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대학 강의와 영국 ‘경험주의 전통’

by

내가 다니고 있는 영국 Cardiff 대학의 경우, 수업시간이 아침 9시 정각이면 교수는 8시50분께 이미 강의실에 들어와 있다. 물론 모든 강의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교수가 일찍 강의실에 들어와서 수업준비를 하는 풍경은 흔하게 볼 수 있다. 미리 예고 없이 수업이 휴강 되는 일도 거의 없다. 학기마다 너댓 과목을 들었는데, 갑자기 교수가 무슨 해외출장이나 학술 세미나 참석 등의 이유로 휴강을 하는 건 한번도 본 일이 없다. 강의 일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 학술 세미나 참석 등은 그 다음에 고려할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놀라운 건 강의 도중에 학생이고 교수고 할 것 없이 빵이나 사과 같은 것을 꺼내서 먹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빵을 꺼내서 우적우적 씹어먹는 광경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교수 역시 강의 도중에 빵을 먹기도 했다. 사실 이 대학의 많은 교수들은 점심 시간을 따로 챙기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아무 때나 학생들이 이용하는 구내매점에 내려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들고 자기 연구실로 올라간다.

노사관계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Peter Turnbull이란 교수는 어느날 강의시간에 초콜릿이 한 뭉치 들어있는 종이 상자를 손에 들고 대학원 수업시간에 나타났다. 그러더니 강의 도중에 수업내용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을 학생들한테 던지고, 그 질문에 손 들고 답을 하는 학생들한테 초콜릿을 하나씩 던져주기 시작했다. “초콜릿 먹고싶은 사람 또 없나?”

흔히 영국의 대학원 수업에서는 과목마다 교수 또는 강사 서 너명이 한 팀을 이뤄 공동으로 학기 강의를 책임진다. 한 학기 ‘노사관계이론’ 과목의 경우 총 15번의 강의가 진행된다면 이 과목 강의팀에 소속된 교수들이 자기 세부 전공에 따라 서 너번 씩 강의를 맡는 식이다. 어떤 교수는 국제노사관계 쪽을, 다른 교수는 노동조합운동 쪽을, 다른 교수는 여성노동 쪽을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강의 내용이 너무 많아 벅차다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 흥미로운 건 많은 강의에서 ‘YouTube’(인터넷 유저들이 스스로 비디오를 올리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웹사이트)가 종종 이용된다는 점이다. 강의 내용과 관련된 어떤 좋은 비디오나 영화 속 장면을 강의 시간에 시청하는 것이다. 흥미를 돋을 뿐 아니라 ‘경험적 현실’을 통해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배려다. 영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론’이나 ‘합리적 이성’보다는 현실적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강의는 Lecture class(교수의 일반적인 강의)와 Tutorial class(학생들을 서너 개 소수그룹으로 나눠 진행하는 수업)로 나뉜다. 모든 학생은 Tutorial class에도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과목마다 1주일에 2시간은 Lecture class에 또 2시간은 Tutorial class에 들어가야 한다. Tutorial class에서는 일반 강의에서 다룬 여러 내용 가운데 한 두 가지를 뽑아서 심층적으로 다루거나 현실에서 적용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다룬다. 이 역시 경험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일까?

조금 더 나아가 말한다면, 영국 연수 중에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면 쓸 논문의 주제를 이론보다는 ‘실증연구’로 잡고,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사례 연구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하는 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물론 순수이론 쪽 공부를 하는 경우는 별개다.

사실 20세기 경제학의 고전인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을 펼쳐보면 수식이나 그래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케인즈는 시장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경제행위를 하는지를 세밀히 관찰했다고 한다. 또 기업가들이 투자 등 기업활동에 관한 의사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실제로 들여다보고 이로부터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유럽의 합리주의와 구별되는 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이다.

그래서인지 영국의 많은 교수들은 Case Study를 줄곧 강조한다. 거대하고 복잡한 이론 연구보다는 작고 미세한 현장 사례연구를 ‘쓸만한’ 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주고, 또 그렇게 논문을 쓰라고 항상 주문한다.

영국의 경험적 현실주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어린이 텔레비전 채널인 BBC의 ‘CBeebies’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진행자로 흑인, 아시아계 소수인종, 한쪽 팔을 잃은 장애인이 줄곧 등장한다. 늘씬하고 예쁘장한 영국 본토 출신의 젊은 여성들이 나와서 혼자 프로그램을 이끄는 장면은 보기 힘들다. 두 사람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한 사람은 영국 본토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수인종이거나 장애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런던에 사는 사람의 절반 가량이 소수인종인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뭔가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과하는 벌금의 경우에도 벌금액의 범위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한다. 즉결심판 때 벌금을 내야하는 사람의 금전적 여력과 재산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 벌금액을 확정하는 식이다. 사소한 잘못 때문에 패가망신하도록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일련 번호가 적힌 종이에 숫자 ‘6’과 ‘9’가 동시에 등장하면 그 숫자 밑에 ‘six’와 ‘nine’을 명시해 혼동을 막는 것도 영국인들의 현실 중시 성향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몇가지 더 덧붙이면, 영국의 대부분의 계단에는 맨 위와 맨 아래계단 층계참에 반드시 노란색으로 색칠을 해놓았다. 눈에 확 띄도록 해놓은 것인데,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한 배려다. 런던에 있는 어느 철도역에는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갑자기 공기의 이상기류가 초래될 수 있으니 열차를 기다릴 때 조심하라’는 안내문까지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