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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남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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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후 한번도 전쟁을 쉬지 않은 나라, 미국의 이런 상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다. 이라크 전쟁의 희생자들이 묻힌 곳이 제 7구역, 처음 조성된 1구역이 남북전쟁의 첫
희생자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조성한 사람은 북군의 병참을 담당했던 몽고메리 메거스다. 웨스트 포
인트 출신의 메거스는 남북전쟁으로 21살의 아들을 잃었고, 그 원인이 자신의 사관학교 친구이자 남군의
총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메거스는 리 부인의 장미정원이었던 알링턴 하우스를
북군 희생자 1만6천명의 안식처로 삼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로버트 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
까지는 정의의 승리. 독립 초기 순수한 미국의 모습이 구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스톤마운틴의 영웅으로 돌아온 로버트 리


조지아 애틀란타 인근에는 스톤마운틴이라는 국립공원이 있다. 끝없는 평원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덩어리
가 불쑥 솟아 있는 모습이다. 이 바위 정상에서 바라보는 끝없는 평원 그리고 애틀란타의 화려한 건물 뒤
로 보이는 석양은 정말 일품이다.


국가 기념일이나 주말이 되면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를 배경으로 레이저 쇼가 열린다. 당시 조각을
하던 일꾼들이 비가 오면 말의 콧구멍에서 비를 피했다고 하니 실제 부조의 크기를 짐작 할만하다. 특이
한 점은 이 부조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로버트 리를 포함한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이다.
레이저 쇼의 내용은 이렇다.



세 명의 장군이 (어쩔 수 없이)용감하게 남북전쟁에 참여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리 장군은 전쟁 중단(항복)을 결정한다. 스스로 부러뜨린 칼은 이후 다시 합쳐지는데 이 때 남북도 하
나의 나라로 합쳐지며 미국의 거대한 지도를 완성한다. 요컨대 남부가 항복한 것은 one nation 이라는
합중국의 정신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다는 해석이다. 


아이들과 자주 이곳을 찾는 나에게 궁금한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이었다. 레이저 쇼 내
내 나는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정말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다.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전쟁, 인간을 돈(현시세로 흑인 노예 한명은 3천만 원이었다)으로 사고 팔고, 노예가 도망
을 치기라도 하면 그 가족들을 뿔뿔이 내다팔아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던 백인 주인들의 잔인함과
야만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을 이렇게 미화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것만이 스톤마운틴 영웅들에 대한
미국 전체의 정서는 아니다. 북부에서 온 사람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레이저 쇼 내용을 보고,
남부(꼴통들)는 하나도 안 변했다고 혀를 끌끌 차기 마련이고, 이 지역 사람들은 남북전쟁의 패배로 북
부에게 당한 상처를 이런 식으로라도 감싸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로버트 리의 자손이 흑백 차별을 비판


다행인 것은 이런 의식과는 대조적인 움직임도 활발하다는 것이다. 올해는 소설 ‘앵무새 죽이기’가 출
간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도시 앨라바마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하는 약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7월 14일 ‘앵무새 죽이기’의 작
가 ‘하퍼 리’의 새로운 소설 출간을 앞두고 곳곳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그레고
리펙이 주연했던 영화를 상영하고(원작에 가장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즈앤 노블‘같은 대형 서
점에서는 커피와 과자를 제공하며 ’앵무새 죽이기‘ 12시간 읽기 행사를 열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가 ‘하퍼 리’가 남군의 지도자 ‘로버트 리’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할아버
지는 남군의 지도자였지만 ‘하퍼 리’는 미국사회의 흑인 차별을 소재로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앵무새 죽이기의 원제 ‘To Kill Mocking Bird’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mocking bird)
를 죽이지 말라는 대사에서 기원했다. 소설 출간 50주년, 여기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발생한 총기 사
고에 대한 반성에서 행사는 더 크고 뜻 깊게 열리는 듯 하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앵무새들이 죽음 앞
에 놓여 있는 미국의 현실은 남북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