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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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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입니다. 차로 대략
4시간 반이 걸립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의 첫 여행지는 시카고였습니다. 티라노사우로스 화석으
로 유명한 시카고 자연사박물관(The Field Museum)에 갔을 때 저는 소장품보다 인도나 파키스탄
사람으로 보이는 한 가족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그 가족은 지하 1층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에서
도시락으로 싸온 밥을 손으로 평화스럽게 먹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놀이공원이 음식물 반입과
관련해 관람객들을 구차하게 만드는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던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주
위를 둘러보니 직접 싸온 샌드위치 등을 꺼내 먹는 미국인들도 많았습니다. 도시락에 대한 편견
은 한국의 레저·여행 관련 기업들이 조장한 상술의 결과물이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어쨌든 그 날 이후 저희 가족도 여행을 갈 때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의 고생이 불가
피하지만 도시락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아이들의 건강입니다. 인디애나주는 지리적으로 미국의 중동부에 있어 워싱턴이나 뉴욕 등
동부를 갈 때도, 플로리다 등 남부를 갈 때도, 그랜드캐넌 등 서부를 갈 때도 10일 이상의 시간
이 소요됩니다. 만 세살이었던 제 막내는 어린 데다 유제품을 많이 먹으면 두드러기가 생기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음식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하루에 두 끼 정도를
한식으로 먹으니 여행할 때 피곤하거나 아픈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너무 감사한 일
이었습니다.


둘째, 시간이 절약됩니다. 여행에서 맛집 기행은 빼놓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저희 가족이 사우
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을 여행했을 때 일입니다. 그 곳의 유명한 해산물 식당을 갔는데, 기다리
는데 한 시간이 걸렸고, 자리를 잡고 주문한지 또 1시간이 다 돼서야 음식이 나왔습니다. 여기
서 끝이 아닙니다. 웨이터 입장에서 많은 손님을 받아 팁을 더 받아야 하는 처지는 이해가 되지
만, 음식이 늦게 나올 때는 저희 테이블 근처에도 안 오던 웨이터가 “아직 식사중이냐”고 보
채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대했던 맛집 기행이 가장 불편했던 일정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도시락을 싸면 시간을 예측한 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서부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맥도널
드, 버거킹을 찾아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식당을 가느라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향할
때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떠올리기조차 싫어집니다.


셋째, 도시가 아닌 지역을 여행할 때 편합니다. 저희 가족은 올해 6월말 옐로스톤과 요세미티,
아치스, 자이온 등 서부의 자연경관을 둘러봤습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에 식당이 있으
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국립공원에서 최소한 1시간 산길을 달려야 마을이 보입니다.
국립공원 내의 식당의 경우 피크타임에는 인산인해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좋은 경치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넷째, 미국의 관광지는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요세미티의 카페테리아는 외부
음식 반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하지만 야박하지 않게 내부가 아닌 외부에
도시락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들을 마련해 놓았더라구요. 또 저희 가족이 캐나다 오타와 국립미
술관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동하느라 점심 때가 지났고, 너무 더워 밖에서 도시락을 먹기가 힘
들었습니다. 미술관 안에 의자와 탁자가 있는 곳이 있어서 직원에게 “여기서 도시락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가능하다”는 친절한 답변이 돌아오더군요. 또 켄터키 맘모스
동굴 국립공원에 갔을 때는 비가 왔는데 천장을 나무로 덮은 쉘터가 있어 도시락을 먹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다섯째,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얘기는 굳이 안 해도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사족을 붙이
자면, 연수자들이 다니는 미국 관광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들이라 그 곳의 음식값이 합리적
인 가격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피자 한 조각과 콜라 한 잔에 19달러, 여기에 세금까지 붙는다
면 가족의 한 끼 정크푸드 식사에 100달러 가까이 됩니다. 제 경우에는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희 가족은 일회용 그릇을 준비해 카레와 짜장, 제육, 불고기
등을 덮밥 형태로 먹었고, 볶음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실내에서 식사를 할 때는 김치 같은 밑
반찬을 꺼내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포함해 저희 가족은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 도시락 예찬의
마지막 여섯 번째 장점은 추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도시락의 단점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큰 것은 부인의 일방적인 희생이지요. 제 처는 여
행 출발 전에 준비를 다 해놓고 당일 아침 호텔에서 그날 먹을 도시락을 싸곤 했습니다. 긴
여행의 경우 미리 검색해 둔 한국마트를 찾았습니다. 미리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처를 볼 때는 미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짐이 많은 것도 번거로운 점입니다. 차를 타고 여행할 때는 그래도 견딜만 하지만 비행기 여행
을 할 때는 힘들더군요. 비와 더위 등 날씨에 취약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어린 자녀가 있고, 긴 여행을 해야 한다면 저는 도시락을 권하고 싶습니다. 제 처에게도 이 자
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