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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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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다.

“자, 다 끝났어요. 대기실에서 별 이상이 없는지 지켜보다가 15분 뒤에 집으로 돌아가시면 돼요. 4주 뒤에 다시 오셔서 2차 접종을 하면 됩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게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걷어붙인 왼쪽 팔 위로, 쓱쓱 차가운 소독솜이 지나간다 싶더니 벌써 “끝”이란다. 정말이지 바늘 들어가는 느낌조차 나지 않았다. 주사의 달인임이 분명하다. 내 이름과 생년 월일, 백신 접종 일시와 종류는 ‘모더나’라는 것, 마지막으로 4주 뒤인 5월6일에 2차 접종을 하러 오라고 적힌 네모난 흰 종이를 건네받고도 긴가민가했으니까. 그날 밤, 왼쪽 팔이 뻐근하게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고서야 비로소 1차 접종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4월6일, 드디어 코로나19 백신을 맞았다. 접종 장소는 집에서 14마일(20km 정도) 떨어진 마트 내 약국이었다. 16살 이상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접종이 이뤄진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부랴부랴 예약한 덕분이었다. 접종 대상자 확대로 백신 부족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웬걸,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자주 이용하는 동네 한인 약국에서 존슨앤존슨의 ‘얀센’ 백신이 들어와 접종이 가능하다는 안내 전화가 왔다. 한인 약국은 집에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있고, 약국에 전화만 하면 당장 이틀 안에 맞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얀센 백신은 모더나와는 달리 한 차례만 접종해도 된다. 하지만 이왕 기다린 거, 조금 더 기다려 모더나를 맞기로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접종을 마친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백신 부족을 걱정했는데 골라 맞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다니. 트럼프 집권 당시 엉망진창이 됐던 미국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더나 접종 당일. 약국 밖으로 이어지는 긴 대기 줄을 예상했지만, 머쓱하게도 내 앞에 달랑 한 사람이 더 있을 뿐이었다. 약국 카운터에서 간단한 문진서 작성, 신분증 확인 뒤 2분쯤 대기하다 주사를 맞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우여곡절 접종기를 들려줘야지 한껏 별렀는데,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손으로 쓱쓱 작성한 종이 접종 카드를 사진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자랑했다. 에잇, 싱거워.

뉴스를 통해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이곳에서도 처음부터 백신 접종이 수월하게 이뤄졌던 건 아니다. 캘리포니아에선 1월19일, 의료진을 비롯한 필수 산업 종사자에 이어 65살 이상 고령자에 대한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이곳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접종 장소에 갔던 덕분에 접종 초기 상황도 직접 겪어볼 수 있었는데, 처음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였다. 65살 이상을 대상으로 접종을 하는데도, 예약 전화는 사실상 불통 상태나 다름 없었다. 안전하다는 당국자들의 얘기와는 달리, 백신 ‘부작용’ 관련 뉴스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다 보니 고민도 깊어졌다. 특히 모더나 백신의 경우, 접종 직후 귀밑 통증, 빨라진 심장 박동 등 부작용이 나타나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일시적으로 접종 중단을 선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단은 모더나보다 화이자가 더 안전한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LA카운티 백신 접종 사이트에선 대부분 모더나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나마도 몇 곳 안 되는 화이자 백신 접종은 주로 아직까지 접종을 끝내지 못 한 필수 산업 종사자들에게 우선 배정이 돼 우리 식구들에게까지 순서가 오지 않았다. ‘안정성이 검증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백신이 부족하다는데 있을 때 맞는 게 낫지 않을까.’ 접종 가능 장소를 알려주는 LA 보건당국 누리집(http://publichealth.lacounty.gov/)엔, 접종 장소마다 예약이 꽉 찼다는 안내 문구가 늘어가는데, 좀처럼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며칠 뒤, 노르웨이에서 화이자 백신을 맞은 고령자가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코로나19 백신 발생 1년여 만에 나온 백신 가운데 어느 것이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이자) 백신 접종 후 보고된 사망 건은 백신 접종과의 관련성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유럽의약청의 발표가 나왔다. 이어 모더나 백신의 부작용의 경우 특정 생산라인에서 생산된 일부 제품의 문제라는 보도도 나왔다. 화이자나 모더나나 그게 그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작용 우려보다는 감염 우려가 더 크다는 앤서니 파우치 박사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결정 장애를 극복했으나, 예약도 일사천리로 이뤄지진 않았다. 백신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한 데 사람들이 급속도로 몰려든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백신 접종 예약 사이트가 여럿이다 보니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곳에선, 캘리포니아주 백신 예약 시스템인 마이 턴(My Turn) 시스템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카본 헬스(Carbon Health) 예약 시스템, 카이저와 같은 병원, 랄프스, 라잇에이드, 월그린스, 코스트코 내 약국 등을 통해 접종 예약이 이뤄졌는데, 저마다 운영 방식이 전부 다 달랐다. 카본 헬스에서 예약을 시작하다가 접종 가능한 날이 없다는 메시지에 절망해 카이저 사이트로 가면 회원 가입부터, 사전 질문 답변까지 전부 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런 삽질을 몇 시간 동안 수차례 반복한 뒤에야 부모님 두 분의 접종 예약을 끝마칠 수 있었다. 집에서 30여 마일이나 떨어진 ‘LA다저스 스태디움’ 드라이브 인 접종지까지 가야 했지만, 그나마도 예약이 됐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1월25일, 첫 접종 일자. 미국 내 최대 규모 백신 접종 사이트인 다저스 구장엔 온갖 종류의 차들이 꼬리의 꼬리를 문, 장관이 펼쳐졌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량 행렬 옆으로 파란색 간이화장실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돼 있었다. ‘설마 저걸 이용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란데 커피 원샷을 했으니 화장실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두 어 시간 넘게 대기하는 동안, 형광 연두색, 주황색 조끼를 입은 봉사단체 ‘코어’(영화 배우 션 펜이 만든 단체라네요)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미니 케이크를 들고 와 동료를 위해 약식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난리 속 아스팔트 바닥에서도 청춘은 마냥 즐겁구나’ 함께 웃었다. 굉장히 뻔한 표현이지만 지루한 기다림 속에서 만난, 이 작고 예쁜 순간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을 떠올리기도 했다.

우리 삶이 어디 늘 희망대로만 되던가. 1차 접종 이후에도 그야말로 ‘이놈의 코로나19 정말 끝도 안 나겠다’ 분통이 터져나오는 안절부절할 일들이 이어졌다. 미 전역을 강타한 겨울 강풍으로 인한 LA로의 백신 이송 차질이 빚어지고, 주 정부의 행정 미비와 커뮤니케이션 실패 등으로 인해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뉴스가 연이어 나왔다. 게다가 의료종사자 및 65살 이상 백신 접종 대상자들의 수가 카운티 정부가 공급받고 있는 백신 분량을 훨씬 초과해 급기야 주말 접종 중단(2월12~13일) 사태까지 벌어졌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극우파 음모론자들의 접종 반대 시위(맙소사! 그냥 너네나 맞지 마세요!)까지 발생해 한때 접종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2차 접종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예약 접수 자체가 중단됐다. 일단, 1차 접종을 끝마친 이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접종 기일을 정해 문자와 이메일로 일정을 안내해주겠다는 메일이 왔다. ‘이러다 1차 접종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무렵, 2차 접종 일정(2월25일)을 알리는 메일이 도착했다. 1차 접종을 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권장 접종 간격(28일)보다 이틀이 늦어졌지만, 며칠 차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별 도리가 있을까.

2월25일,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다저스 구장 골든스테이트 게이트 부근 도로엔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기다(corona virus scam)’, ‘마스크는 이제 그만(no more masks)’이라는 문구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안티 백신 음모론자들의 시위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지나 길게 줄을 선 차들이 다저스 구장 넓은 주차장에 주황색 원뿔 모양 라바콘으로 낸 길을 따라 구불구불 운전해 접종 구역으로 이동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는 구불구불 일방통행이라, 차가 한 번 진입하면 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예약 날짜가 하루 이틀쯤 다르거나, 예약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접종 대상자이기만 하다면 현장에서 즉석으로 접종을 해주더라는 얘기들이 나오는 게 이 때문이구나 싶었다. 이때만 해도 인구 1004만명인 LA카운티의 접종자 수(2월18일 현재)는 167만6900명(미국 전체로는 823만2420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2차 접종까지 끝낸 사람은 고작 47만1162명. 4월까지 집단면역을 형성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이미 물건너 간 상황. 하루라도 일정을 당기려면 무엇보다도 접종 인원을 늘리는 게 급선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일단 접종 장소까지 온 사람은 가급적 돌려보내지 않고 접종을 해주고 있는 듯했다.

가족들이 모두 접종을 마친 뒤 열흘이 지났다. 다들 무사하다. 팔이 욱신욱신 쑤시고, 2차 접종 뒤 “아이구 아이구” 소리가 나올 정도의 몸살로 종일 침대 신세를 지긴 했지만, 그것도 딱 하루 뿐이었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접종 뒤 후유증이 심하다’더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기분이 좋았다.

한국에서 온 이 단기 체류자까지 접종을 마쳤지만, 아직도 미국 내 백신 접종률은 36.6%(14일 기준, 영국 옥스퍼드대 ‘아워월드인데이터’), 캘리포니아주의 접종률은 37.7% 수준이다. 집단면역 형성을 위한 목표치(70%)를 달성이 예정보다 더디게 이뤄지고 있지만,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확진자 발생 및 입원 환자 감소 추세 등을 들어 오는 6월15일 완전 정상화를 벼르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13일부터 12~13살 청소년들까지로 백신 접종(화이자)이 확대됐고,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들은 실외와 실내 대부분 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근책을 내놨다. 하지만 오히려 마스크 찬반론자들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며 또 다른 혼란만 만드는 게 아니냐고 벌써 말들이 많다. 아휴,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19! 어쨌거나 두 차례 접종을 마치고 2주를 보낸 나는 내일 워싱턴 D.C.로 여행을 떠난다. 마스크는 꼭 쓰고 갈 테니, 염려는 붙들어 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