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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차에 치이고, 쓰레기차에 받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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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교통위반 티켓을 받으면 하루종일 마음이 상한다. 시애틀에 도착한 지 석 달여가 지난 10월말 우리 부부는 시내버스로 다운타운 관광이나 하자며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기 전 우편함을 열어보니 ‘NOTICE OF INFRACTION’이라는 낯선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내가 모는 미니밴이 빨간 신호등에서 일시정지를 하지 않고 곧바로 우회전을 한 데 대한 교통위반 티켓이었다. 우리 집 인근 교차로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는지, 사진도 3장이나 담겨 있었다. 벌금만 무려 124달러다. 환율도 급격하게 오르던 시기라 시내버스 다운타운 관광도 포기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며칠 궁리하던 중에 법원에 MITIGATION을 신청해 성공한 여러 사례가 들렸다. 특히 판사에게 위반 당시의 이러저런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구하는 ‘레터’로 벌금 면제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등학생인 우리 딸아이 친구의 엄마가 장애인 주차시설에 잠시 주차를 했다가 200달러 이상 벌금고지를 받았지만 레터를 보내 벌금 면제를 받았다.

미국에서 교통위반 티켓의 옵션은 3가지다. 군말 없이 벌금을 내던가, Mitigation hearing이나 CONTEST를 요청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CONTEST는 위반 사실을 놓고 경찰과 내가 유ㆍ무죄를 따지는 심판이고 Mitigation은 내가 위반을 인정하고 벌금을 경감 받을 만한 당시 상황을 설명해서 선처를 구하는 절차다. Mitigation은 직접 법원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거나, 레터로 가름할 수 있다.

레터를 보낼까 고민하다 문화체험 삼아 법원을 직접 찾아가기로 하고 Mitigation hearing을 신청하는 서류를 보냈다. 사실 12마일로 찍힌 속도가 찍힌 사진으로만 봐서는 빨간 신호에서 속도를 늦추고 정지를 했는지 말았는지 분간도 잘 되지 않아 판사 앞에서 우겨볼 생각도 없지 않았다.

1주일 뒤 hearing 시간과 장소를 정한 법원을 편지를 받았다. 12월 초 다운타운에 있는 시애틀 시법원이었다. 당일 오후 법원을 찾아가니 주차할 공간이 마땅히 없어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시립 도서관 도로변에 마침 공간이 비어 있어 2시간 주차권을 끊고 법원으로 갔다. 견습기자 시절 10여명이 일렬로 판사 앞에 서서 몇 마디 변명과 함께 선처를 호소하고 판사가 벌금을 매기는 우리 법원의 즉결심판 모습이 문뜩 떠올랐다.

법원 직원이 내미는 서류를 작성하고, 지정된 장소로 들어가니 판사나, 법원서기로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당신은 빨간 등 일시정지 위반 입니다. 이제 위반 당시 상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컴퓨터로 동영상을 틀어주었다. 내 우측에 있는 차량이 좌회전을 받는 가운데 내가 획 우회전을 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벌금은 124달러입니다만 65달러로 하겠습니다.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그 직원이 말했다.
“좌회전 차량이 있어서 나는 위험이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고 우리집 사정상 65달러도 큰 부담이다. 더 깎아줄 수 없느냐”라고 버텨보았다. 그러자 “위험에 대한 판단은 당신이 하는 게 아니라 법이 하는 겁니다. 당장 65불을 내기 어려우면 매달 조금씩 갚아 나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할말을 잃은 나는 “한번에 내겠다”며 새로운 벌금 서류를 받아 돈을 내고 법원을 나섰다. 초범이라 벌금면제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절반으로 깎인 벌금도 손해 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절반으로 깎은 게 어디냐며 와이프와 나는 모처럼 시내구경이나 하기로 하고 PIKE PLACE라는 100년 넘은 재래시장과 스타벅스 ORIGINAL(1호점)까지 들른 뒤 우리 차가 세워져 있는 시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니 우리 차 주변에서 경찰관이 어른거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경찰관이 “당신 차는 3-7PM NO STOP ZONE”에 있다. PARKING 위반”이라며 교통위반 티켓을 내미는 게 아닌가.

나 : “무슨 소리냐, 주차티켓에 3시25분까지 주차가 가능한 걸로 찍혀 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경찰 : “이건 주차티켓과는 상관없다”
나 : “방금 법원에 교통위반 벌금 내고 왔다. 경고로만 하면 안되겠냐?”
경찰 : “니 말을 믿지만 규정은 규정이다. 정 억울하면 CONTEST를 신청해라”

하고는 그 경찰관은 매정하게 위반티켓을 내밀었다. 결국 위반티켓을 받고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 많던 주차 차량이 온데 간데 없고 도로변에는 우리차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 위반티켓을 살펴보니 벌금이 38달러다. 법원을 왔다 갔다 하는 데 따른 기름값, 주차비를 감안하면 124불을 온전히 낸 거나 마찬가지다.

불황의 늪에 빠진 미국의 시와 경찰은 재정 충당에 혈안이 돼 있는 만큼 후에 연수를 하시는 분들도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시기 당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