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딤섬을 먹다 망국의 한을 생각하다

by

딤섬 먹다 망국의 한을 생각하다…대한제국 공사관 보기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 북동편 약 1.5㎞위쪽에 있는 로건 써클. 듀퐁 써클과 함께 백악관을 중심으로 삼각형 형태를 이루며 워싱턴의 중심을 구성하는 이곳은 남북 전쟁 참전 군인이자 상원의원을 지낸 존 A 로건을 기념해 만들어진 곳이다.

1972년 6월 미국 정부가 로건 써클 공원을 중심으로 빅토리아와 리처드슨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135채 등이 포함된 0.4㎢ 면적을 ‘역사지구(Historic District)’로 지정하면서 이곳은 고풍스러운 모습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1960년대에는 주로 흑인이 거주하면서 워싱턴의 흑인 문화 중심지로 불렸다. 최근에는 맛집과 수제 맥주집 등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워싱턴에서도 가장 트렌디 한 곳 중의 하나로 꼽히며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아내와 나도 이곳에서 맛있는 딤섬을 먹기 위해 찾았다. 그러다 근처에 대한제국 공사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대한제국 공사관 박물관을 둘러보게 됐다.

사진 1워싱턴 디씨 로건 써클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 모습. 역사 지구에 있던 32개국의 공사관 건물 중 유일하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벽돌과 목조로 지어진 지상 3층, 지하 1층의 빅토리아 양식 건물이 바로 조선이 미국에 건립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다. 1877년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미 해군 출신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세스 L 펠프스의 저택이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급변하는 세계 사정에 어두웠던 조선은 청국의 중재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맺고 1887년 초대 주미 전권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이 고종이 준 2만5000달러로 이곳을 구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흑인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이용되기도 했다. 미국 트럭노조인 팀스터스 유니온(Teamsters Union)의 사무실로 쓰였으며 1972년부터는 개인 집으로 사용됐다. 2012년 정부가 350만 달러를 들려 구입한 뒤 2015년 12월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원형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8년 5월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사진 2대한제국 공사관에 있는 공사 집무실. 사진 자료 등을 근거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한다.

이곳은 1889년 2월부터 16년 동안 미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사용됐다. 다른 로건 써클 역사지구 내에 있었던 32개국의 영사관 건물 중 유일하게 단독 건물로 사용되면서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별것 아닌 옛 공사관 건물이지만 이곳의 역사를 찾아보니 힘없는 조선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다. 1882년 청국은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이 갖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중재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공사를 조선에 파견했지만 정작 청국은 조선이 미국에 직접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을 반대했다. 산둥성이나 광둥성에서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듯이 청국의 속국인 조선이 미국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논리였다.

조선의 뜻이 완강하자 청국은 ‘영약삼단’(另約三端)의 황당한 원칙을 받아들이면 외교관 파견이 가능하다는 뜻을 전했다. 영약삼단의 원칙이란 첫째 주재국에 도착하면 조선 공사가 청국 공사를 먼저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부에 간다. 둘째,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 공사 밑에 자리 잡는다. 셋째, 중대 사건이 있을 경우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3공사관에 걸려있는 태극기. 당시 사진자료를 근거로 그대로 만들었다. 태극기를 바라보며 당시 선각자들은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제법 개념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지만 요즘으로 따져 주권 국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황당하고 치욕적인 내용이었다. 당시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아 박정양 공사는 미국 도착 다음날 청국 공사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국무부를 방문하고 미국 대통령 방문일자를 잡아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청국 공사가 박정양에게 따졌지만 그는 딴청을 피우며 영약삼단 원칙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부임한지 10개월 만에 본국으로 소환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뒷얘기까지는 아니어도 박물관을 지키는 관리인들은 옛 공사관 건물에 얽힌 각종 일화를 아주 상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줬다. 당시 3대 공사가 이완용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완용은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에 올랐다.

그가 미국 공사로 있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했지만 이를 조선의 근대화에 활용한 것이 아닌 자신의 안녕과 매국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또 당시 공사의 배우자로 온 조선의 여성들이 미국 상류층 인사 부인과 교류하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미국을 통해 조선을 지키려 했던 선각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공사관에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한 슬픔도 갖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1910년 8월 국권까지도 빼앗으면서 이 건물은 단돈 5달러에 팔리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사진 4공사관 3층에 전시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개화사상가이자 정치인인 유길준이 1883년 고종의 사절단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다 유럽 등을 둘러본 뒤 만든 책. 모두 24편으로 이뤄져 있으며 서양의 역사와 지리, 산업, 정치, 풍속 등을 기록해 놨다.

세상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강대국 힘의 논리에 휘둘리던 조선의 현실도 고스란히 공사관에 묻어났다. 130여년이 지난 현재 여전히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다.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힘이 없으면 ‘영약삼단’과 같은 황당한 요구를 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사관 건물을 나오며 문득 생각했다. 딤섬 먹었는데 어쩌지? 그거 중국 음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