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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금융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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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금융 생태계 YTN 차장 유투권 연수기관: 산호세주립대
실리콘밸리의 금융 생태계
1. 성장의 선순환이 불러온 낙관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101번 도로. 101번 도로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까지 대략 80km 구간을 따라 2만 개에 육박하는 IT기업이 모여 있다.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의 견인차로 불리는 실리콘밸리이다. 당연히 실리콘밸리의 동맥인 101번 도로에는 24시간 끊임없이 차량이 흐른다. 등하교 시간과 맞물린 러시아워에는 서울 도심을 뺨치는 수준의 혼잡이 빚어진다. 그러나 교통 사정은 나날이 더 악화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사람과 돈이 모여들다보니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동일한 경제권으로 분류되는 인근 오클랜드까지 포함해 한 해에 인구가 10만 명이 늘어난 적도 있다. 신도시 하나가 새로 생겨난 셈. 덕분에 산호세의 평균 주택 가격이 120만 달러를 넘어설 정도로 주택 시장이 들썩거리고 있다. 결국 산호세 남쪽으로 대규모 신도시를 조성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교통 인프라를 증설하는 데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인근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민들도 절박하다. 실제로 지난해 말 대선과 함께 치러진 주민 투표에서 교통 환경 개선을 위한 증세 방안은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부분적인 도로와 시설의 개보수를 통해 조금이라도 교통 흐름을 개선하려는 의도이다. 말 그대로 궁여지책이다. 폭발적인 도시의 성장이 계속되는 한 뾰족한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에는 미국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가 넘쳐흐른다. 사람들의 얼굴은 편안하다. 조경이나 청소 등 3D 직군에 종사하는 히스패닉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후미진 상점에도 활기가 넘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 그렇지만 과거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기대되는 도시, 성장의 선순환이 불러온 낙관이 지배하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 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

두말할 필요 없이 실리콘밸리의 성공은 수많은 요인이 결합된 결과이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실리콘밸리는 2차 대전 직후 스탠포드 대학이 80만 평 규모의 연구 단지를 조성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기에 진입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도 그 때 얻었다. 때문에 지식의 실용적 활용을 중시하는 전통 속에서 초창기부터 적극적인 창업 지원에 나섰던 스탠포드 대학이 없었다면 오늘의 실리콘밸리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1) 하지만 아무리 스탠포드 대학이라고 해도 특정 대학의 노력만으로 지금의 거대한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다. 관련해 스탠포드 대학의 윌리엄 밀러(William F. Miller) 교수는 ‘고도의 지식 집약, 풍부한 고급인력, 노동시장의 유연성, 개방적 사업 환경, 역동적인 지역 사회, 벤처 캐피탈, 풍족한 인프라, 유기적인 산학연 관계, 기업가 정신’으로 실리콘밸리의 특성을 집약해서 정리한 바 있다.
여기에 부연하고 싶은 것은 세계 최대의 시장이자 첨단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그 자체의 위상이다. 설령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더라도 단기간에 세계의 주목을 끌고 새로운 기술 흐름을 흡수하기 데는 미국만한 곳이 없고, 그래서 전 세계 스타트업(혁신형 창업 기업)들에게 미국 시장 진출은 성공을 위한 핵심 관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의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거쳐 KOTRA 실리콘밸리사무소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정글팬더나 이놈들연구소, JD사운드 등이 미국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Kick Starter’에 진출한 것도 당장의 필요한 지원보다는 이런 효과를 노린 행보이다. 동시에 스웨덴과 인도, 중국 등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한 많은 나라들이 기대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결국 스스로 혁신의 표준이 된 미국의 위상은 단기간에 모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강조하고 싶은 점은 실리콘밸리 특유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의 문화이다. 애초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들은 1850년대 금광을 찾아 모여든 수많은 이민자에 의해 건설됐다. 출신 배경이나 인종보다는 새로운 도전과 개척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문화는 이후 동아시아나 인도, 유럽의 우수한 이민자들을 지속적으로 끌어 모으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또 이렇게 유입된 이민자들로 다양성이 더욱 심화되면서 지금은 미국 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관용적이고 수평적인 사회 문화를 구축했다.2) 캘리포니아, 특히 실리콘밸리 주민들이 이민자 정책을 포함해 동성애, 종교 분리 등 예민한 정치 현안에 대해 가장 진보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분석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인종적 다양성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Apple 본사가 위치한 쿠퍼티노(Cupertino) 지역의 경우, 아시아 출신 인구가 64%인 반면 백인은 29%에 불과하다. 산호세의 경우도 히스패닉 33%, 아시안 33%로, 28% 정도인 백인 인구 비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또 실리콘밸리 전체 기업의 43.9%는 이민자들이 설립한 기업이고 스탠포드와 UC Berkeley 등 주변 유수한 대학이 배출하는 인재들을 봐도 백인의 비율은 40%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경쟁력 있는 인재들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연방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실리콘밸리의 인종적 다양성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1) 스탠포드 대학 출신이 창업한 기업의 매출은 프랑스의 국내 총생산과 비슷한 2조 7,000억 달러에 이르고, 1930년대 이래로 동문들이 영위하는 기업은 3만 9,900개, 창출된 일자리는 무려 540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의 약 25%가 학교 주변 32km 안에 기업을 세우는 등 졸업 이후 창업에서도 학교와의 지속적인 연결을 통하여 시너지를 창출하고 있다.
2) 실리콘밸리가 MIT와 하버드 대학 중심으로 구성된 동부의 루트 128 단지와 설립 배경보다 더욱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기업간, 특히 유력 기업과 소기업간의 수평적인 협력 문화를 꼽는 분석이 많다.

3. 모험을 즐기는 금융 생태계

미국이라고 창업에 대한 실패 가능성이 낮은 수준은 아니다.3)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에서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인재들이 끊임없이 창업에 나서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모험을 즐기는 벤처캐피털의 존재이다.
국내 언론에도 크게 소개된 사례를 보자. 에어비앤비는 20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해 지난해 첫 흑자를 내기까지 무려 9년이 걸렸다. 당시의 기준으론 황당한 사업 모델4) 때문에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던 에어비앤비는 2009년 유명한 엑셀러레이터5)인 와이콤비네이터를 만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업 계획을 보완해가며 2011년까지 무려 1억 1,0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한다. 이후에도 투자 자금을 회수하기보단 기업의 성장을 기다려줄 준비가 돼 있던 투자자들로부터 매년 수억 달러의 투자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결국 별도로 소유한 호텔 하나 없이 기업 가치가 34조 원에 이르면서 메리어트 같은 유명 호텔 체인보다 큰 기업이 됐다.
에어비앤비의 사례는 혁신을 잉태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때까지 밀어주는 실리콘밸리 금융 생태계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투자자를 넘어서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의 개념 아래 함께 기업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 두 개의 뛰어난 스타트업을 키워내는 것보다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미국 벤처캐피탈의 40% 이상이 실리콘밸리에 집중돼 있어 스타트업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6) 특히 창업 초기부터 기업 공개까지 각 단계에 특화된 자본이 형성되어 있어 적기에 꼭 필요한 만큼의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벤처캐피탈 전문 기업뿐만 아니라 포드(Ford)와 제너럴 모터스(GM), 스타벅스(Starbucks) 등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3)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쉬크하 고쉬(Shikhar Ghosh) 교수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벤처캐피탈 기업으로부터 100만 달러 이상 투자를 받은 미국의 2,000개 벤처 기업 중에 75%가 투자자에게 원금조차 돌려주지 못하였다고 평가했다.
4) 산호세주립대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들은 늘 강조한다. “벤처케피털 업계는 기존의 평가 기준으론 분석할 수 없는 황당한 사업 모델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평가가 가능하다면 그건 혁신적이지 않은 것이다.”
5) 창업 아이디어나 아이템만 존재하는 단계의 신생 스타트업을 발굴해 초기 자금과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6) 지난해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들은 총 310개의 거래와 39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해, 전년 대비 37%의 거래액 감소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미국 내 1위를 유지했다.

4. 엔젤은 어디에 있나?

소한의 현금 흐름을 창출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소위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단계를 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20년 전만 해도 엔젤 투자는 동문이나 지인 등이 지원하는 소액의 자금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수백만 달러의 펀드를 갖춘 전문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대략 7백만 명의 인가받은 벤처 투자자가 있으며, 이 가운데 75만 명 정도가 엔젤 투자자로 추산되고 있다. 또 1년에 1회 이상 투자하는 활동적인 엔젤 투자자는 30만 명에 이르고, 1건당 10만 달러의 투자가 이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엔젤 투자자 가운데에는 제시카 알바(Jessica Alba)나 애쉬튼 커처(Ashton Kutcher) 등 할리우드 스타나 일반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정작 엔젤 투자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1년 내내 열리는 F50, CSPA, Open SV, Stanford Start X, 500 Startups Batch, Rocket Spaces, Plug and Play Expo 등 각종 창업 피치 대회나 창업 컨퍼런스, meetup 이벤트를 쫓아다녀 봐도 누가 엔젤 투자자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 잘 알려진 대형 엔젤 그룹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엔젤 투자자들은 명함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한다. 오히려 ‘엔젤’이란 단어가 들어간 명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브로커나 이벤트 organizer인 경우가 많다. 또 엔젤 투자자들의 조합도 극히 잘 알려진 기관 외에는 구글 검색으로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런 숨어 있는 엔젤 투자자들을 찾기 위해선 우선 부지런하게 가능한 많은 이벤트에 참석해 어떻게든 강한 인상을 만드는 것이 기본으로 꼽힌다. 또 다른 경로는 이미 엔젤 투자를 받은 기업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를 첫발을 내딛은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다른 기업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언제나 분주히 움직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업 사관학교로 불리는 엑셀러레이터의 문을 두드리는 방법이 있다.

5. 창업 사관학교, 엑셀러레이터

2000년대 중반 이후 실리콘밸리에서는 초기 기업에게 소액의 자금뿐만 아니라 창업에 필요한 공간과 피치 교육, 나아가 벤처 투자자와의 연결까지 지원하는 엑셀러레이터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지금은 4백 개 이상의 기업을 키워낸 와이 컴비네이터(Y-Combinator)를 비롯해 500 스타트업, 테크 스타(Tech Stars) 등 100여 개의 엑셀러레이터들이 실리콘밸리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엑셀러레이터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은 스타트업들에게 지분 일부를 넘겨받는 대신 적게는 1만 달러, 많게는 20만 달러를 투자한다. 여기에 사무실 공간은 물론 집까지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3개월간에 걸쳐, 인큐베이팅 시설에서 사업에 관련된 노하우를 가르치고, 3개월 뒤 졸업할 때 실리콘 벨리의 유수 투자가를 모아놓고, Demo Day라는 발표회를 가지게 해준다. 실리콘밸리 진출 초기, 별도의 네트워크도, 최소 자본도 없어 생활고를 피할 수 없는 많은 스타트업들로서는 그야말로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학교 등에서 배울 수 없는 실전 사업 노하우와 나아가 평생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도 있는 엑셀러레이터 출신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6. 관건은 실패에 대한 관용

실리콘밸리의 혁신적 생태계를 관통하는 정신은 실패에 대한 관용이다. 미래의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community college 학생부터 유명한 벤처 캐피탈리스트까지, 모든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실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7) ‘빨리, 자주 실패하라 (Fail fast, fail often)’라는 경구는 실리콘밸리를 지배하는 이런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구이다. 실패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이 또 다른 혁신의 자양분이 이어지는 만큼 실패는 사회적 비용이 아닌 사회적 자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 끊임없는 패자부활전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금융기관과 제도가 시장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7) Rasmussen College의 2012년 설문 조사를 보면 창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창업 실패 경험’을 꼽은 기업가는 40%로, 창업 성공 경험은 꼽은 비율(39%)보다 높았다.