한 차부터 순서대로 좌회전을 하는 것이 규칙입니다. 이 규칙을 어기고 먼저 사거리로 진입하려는 차를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나라였다면 운전자들이 먼저 좌회전을 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액셀레이터를 밟아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가지 단순한 판매전략일 수도 있지만, 상점들의 관대한 환불정책(refund policy)도 소비자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번은 월마트에서 카트 위쪽에는 찬거리를, 카트 아랫쪽에는 반쯤 먹은 피자 한 판을 싣고 계산을 했는데, 깜빡 잊고 찬거리만 차에 싣고 집에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야 피자를 갖고 오지 않은 것을 알고 마트로 되돌아가 수많은 카트들을 뒤졌지만, 이미 마트를 떠난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뒤라 피자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찾기를 사실상 포기했지만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마트 고객센터를 찾았습니다. 사정을 들은 직원은 우리가 피자를 다 먹었는지, 혹은 감추었는지 의심하지 않았고 영수증만 확인한 뒤 새 피자 한 판을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도 관대한 환불제도를 악용하는 ‘블랙 컨슈머’가 없지야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손님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 보였습니다.


도서관  


제가 살고 있는 채플힐은 대학도시인 만큼 도서관 인프라가 튼튼하게 구축돼 있습니다. 일단 UNC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는 메인 도서관인 데이비스 도서관을 비롯해 13개의 도서관이 있습니다. 데이비스 도서관은 최신간 한국도서들도 구비할 정도로 장서량도 상당합니다. 책 한 권을 석 달까지 빌릴 수 있고 대출 가능한 책의 권수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학내 설문조사에서 데이트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데이비스 도서관이 꼽혔을 만큼 도서관은 학생들의 생활과 밀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도서들이 비치된 데이비스 도서관 7층 창 밖으로 고풍스런 벽돌 건물들과 광장에서 신입생들이 재잘거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것이 학교생활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규모도 규모지만 이곳 도서관들은‘이용자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차별적입니다. 이곳 도서관에는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형태 뿐 아니라 도서관 곳곳에 소파 형태의 의자들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다리를 뻗어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도 있습니다. 학부 도서관에는 윗부분과 입구를 제외하고 사방이 막힌 형태의 좌석도 있습니다. 비행기 1등석을 연상하면 될 것 입니다. 그 안에서 누워 책을 읽거나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집 근처의 채플힐 공공도서관도 근사합니다. 처음 찾았을 때 “이런 근사한 도서관이 인구 6만 명짜리 도시의 도서관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고 쾌적했습니다. 191,200여권의 장서, DVD, CD  21800여 종의 미디어, 68,000여종의 e북과 e오디오 등 방대한 자료가 갖춰져 있었습니다.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격리된 스터디룸도 있고, 어린이 섹션에는 놀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학습용 교구도 갖춰져 있어 부모와 함께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아이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독특하게도 튜터(우리로 치면 과외선생님)와 함께 숙제를 하거나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도 이곳 도서관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내놓은 책을 권당 1~2달러 정도 파는 행사도 열고, 영화 상영도 자주 하는 등 ‘공공(public)’이라는 말 그대로,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대출해주는 곳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각종 문화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금 큰 읍()정도의 지역에 이런 수준의 도서관이 있다는 것, 여기서 미국의 저력을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채플힐 공립 도서관의 아동 코너(아이들의 놀이공간)와 개인 스터디룸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건강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미국에 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학 캠퍼스, 이면 도로, 숲속 길 어디서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양이 뜨거운 날이나 쌀쌀한 날, 비가 오는 날, 청년이나 노인이나 가리지 않고 숨을 몰아 쉬며 달리기를 하는 미국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달리기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학 캠퍼스에도 운동을 할 수 있는 차림새로 다니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캠퍼스에서 잘 차려입은 남학생, 예쁘게 꾸민 여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곳에는 그런 학생들이 드물어 보입니다. 제가 청강한 수업(12)의 절반 이상이 여학생들이었는데, 잘 차려 입고 오는 여학생은 없었고, 러닝복 상하의에  바람막이 자켓을 하나 걸치고 물통을 들고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난해 미국의 러닝화 시장규모만 6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달리기 열풍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달리기 뿐 아니라 남녀를 불문하고 미국 학생들은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엄청나게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반대로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체육시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중학교만 올라가도 매일 체육시간이 있습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이곳의 한 학부모는 “중학교 1학년만 돼도 체육시간에 3마일(4.8km) 달리기를 하는데 도저히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수면 부족과 운동 부족으로 하얗게 들뜬 얼굴로 집학원독서실을 뺑뺑이 하는 우리나라 중ㆍ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좀 서글퍼 지곤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