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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살기 전엔 몰랐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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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년을, 그것도 학교라는 사회와는 일정 부분 분리된 공간에 살면서 영국에 대해 뭘 알게
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번 연수를 통해 관광으로 왔을 때는 몰랐던 영국의 면모를
좀더 알게 되었다. 


영국에서 예상외로 좋았던 것 – 날씨


런던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의외로 날씨다. 겨울에 안 춥고 여름에 안 덥다. 7월말
인 현재도 꽤 쌀쌀해서 긴 팔에 얇은 잠바를 걸치고 다닐 정도다. 물론 낮에 30도가 넘어가는
날도 가끔 있지만 상당히 예외적이다. 버스와 지하철에는 아예 에어컨이 없다. 예외적으로 더운
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흐르는 땀 때문에 곤욕을 치를 수도 있지만,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건조하기 때문에 이런 날에도 큰 불편이 없다.


런던 하면, 항상 비가 내릴 것 같은 선입견이 있지만 1년간 우산을 써본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외엔 오는 둥 마는 둥 하는 수준의 비가 잠깐씩 내리기 때문에 우산 없이
다닐 만하다.  


겨울에도 거의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온화하다.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의 눈이
펑펑 오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다만 바람이 좀 불고 해가 매우 짧다. 동지
직전엔 해가 3시반에 진다. 이때가 고비다. 런던 날씨가 싫다는 사람의 십중팔구는 우중충한 겨울
때문인데, 한 달 정도의 고비를 넘기면 나머지는 살 만하다. 여름이 쪄 죽일 듯이 덥고, 겨울에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추운 극단적인 날씨의 나라, 한국 출신 나에겐. 


런던의 반전 매력 – 음식 


런던의 날씨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 만족도가 높은 것일 수 있다. 역시 사람이나 도시나 기대치
관리가 중요하다. 또 하나의 반전 매력은 음식이다.


유럽에서 영국의 음식에 대한 조롱은 단골 개그소재다. 허나 그건 옛말인 듯 하다. 물론 산해진미
가 풍부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할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음식점들이 괜찮다.(여기서, 정통 영국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고기 파이 따위는 음식으로 치지 않겠다.) 워낙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다 보니 각종 세계 음식들을 파는 레스토랑이 많다. 유명한 셰프가 많은 곳이 또 영국 아니던
가.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 ‘마스터셰프’도 1990년 BBC가 처음으로 제작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인기
를 끌고 있다. 영국인들도 나름 요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슈퍼마켓의 식재료들도 상당히 다양하고 품질이 좋다. 식재료 및 가공식품들을 영국산뿐만 아니라
EU 각국에서 수입해 온다. 스페인산 과일, 이탈리아산 올리브오일, 프랑스산 치즈 등등. 인도, 아시아
계 식재료들도 진열대에 즐비하다. 아이슬랜드 특산품 요거트도 영국 마트에서 레이캬비크보다 더
싼 가격에 사먹을 수 있다. 길거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은 맥도날드가 아니라
신선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파는 ‘프레따 망제’다. 런던 거리에선 서울과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
을 찾아보기 힘들다. 


런던에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일 – 고장


이곳에 살면서 가장 귀찮고 겁나는 일은 고장이었다. 한번은 겨울에 샤워기가 고장 난 적이 있었
는데, 고치는 데 2달이 걸렸다. 총 4번의 수리공의 방문이 있었으며 이를 위해 나는 도합 네 번의
반나절을 집에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방문 약속을 잡는 일 자체가 힘들다. 정해진 시간이 따로
없이, 아침 8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오겠다는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손재주가
부족해서인지 수리공이 온다 해도 한번에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 다행이 나의 귀책사유로 고장 난
것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가공할 만한 수리비가 나온다고 한다. 한번은 열쇠를 집안
에 두고 문을 닫는 바람에 열쇠공을 불러야 했는데, 거의 10만원 가까운 돈을 달라고 해서 울컥한
적이 있다.  


배달 받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가 아닌 이상에는 런던 한복판에 살아도 물건
배달 받는데 몇 일이 걸린다. 게다가 배달부가 와서 전화 한통 해주는 일이 없다. 그냥 현관앞이든
문앞이든 물건을 놓고 가는 일이 다반사다. 물론 정해진 날 안 오는 경우도 많고.    


생각해 보면 이런 불편함은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민자들이 저임금 노동을 맡으면
서 많이 싸졌음에도 그렇다. 한국에서 제공받은 싸고 편리한 서비스는 사실 값싼 노동력에 기반
하고 있다. 편리한 한국의 불편한 진실이다. 


영국은 여전히 계급사회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엄친아’를 자기 아들로 둔, 영국에 사는 한 한국인 학부
모가 몇 년 전 실제 겪은 일이다. 옥스브릿지를 목표로 열공하고 있던 이 아들에겐 영국인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이 여학생은 공부를 꽤 잘했음에도 대학진학에 전혀 뜻이 없었다. 성적을 아깝게
생각한 이 한국인 학부모는 이 여학생이 대학진학반에 가도록 설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학생
의 엄마가 찾아와 대차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당신이 뭔데 나와 딸 사이를 갈라 놓느냐”며.


사연인 즉, 노동자 계급 출신인 이 엄마는 자기 딸도 당연히 대학에 안가고 같은 계급에 남기를
원했다. 딸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이 되면 워킹클래스인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 빈부 격차가 있을지언정 계급이 어디 있겠나 싶겠지만, 영국이 그렇다. 영국 땅의
3분의 1을 귀족과 지방의 젠트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 마릴본,
킹스크로스 등 요지의 상업용 부동산들도 몇몇 이름있는 귀족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런던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리젠트 스트리트의 상점가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는 영국 여왕보다 부자
인 귀족 가문이 14곳이나 된다.


가장 부자 귀족가문은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으로 3억 6,500만파운드가 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귀족 재산의 상당부분은 예전부터 물려 받은 부동산이다. 귀족들은 물려 받은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옥스브리지에 진학하고, 좋은 가문과 다시 결혼하는 식으로 계급을 유지해
나간다. 지금도 Burke’s Peerage라는 귀족 가문의 족보를 총망라한 책이 주기적으로 발간된다.
총 4,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12만명의 왕족, 귀족, 기사 등등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있다.
책값만 60만원이다.  


우리로 치면 중산층에 해당하는 미들 클래스와는 달리 돈 있는 귀족 집안은 어퍼 미들 클래스
(upper middle class)로 불린다. 우리로 치면 상류계급이라 할 만하다. 영국 사람들과 열흘
짜리 단체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중산층와 워킹클래스가 따로 놀았다. 일부
러 피하거나 말을 안 섞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밥도 끼리끼리, 술도 끼리끼리
마셨다. 폴로, 조정과 같은 귀족 스포츠 동호회는 워킹 클래스나, 외국인 이민자들이 가입할
수 없다. 명문화 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렇다. 


영국사람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 귀족 문화의 잔재에 대해 불만이 없을까. 영국인들은 대체적
으로 변화를 싫어하고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인 듯하다. 한국 같았
으면 내 자녀라도 꼭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 다니고 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도록 온갖
희생을 다할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미묘한 계급갈등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얼마 전 영국 연예계에선 “계급 천장(Class Ceiling)”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상류층
출신의 배우들이 집안의 재정적 도움으로 비싸고 좋은 연기학교에 진학하고, 귀족스러운 발음
과 아우라를 발판으로 이들이 좋은 배역을 독차지한다는 비판이다. 셜록 드라마 시리즈로 유명
한 베네딕트 컴버비치, 해리포터 시리즈의 레디 에디메인, 휴 그랜트 등등이 대표적인 사립
고등학교 및 옥스포드를 나온 미들 클래스 출신 배우들이다. 반면, (내가 좋아하는!) 제임스
매거보이, 톰 하디 등등은 워킹클래스 출신의 성공한 배우들이다. 이 중에서 매거보이가 가장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었는데, 사립학교를 나온 부잣집 애들이 영화와 드라마의 주요 배역을
장악하면서 연기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런던정경대와 골드스미스대학 연구진의 연구 결과, 영국 배우들 중 73%가 미들클래스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에
대해 컴버비치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 어퍼미들클래스 맞다. 하지만 노력으로 여기
까지 왔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니까 차라리 미국 헐리우드로 이사 가고 싶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