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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차 사고를 당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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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 오던 길이었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던 중 뒤에서 오던 차에게
들이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충격이 꽤 컸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당했는데 그때는 반사적으
로 문을 열면서 욕이 먼저 튀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선 어땠을까? 일단 몸이 얼었다. 문을 열기 전에, 가해자와 대면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뭘해
야 할지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바빴다. 이 상황에서 어떤 영어를 구사해야 할지 수많은 영어 문장이
스쳐갔다. 기본 매뉴얼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일단 허술하게 보이면 안 된다’,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지 말자’, ‘한국처럼 운전 면허증을 받아 둬야지’, ‘병원에도 가야한다고 얘기하자’등등


문을 열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차의 뒤태를 봤다. 한쪽이 심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받은 차 역시
많이 부서졌다. 그런데 가해 운전자는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건 뭐지…’  튀어
나와서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조심스럽게 운전석 안을 들여다보니 한 젊은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떨고 있었다. 노크를 하니 그제 서야 문을 열고 나오면서 “Sorry”, “Oh my God”을 연발한다.
그냥 봐도 앳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이 자의 당황한 기색이 너무 역력해서 내 경계심은 그냥
허물어졌다. 적어도 내가 뒤집어 쓸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 여유를 갖고 미리 정리한 매뉴얼대로
 ‘지시’를 했다. 일단 네 보험 회사에 전화를 해라, 경찰서에도 전화를 해라 등 등. 청년이 전화
하는 걸 확인하고 내차와 가해 차량의 사진을 모두 찍었다.


날은 춥고 아무리 기다려도 가해 차량의 보험 회사에선 연락이 없었다. 끼니를 놓친 아이들은 차안
에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짜증이 난 내가 물었다.


“보험 회사 연락한 거 맞니?” / “No”
“경찰서는?” / “No” 
“너 그럼 어디다 전화 한거야?” / “우리 아빠한테”


이 자식이…마침내 한국어로 욕이 튀어 나왔다. 난 다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잘 나오던
영어도 막 꼬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내 차의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 경우
가해자 잘못이 100%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보험 회사에 처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설명뿐이었
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난 뒤 청년의 아버지가 와서 정식 사과를 하고 보험회사에 연락을 취해 줬다.
‘아들이 심신이 미약하니 경찰 신고는 안 해주면 안 되겠냐’는 부탁과 함께.


나의 경우 가해, 피해가 명백한 경우였지만 대부분의 차 사고의 경우엔 경찰 신고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한다. 자칫 소송이 될 경우도 있어 “I’m Sorry” 등 책잡힐 발언 등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얘기도 있다. 상대 운전자의 면허증과 보험증을 교환하고 양쪽 보험 회사에 모두 전화 보고를 해야
한다. 당연히 병원에도 가야한다고 현지인들은 조언한다. 나의 경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워낙
늦은 시간에 아이들까지 함께 있어 그냥 넘겼다. 만약 허리나 목 등에 작은 문제라도 생긴 경우
추후 보상비를 요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병원 보상비의 경우 ‘기회 비용’ 등
합의금이 정해지는데 이 경우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한다. 다만 대부분 합의금이 매우 적기 때문에
변호사 선임 비용을 고려해 웬만하면 대부분 실비 처리를 하는 게 관행이다.


다음날 덜덜 대는 차를 가해자측 보험 회사가 지정해준 수리 업체로 끌고 갔다. 수리 업체는 무척
꼼꼼하게 사고 조사를 하고 견적을 약 1800달러로 매겼다. 수리 계획에 내가 동의를 하자 내가 보는
앞에서 보험사에 견적서를 팩스로 보냈다. 십 여분 후 실시간으로 내 통장에 이 돈이 입금됐다.
‘왜 번거롭게 내 통장을 거쳐 지불을 해야 하느냐’는 내 질문에 직원의 대답은 명쾌했다.  ‘고객
이 만족하는 최대한의 서비스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수리는 무척 만족스러웠
다. 수시로 메일을 통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당초 8일이 걸린다던 수리는 10일을 넘겼다.


2주 만에 찾은 차는 좀 우스웠다. 지난해 여름 2010년 식 중고차를 샀던 것인데 이번 수리로 뒤쪽은
완전 새 차가 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차의 도색이 언밸런스해서 앞쪽에도 일부 채색을 입혔다
고 직원은 설명했다. 물론 미국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세차도 말끔히 돼 있었다.


사고를 당한 뒤 당황한 기억, 야밤에 추운 도로에서 온 가족이 겪은 생고생, 차 수리를 맡기고 렌터
카를 빌리는 등의 번거로움, 각종 서류 및 금전 처리 시간 등 소위 말해 내가 잃은 ‘기회비용’은
얼마일까? 씁쓸했다.   


그래도 ‘짧은 미국 생활서 교통사고까지 경험하고. 게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스스로 위로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은 ‘똥 차’가 ‘새 차’가 되었다고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