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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소식-촛불행렬을 바라본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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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행렬을 바라본 소회



^지금 시각은 14일 낮 12시(뉴욕시간). CBS 등 미국의 주요 방송은 보도 프로그램을 잠시 중단한 채 워싱턴.D.C. National Cathedral에서 진행 중인 추모 기도회를 생방송하고 있다. 앞좌석에는 부시 대통령, 파월 국무장관 등 미 정부 수뇌부의 모습이 보인다.

^잠을 설친 탓인지 정신이 개운하지 않다. 어제 저녁 10시 30분.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로어 맨해튼 건너편의 섬)에선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우리 집앞 도로에도 촛불을 든 동네 주민들이 보도를 따라 죽 늘어섰다. TV에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연통문을 돌려 추모의 밤을 마련했다는 기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2층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촛불을 든 중년 여성 세 명이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중 한 여성이 갑자기 얼굴을 돌려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순간 난 움찔했다. 마치죄인이라도 된 듯, 급히 창문을 떠나 안쪽으로 들어왔다.

^혹시 오늘 밤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진 않을까! 순간, 아랍인들에 대한 증오가 소수민족인 한인들에게까지 비화할 수도 있다는 교민 사회의 우려가 떠올랐다. 잠을 청했지만, 온갖 불길한 생각 때문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리에서 성조기를 나눠주는 뉴욕 시민들과 무너져 내리는 월드 트레이드센터,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들, 붕괴된 폐허더미 속에서 성조기를 게양하는 구조대원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이 날 오전 부시 대통령이 기자들과 만나 눈물을 글썽이며 했던 말도 한동안 뇌리를 맴돌았다. “지금 미국에는 조용한 분노가 흐르고 있다.”

^미국 언론은 집요하게 희생양을 찾는 모습이다. 방송에선 연일 격앙된 어조로 강력한 응징을 요구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America is strong’, ‘We are stronrer than ever’라고 말하는 시민들의 격한 목소리를 듣는다. 군사 전문가를 동원,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은거 중인 것으로 알려진 아프카니스탄의 지리적 특성까지 분석하며 공격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언론도 있다. 보복공격을 기정사실화하며 미 정부의 결심을 채근하는 듯한 느낌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사고 첫날, 데일리 뉴스의 1면 제목은 ‘이제 전쟁이다’였다. 사건 발생 만 3일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Evil bastards killed them all’ ‘You can not stop us’ ‘Shock gives way to anger’.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았다.

^지식인들마저 방법과 강도만 다를 뿐, 보복과 응징이 이뤄져야 한다는 데는 목소리를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분노와 이기심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 보자. 미국과 아랍간의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테러는 보복을 낳고, 보복은 더 극렬한 테러로 이어졌을 뿐이다. 지금은 수십 년간 지속돼 온 대립의 원인을 냉철히 반성하고, 궁극적인 화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인류의 미래를 무너진 미국인의 자존심과 바꿀 수는 없다.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무차별 보복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출정식을 방불케 했던 추모 기도회가 끝나고, 방송은 다시 희생자 가족들의 울분을 쏟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