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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싱글 정착기 – 영어공부 이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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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고백하면 나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왜‘고백’이라고 표현하냐면 선발 과정에서 꽤 하
는 듯 허세를 부렸기 때문이다. 면접심사 때 “대학 때(영문학 전공)보다 지금 더 잘한다”고 했는
데, 그말은 사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다녔던 영문과 졸업 당시 영어실력이 전공을 숨기고 싶을 정
도였다는 ‘진실’만 감추면 말이다.


조기유학은 커녕, 지방 여고 출신에다 다들 가는 어학연수도 못가본 신세에 무슨 회화 실력이 있겠는
가. 그 때문에라도 기자연수를 꼭 가보고 싶었다.‘영어는 물론 러시아어 중국어까지 구사하는‘미생’
의 수퍼 인턴 안영이는 바라지도 않는다. 런던 연수 동안 영어 하나라도 잘 익혀서 남은 인생 당당하
게(?!) 살고 싶다.’ 이 바람이 산산조각나기까진 며칠 걸리지 않았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영국인
을 만날 길이 없구나….


런던에 살면서 영국인을 만날 수 없다니?! 과장을 보태긴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대부분의 식당,
카페 등에선 스페인/이탈리아/동구권 출신 이민 노동자들이 손님을 받는다. 뉴욕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시급 직원들이 멕시코 등 중남미 출신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과 통하는 영어란 건 그냥 서바
이벌 잉글리시일 뿐이다. BBC뉴스의 고급(?) 어휘를 이들과 나눌 일은 없다.


학교에 가면 친구를 사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방문학자로 등록한 SOAS대학 학생회관에서 느낀 것
은‘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라틴계/ 아랍계/ 동아시아계 등 문화, 언어권별로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리낌없이 한국어/일본어/중국어 등 각 모국어로 얘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학연
수 다녀왔는데도 영어가 그다지 늘지 않았다는 경험담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전세계 관광객, 유학생, 이민자들이 우글거리는 런던에서 ‘마음에 맞는 영국인 친구를 만나 영어도
배우고 문화도 익히는’ 꿈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학위과정을 등록하면 모를까 소속 커뮤니티가 불확
실한 방문학자 신분으로는 친교 맺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멍석 깔고 어학학원을 다니자니 그게
연수 목적도 아니거니와 비싼 수업료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틈나는대로 각종 강연과 갤러리 무료
투어를 들으며 ‘브리티시 잉글리시 악센트’와 친숙해지긴 했지만 또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만난 게 ‘밋업(meetup)’이라는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밋업은 쉽게 말해 한국의 네이버 카페 같은 동호회 사이트다. 다른 점은 온라인 활동 중심인 네이버
나 다음 카페와 달리 밋업은 오프라인 활동이 목표다. 이를 위해 온라인으로 연결돼 있을 뿐이다.
또 한국의 동호회와 달리 상당히 휘발성이 강해서 ‘번개’ 같은 느낌이 강했다. 가입과 탈퇴가 아주
쉬운 것도 인상적이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코스모폴리탄 도시 런던에 최적화된 커뮤니티
사이트다.


밋업을 알게 된 건 런던 연수 절반을 향해 가는 지난해 12월 중순. 가입 과정에서 관심사와 거주지역
등을 선택하면 추천 밋업이 수십 수백개 뜬다. 무료 모임도 있지만 대부분이 모임 유지비 명목으로
소액 회비를 걷는다. 특별한 테크닉(사진 강의 등)을 가르쳐주는 밋업의 경우 회당 회비가 꽤나 높다.
그래도 일반 학교나 학원에서 시행하는 것보단 쌌다. 나는 일단 영어 공부하는 밋업들에 가입했고 여
러번 시행 착오 끝에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밋업들을 추릴 수 있었다.


영어 배우는 밋업에 들긴 했지만 영어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밋업의 장점은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자
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로의 문화 차이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문화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알아보게 된다. 딱히 소속 커뮤니티가 없던
나에게 밋업은 런던에서 친구를 사귀게 해준 가장 중요한 발판이었다.


그러나 영어 배우러 오는 이들은 현지인이 아니다. 현지인을 만나려면 또다른 밋업에 도전해야 했다.
내가 택한 것은 하이킹 밋업. 주말마다 런던 시내 혹은 교외로 하이킹 떠나는 밋업이 우글우글했다.
주축은 오리지널 런더너들이고 나 같은 일시 체류자들도 다수 모여들었다. 물론 휘발성 강한 밋업에
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반나절 이상 함께 거닐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
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레 실용 영어공부가 됐다. 아무래도 오리지널 백인 런더너들보다는 수년
전 이민 와서 런던에 뿌리내린 제 3 국적자들이 대화 나누기 편했다. 그런 식으로 공연 관람, 전시
관람 밋업에 수시로 얼굴을 내밀며 ‘런더너로 살아보기’ 경험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광속으로 흐르는지 이제 귀국이 4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다녀온 연수자들 말처럼
‘이제 적응할 만하니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실감 난다. 무엇보다 밋업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알차게 활용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뿐이다. 후배(?) 연수자들께서는 이런 선임자들을 타산지석
삼아 아낌 없이 런던 생활을 누리길 바란다. 분명한 건 모험한 만큼 얻는다는 것이다. 특히 런던처럼
모험의 기회가 널린 곳에선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