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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후된(?) 공공 인프라 VS ‘신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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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처음 올 때 상상했던 것과 정작 영국에 도착해 적응하면서 느낀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람들의 일하는 속도가 느려서 답답하다는 얘긴 익히 들었지만, 사회 인프라와 공공서비스 분야가
이 정도로 낙후돼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영국이 대외적으로 가진 이미지인 빨간 2층 버스
와 빨간 전화 부스 등에 대한 환상을 장기연수자가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다. 깨진 환상 못지 않게 영국인들의 문화에 대해 배울 점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중교통


처음에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영국의 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이었다. 미국의 뉴욕에
서도 잠깐이나마 지하철을 이용했던 터라 어느 정도 지저분하고 오염된 부분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오래되고 낙후된 것을 떠나 이용하기 불편한 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딸아이가 만 4살이
었으므로 유모차 이용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유모차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은 몇몇 정
거장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층마다 리프트 시설이 분리돼 있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하철역 내부에서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유모차를 거의 들고 다녀야 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지하철이 2~3분에 한 대씩 수시로 운행되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지하철을 구간별로 운행하지 않거나, 심지어 주중에도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당장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며 단신으로라도 기사화되겠지만 영국 런던
에서는 일상화된 패턴일 뿐이었다. 런던 교통공사(Tfl)는 매주 No service 구간을 친히 뉴스레터로
보내준다. 하지만 그 구간은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구간인 경우가 많다. 그저 통보하면 대중
들은 불편함을 감내하고 시간이 지하철의 두배 이상 걸리는 버스나, 요금이 상상 이상으로 비싼 택시
등 타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주말에 지하철이 운행하지 않는 구간이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중에는 문제가 없을까? 주중에도 지하철이 멈추는 일이 간혹 있다. 지하철 기관사는 이 경우 “앞
지하철이 Delay돼 운행을 잠시 중단한다. 언제 다시 서비스가 재개될 지 알 수 없다”는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나는 ‘그저 길어야 5분이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지하철은 꼼짝
도 않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국인들 가운데는 서둘러 내리는 승객도 있었고, 그저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승객도 있었다. 결국 지하철은 1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운행을
재개했다. 바쁜 출근길이었다면 영락없는 지각이었다.


기차의 경우에는 더욱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 런던브릿지행 기차의 경우 하루에도 수시로 취소되는 일
이 다반사였다. 석사과정 Classmate 중에 기차회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영국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낡고 오래돼 겨울에는 더욱 자주 취소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들도 인정하지만 철도 역사가 오래
되다보니 유지보수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한번은 영국 소도시 여행을 위해 브리스톨(bristol)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시점이 패딩턴(padding
ton)역이었는데 갑자기 Signal 문제 때문에 브리스톨행 기차가 전면 취소됐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람들은 안내데스크로 몰려들어 경위를 묻느라 아우성이었다. 직원은 “언제 서비스가 재개될지 알 수
없다. 시외버스를 이용하거나 지금 워털루(waterloo)역으로 가면 바스(bath)나 브리스톨로 가는 기차
가 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사람들은 난민처럼 무거운 짐들을 이끌고 일제히 워털루역으로 향했다.
우리 가족도 유모차에 대형 짐가방까지 끌고 워털루역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기차를 잡아
타기는 했지만, 5분만 늦었어도 기차를 놓칠뻔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다 풀어놓기에는 밤을 새도 모
자랄 지경이다.


빨간 2층 버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명물로 꼽힌다. 지하철에 비하면 장애인과 유모차를 배려하는 시스
템이 잘 돼 있고 노선도 다양한 편이다. 24시간 운행하는 야간버스 시스템도 있어 한국보다도 편리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은 버스에서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가 다니는 골드스미스(goldsmiths)
대학 근처 루이샴(lewisham)에서 버스를 타면서 버스기사에게 집 근처인 캐나다워터(Canadawater)
역에 가느냐고 물었다. 버스기사가 “Yes”라고 대답해 올라탔는데, 골드스미스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
를 세우더니 갑자기 행선지 간판을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서 왜 간판을 바꾸느
냐고 물었더니, 그저 “No more Canadawater”라고 간단히 답할 뿐이었다. 평소 익숙한 골드스미스
대학 근처라서 지하철로 갈아타긴 했지만, 운행 도중에 행선지를 바꾼다는 것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버스에 올라타 잠들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잘못된 목적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 다시 한번 놀란 것은 영국은 역시 ‘신사의 나라’ 라는 점이
다. 앞서 지하철에서 유모차 이동이 어렵다고 불평했지만, 사실 이동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영국
인들은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유모차가 가는 계단 앞에 서기가 무섭게 달려와서 서로 도
와주겠다고 말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 내에서도 이들의 ‘기사도 정신’
은 빛을 발한다. 우리 세 가족이 지하철을 타면 아이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와 아이 뿐 아니라 아빠에게도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배려가
아닐까 싶다.


버스 여행을 하거나 길을 물어봐도 영국인들은 친절이 몸에 베어 있는듯 했다. 단순히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길마저도 심지어 구글을 검색해서 알려주는 친절함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임산부들에 대한 배려도 남다르다. 임산부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당당하게 ‘baby on board’라고 쓰여진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 한번은 출근 시각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누가 옆에서 툭툭 치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임산부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붐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baby on board’ 배지를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임산부 배지를 달았더라도 자리를 용감하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기는
커녕 노인들이 오히려 임산부에게 일어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생각하니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